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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과 기고글]/국민일보

[기독교고전읽기] 어거스틴의 <자유의지론>(De Libero Arbitrio)

by 하늘땅소망 2017. 10. 31.

[기독교 고전 읽기]

어거스틴의 <자유의지론>(De Libero Arbitrio)

*이 글을 마이트웰브에 기고한 글입니다. 

1. 자유의지의 중요성

어거스틴의 <자유의지론>은 집필 당시 다른 저작에 비해 중요한 주제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악의 기원의 문제를 다루는 신앙의 본질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가장 중요한 주제였습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현대교회의 교단 분열의 신학적 배경과 은총과 칭의, 회심과 성결이란 신학적 주제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또한 자유의지의 문제는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킬 때 노예의지론이란 논문을 펴낼 정도로 중요한 신학적 주제였고 중요한 사안이었습니다. 이것은 다시 18세기 뉴잉글랜드에서 부흥 운동을 주도했던 조나단 에드워즈에게도 심각한 주제였습니다. 자유의지의 문제는 부흥, 즉 회심과 구원이 인간의 작위(作爲)로 가능한지 아니면 불가능한지를 판가름하는 논쟁의 전제였습니다. 실제로 어거스틴의 <자유의지론>은 일반 사람들이 일고 있는 것처럼 펠라기우스와 논쟁을 위해 집필한 것이 아니라 악의 기원 논쟁 상대자였던 마니교를 대적하는 일종의 논문과 같은 것입니다. 대화 형식으로 이루어지긴 했지만, 자유의지는 결국 악은 어디서 오는가? 하나님인가? 아니면 다른 무엇인가?에 대한 논쟁이었습니다. 좀 더 상세한 것은 저작 시기와 목적에서 다루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거스틴의 <자유의지론>은 마니교를 상대하는 저작이기는 했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통치 방식과 인간의 타락과 악의 기원 등을 논하는 신학적 주제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2. 저작 시기와 목적

어거스틴의 생애는 자신의 저작인 <고백록>에 잘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고백록은 전반적으로 세례까지의 과정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고백록 후반부는 철학적 사변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이후의 생활은 마지막에 저술한 <재고론>과 포시디우스의 <아우구스티우스의 생애>에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암부로시우스에게 세례를 받고 수사학 교수직을 중단합니다. 이젠 더 이상 세속적인 생활에 얽매이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기 원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하나님을 섬긴다는 표현은 수도적 삶을 의미했습니다. 포시디우스는 더 이상 아내라든지 육신의 자식, 세상의 부나 명예 따위를 추구하지 않고, 이제 동료들과 함께 하나님을 섬기기로 작정하셨다고 말합니다. 결국 어거스틴은 로마에서 화려한 생활을 뒤로하고 고향인 북아프리카로 돌아갑니다. 그곳에서 어거스틴은 금욕적인 생활과 저술활동을 하면서 보내게 됩니다. <재고론>에 의하면, 어거스틴은 밀라노에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잠깐 로마에 체류했는데 그곳에서 동료들과 악의 기원에 대한 토론을 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창조했다면 악도 하나님에게서 왔는가? 아니라면 악은 어떻게 생긴 것일까? 실제로 이 문제는 난해합니다. 어거스틴이 젊은 시절 몸담았던 마니교의 경우는 선과 악이 다른 곳에서 시작되었다는 이원설을 주장합니다. 만약 이것을 받아들이면 모든 만물이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되었다는 성경의 주장에 오류가 일어나고, 악 자체가 하나의 신적 능력을 가진 그 무엇으로 상정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마니교의 악의 기원설은 기독교로 회심한 어거스틴으로서는 도무지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토론은 악은 자유의지에서 나왔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창조한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을 자유의지로 거역하여 악이 생겨난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아마도 동료들과 대화하기 이전부터 자유의지에 대한 심각한 고민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어거스틴을 연구한 학자들은 <자유의지론>을 세례 후 로마에 머물 당시부터 집필을 시작해 로마에 있을 당시 1권을 완성했고, 2권과 3권은 고향에 내려가 주교직을 받는 과정과 그 직후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388년에 집필을 시작하여, 3권까지 모두 마치는데 약 8년 정도가 소모되어 396년 정도에 마친 것으로 보입니다.

집필 목적은 가장 먼저 마니교의 악의 기원설에 반박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유의지론>은 모두 3권으로 이루어진 적지 않은 분량입니다. <신국론>에 비할만한 양은 아니지만 악의 기원이라는 한 가지 주제를 논하는 책으로서는 결코 작은 분량이 아닙니다. <재고론>에서 어거스틴은 <자유의지론>의 목적이 자유의지에서 악의 기원을 이끌어 내기를 거부하고, 만물의 창조주라는 이유로 하나님에게 그 탓을 돌리며, 악의 본성을 불변하는 것으로,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한 것으로 주장하는 사람들을 반박하기 위한 것입니다. 비록 이 책은 하나님의 은총을 거부했던 펠라기우스를 대항한 책은 아니었지만 악의 기원을 논의하면서 불가피하게 하나님의 은총을 언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은 모든 선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어거스틴의 은총론의 토대를 이루는 것이며, 은총론을 거부한 펠라기우스를 간접적으로 공격하는 모양새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죄의 문제는 결국 하나님의 예지와 인간의 선택이라는 신학적 주제를 끌어올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범죄를 알고도 창조하셨는가? 선악과를 지었는가? 등의 수많은 난제로 끌고 갑니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은 이 책에서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지만, 악은 창조하지 않았고 인간의 자유의지에서 나왔음을 증명하고, 하나님의 예지와 섭리 등에 관련된 난해한 주제들을 다루게 됩니다. 해독 불가능한 난해한 현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어거스틴의 <자유의지론>은 하나님이 누구시며,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설명해주는 목회서신이라 할만합니다.

3. 책의 구조와 내용

 

1권은 로마에서 기록되었고, 세례 직후였기 때문에 후에 기록된 2.3권과는 약간의 시간적 간극이 있습니다. 그러나 전체의 논지는 하나님의 창조와 자유의지 사이의 긴장을 해설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재고론>에서 어거스틴은 자유의지론을 쓰면서 참으로 많은 점들을 거론했으므로 어떤 문제들은 나로서도 제대로 풀 수가 없었고 어떤 문제들은 현시점에서 기나긴 논의를 요하는 것이어서 뒤로 미루어지기도 하였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마지막 결론은 결국 하나님의 영광의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 목적이라는 고백 속에서 어거스틴의 신앙관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 책의 궁극적인 목적은 악의 기원이나, 하나님을 변증하기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데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유의지론의 중요한 논증은 악의 기원이기보다 인간을 구원하는 영역에 있어서 인간의 의지냐 아니면 하나님의 은총이냐의 문제로 귀결됩니다. 이것은 시작은 마니교 악의 기원론을 비판하고자 했지만 본론에서는 인간의 자유 선택만을 강조한 펠라기우스를 논박하는 형태로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 이제 책 속으로 들어가 봅시다.

1: 인간과 자유의지

서론 하느님이 악의 장본인인가?

1부 악은 이성이 욕정에 굴종하는 것

2부 자유의지가 ''악의 원천

3부 선한 의지의 기능을 보더라도 악은 자유의지에서 옴이 입증 된다

제발 부탁합니다. 하나님이 악이 장본인이 아니신지 내게 말씀해 주십시오.” 에보디우스와 어거스틴의 대화체로 기록된 <자유의지론>의 첫 문장입니다. 1권은 악은 어디서부터 왔는가?’에 대한 논의입니다. 어거스틴은 여기서 어떤 악을 두고 하는 말이냐?’고 반문합니다. 언뜻 이해하기 쉽지 않지만, 대화 속으로 들어가 보면 악을 규정하는 것이 그리 만만치 않음을 발견합니다. 하나는 우리가 행하는 악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당하는 악을 구분하여 말합니다. 첫 번째 악의 주체가 우리가 되지만, 두 번째 악의 주체는 하나님이 됩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께서 세상을 통치하신다면 어떻게 이렇게 불의할 수 있는가를 생각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면 악의 기원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 됩니다. 1권은 바로 악의 기원은 하나님인가를 묻습니다. 첫 번째 답은 간통의 예를 들어 모든 악은 정욕에서 시작된다.’(89)고 말합니다.

모든 악행이 악이 되는 까닭은, 정욕에 의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요 말하자면 질책 받을 만한 욕망에 의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라는 점이었다.”

어거스틴은 여기서 동물과 비교해 인간의 우월성이 이성에 있다고 보고, 바른 인간은 바른 이성의 지배를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이성의 지배를 받는 상태를 질서 바른 인간으로 부릅니다. 인간에게는 이성을 지배할 지성이 존재하고 지성의 바른 지배를 받는 이성을 소유한 자가 바른 사람으로서 살아갑니다. 문제는 지성이 정욕에 종속될 때 악이 출현하기에 이릅니다.

탐욕이 사방으로 그를 죄이고, 방탕이 그를 흩트려 놓고, 야심이 그를 사로잡고, 오만이 그를 부풀리고, 질투가 그를 괴롭히고, 나태가 그를 매몰시켜 버리고, 집념이 그에게 쓴맛을 주고, 모멸이 그를 깔아뭉갠다. 그 밖에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들이 저 정욕의 왕국을 드나들면서 뒤흔들어댄다!(그것이 작은 벌이라는 말인가?)”(119)

결국 악은 지성이라는 자유의지를 통해 출현하고, 악한 지성이 지배할 때는 죄를 짓게 됩니다. 어거스틴은 이곳에서 다시 3부로 넘어가면서, 비록 선한 의지가 조금 남아 있더라도 악은 자유의지에서 온다고 주장합니다. 비록 타락한 죄인이라 할지라도 사람은 누구나 바르고 정직하게 살고 최고의 지혜에 도달하기 희구하는’(123) 선한 의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즉 선한 의지가 있다고 해서 그가 선한 사람일까요? 물론 아닙니다. 어거스틴은 선한 의지가 악에 대하여 저항할 때 절제 있는 사람’(129)으로 부릅니다. 결국은 악은 의지에서 오며, 악에 저항하지 않는다면 악에 종속된 악인으로 살게 된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2: 하느님과 인간의 자유의지

서론 하느님과 인간, 그리고 인간의 의지

1부 하느님은 존재하신다

2부 모든 선은 하느님으로부터

3부 의지 또한 선이다

2권은 다시 하나님이 왜 인간들에게 의지의 자유 선택을 부여하셨는지’(149) 설명해 달라는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이 질문은 만약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지 않았다면 이 세상은 이렇게 불행하지 않았을 것이고, 나 또한 죄를 짓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억울한 호소와 비슷합니다. 이 호소에는 모든 책임이 자유 의지를 준 하나님께 있다는 원망이 서려 있습니다. 2권은 자유 의지를 준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인가에 대한 답이 될 것입니다.

1권에서 논쟁의 기초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 즉 모든 것의 기원은 하나님이시다라는 전제로 시작합니다. 2권은 좀 더 원색적인 전제인, ‘하나님은 존재하신다.’는 확실성에서 시작하자고 제언합니다. 사실 21부의 경우는 자유의지론 전체 논리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지만, 신존재 증명이라는 신학적 주제로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잠깐 언급해 봅니다. 첫째, 우리가 존재하고 인식하는 것을 확실합니다. 존재는 생명으로, 생명은 인식으로 나아갑니다. 둘째, 외부 감각에서 내부 감각으로, 내부 감각에서 이성으로 나아가는 인식의 작용입니다. 셋째는 형이상학적 관점에서 이성을 초월하여 나아가 다양한 주제들과 연관시킵니다. 어거스틴은 다양한 방식으로 논리를 전개한 다음 이성 우위에 진리가 존재하며, 진리가 존재함으로 하나님은 존재하신다.’(233)는 결론에 이릅니다. 진리의 존재 여부가 이성의 문제라며, 이것을 받아들이는 문제는 신앙의 문제입니다.

2부는 1부에서 결론지은 진리가 곧 하나님임을 증명한 것을 발전시켜, 모든 존재하는 것의 선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고 말합니다. 모든 아름다움은 수()를 지녔기 때문이고, 이 수()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인간이 느끼는(인식) 아름다움은 하나님께서 선사하신 아름다움과 그것을 감지하는 인지능력 때문입니다. 결국 모든 선은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그러므로 모든 선은 큰 것이든 아주 작은 것이든 하나님께로부터가 아니면 존재하지 못한다.”(249)

3부는 처음의 질문인 의지의 문제로 넘어갑니다. 에보디우스는 다시 자유의지를 ()’들 가운데 놓은 것이 합당한지 질문합니다. 만약 자유의지가 하나님께서 주신 선이라면 의지 또한 선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앞선 여러 논증을 통해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증명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소유한 자유의지는 당연히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자유의지는 절대 선이 아닌 상대적 선입니다. 상대적 선은 인간이 자의로 선이 될 수도 있고 악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거스틴은 여기서 선하게 사용하지 않을 수도 있는 사물들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행위 자체가 곧 덕의 발휘이기 때문’(259)이라고 부연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에는 위대한 선 뿐 아니라, 중간선과 미미한 선도 존재하게 하셨습니다. 중간선에 해당되는 자유의지는 욕망에 이끌려 공통되고 불변하는 선에 등을 돌려 배향(背向) 하고 자기 고유한 선이나 외적인 선이나 열등한 선에로 전향(轉向) 하는 경우에 악을 범’(263)합니다. 이것으로 2권을 마무리합니다. 결론지으면 하나님은 존재하고, 모든 선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왔고, 의지의 자유 또한 하나님께 받은 선이나 언제든지 악을 전향(轉向) 할 수 있기에 불완전한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 3권으로 넘어가 자유의지의 문제를 마무리합니다.

3: 자유의지는 인간의 선으로서 하느님께로부터 유래했다

서론 자연적 운동과 수의적 운동

1부 하느님의 예지와 자유의지

2부 자유의지는 중간선이다

3부 선악은 자유의지에 달려 있다

4부 몇 가지 난제

맺는말

3권은 논리적 구성에 있어서 중요해 보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2권에서 자유의지가 선이며, 욕망에 의해 악으로 치우칠 수 있다는 의지의 불완전함을 이야기했기 때문입니다. 3권 역시 2권을 반복하는 듯하지만, 제목과 다르게 실제 내용은 하나님의 예지의 문제를 다룹니다. 즉 하나님께서 사람의 범죄 사실을 알았다면 왜 사람을 창조하시고, 자유의지를 주셨는가?에 대한 답을 줍니다. 논리를 따라가 봅시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신다.(예지) 그렇다면 인간의 범죄도 알고 계신다. 알고 계심에도 역사가 흐르도록 방관하신다면 모든 책임은 하나님께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질문이기도 합니다. 어거스틴은 어떻게 답을 할까요?

에보디우스는 질문합니다.

인간이 범죄 하리라는 것을 예지하신 이상 하나님이 예지하시는 바가 이루어짐은 필연적이라는 것입니다. 그토록 불가피한 필연성이 등장하는 때에 무슨 수로 자유로운 의지가 존재한다는 말입니까?”(277)

먼저 하나님의 예지는 필연이 아니다고 합니다.(281) 즉 하나님께서 아시는 것과 정하신 것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미리 아시지만 의지는 사람에게 있습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에게 너는 오늘 숙제를 하지 않고 자전거를 타러 나갈 것이다.라고 말할 때, 그 말을 들은 아들은 엄마가 말했기 때문에 내가 숙제를 하지 않고 자전거를 타러 가는 것은 필연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예지는 필연이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도 아무도 죄짓도록 강제하지 않으신 채로 인간들이 자기 의지로 범죄 하리라는 것을 예지하시는 것’(291)입니다.

여기서 다시 자유의지가 선이기는 하지만 중간선이라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즉 언제든지 자신에 의해 악을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차라리 존재하지 않았다면이란 가정으로 빠져 들어갑니다. 어거스틴은 그대가 행복하다면 그대는 응당 존재하지 않은 것보다는 존재하기를 더 원할 것’(313)이라고 응수합니다. 존재하기를 원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고, 존재하기 싫은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선이기 때문입니다. 중간선의 문제는 다시 자연 본성으로 이어갑니다. 모든 존재에 있는 본성은 결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부패하게 됩니다. 사실 이 부분은 현대 신학자들이 수용하기 힘든 부분입니다. 왜냐하면 의지가 없는 사물이 부패한다는 말은 논리적으로나 신학적 타당성이 모호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자연이 가진 결함은 소멸에 대한 것으로 보입니다. 어거스틴은 3부를 시작하면서 결함 있는 자연과 하나님을 비교합니다. 소멸이 결함으로 보이지만, 소멸은 다른 것으로 대체됨으로 영원한 존재이신 하나님은 영과 받게 됩니다. 중세의 안셀름이 부정신학을 통해 하나님을 증명하듯 어거스틴은 부정과 비교를 통해 하나님의 완전성과 영원하심을 찬양합니다. 이것은 다시 모든 존재는 결함을 가지고 있으며, 소멸해 가므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빚을 져야 합니다. 바로 이 점에서 어거스틴은 만물이 하나님께 은혜를 입고 있다’(365)고 선언할 뿐 아니라, ‘빚을 진 그분에게는 오로지 찬양을 돌려야 한다.’(367)고 말합니다. 이 책의 결론이자 3권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죄의 원인은 자유의지에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의지가 죄짓는 첫째 원인이거나, 아무 죄도 아닌 그것이 죄짓는 첫째 원인이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373)

자유의지를 가진 사람이 정욕에 굴복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는 자유의지를 주신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유의지를 가진 사람에게 있습니다. 문제는 한 번 자유의지가 정욕에 예속 당하면 마치 노예처럼 선을 행할 능력을 상실해 버린다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이것을 무지와 곤란’(377)을 통해 죄의 결과를 보이게 된다고 말합니다. 결국 육정적인 행동을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것은 원래 창조된 인간의 본성이 아니고 죄벌에 단죄당한 인간의 본성’(379)이 됩니다. 바울은 이것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1:24)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죄는 하나님께 징벌 받음이 마땅합니다. 죄는 자유의지를 주신 하나님이 아닌 자유의지를 악용하고 사단에게 자신의 의지를 내어준 사람에게 있는 것입니다.

5. 나가면서

후대의 사람들은 어거스틴의 <자유의지론>에서 악의 기원보다 하나님의 은총론에 집중합니다. 자유의지는 악의 문제보다 구원에 문제에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의지론의 핵심은 악은 하나님이 아닌 사람에게 있음을 밝히는데 주력합니다. 만약 사람에게 자유의지, 즉 스스로 무엇인가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그가 이미 신의 위치에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자유의지를 통해 사랑에 종속되고, 사랑에 헌신하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이 땅에 육신을 입으심으로 스스로 사랑에 종속된 운명을 살았습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욕망에 굴복하는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어거스틴은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을 통해 영혼은 그분의 눈에 보이는 겸손을 본받을 것이고, 그렇게 하다 보면 눈에 보이지 않는 지고한 경지로 되돌아가기에 이를 것’(335)이라고 충고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어떻게 사용해야 할 것인가를 보이셨고, 그렇게 살아가셨습니다. 그의 뒤를 따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모든 영광을 영원하신 하나님과 우리를 구속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돌립니다.

Soli Deo Glo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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