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별설교] 갈라디아서4장 하갈과 사라, 시내산과 예루살렘
[장별설교] 갈라디아서4장 하갈과 사라, 시내산과 예루살렘
바울은 3장에서 율법이 결코 복음을 앞설 수 없음을 아브라함과 모세의 시내산 율법을 통해 증명해 보였습니다. 3장의 결론은 율법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거룩을 드러내는 지침이지 결코 의롭게하는 수단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시내산 율법 이전에 이방인이었던 아브라함이 믿음을 통해 의에 이른 것처럼, 이 시대의 이방인들도 믿음으로 아브라함처럼 언약의 백성이 된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4장에서 몇 가지의 주제로 계속하여 논증합니다.
1. 1-7절 종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2. 8-11절 율법으로 돌아가려는 어리석은 갈라디아인
3. 12-20절 거짓 교사들의 열심
4. 21-31절 하갈과 사라의 비교
1. 1-7절 종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4:1-7은 구약으로 표현되는 옛 언약의 시대를 ‘종’으로 비유하고, 신약으로 표현되는 새 언약의 시대를 ‘아들’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마치 3장을 간략하게 요약하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킵니다. 어제 상세하게 설명하지 못했던 율법의 기능 중에서 3:24에서 표현하는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있습니다. 바울은 4:1에서는 초등교사를 ‘종’으로 표현하고, 4:2에서는 ‘후견인과 청지기’로 비유합니다. 고대 세계에서 부유한 로마인들은 전쟁을 통해 포로가 된 종들 중에서 명석한 두뇌와 높은 학력을 소유한 이들을 차출(差出)해 청지기와 후견인으로 삼았다. 물론 그들의 신분은 종입니다. 그들에게 자신의 자녀를 맡겨 교육했습니다. 기초적인 학문과 예의범절 등을 가르쳤습니다. 아이가 성년이 되었을 때 후견인들의 간섭과 통제 아래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새 언약이 이르기 전, 율법을 따라 살았던 구약의 시대를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는 것으로 비유했습니다. 1절에서 ‘어렸을 동안’이라고 표현하고, 4절에서는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 노릇’하였다고 말합니다. ‘종 노릇’한다는 말은 율법의 권세의 통제 아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굴욕적인 상태에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때가 차매(τὸ πλήρωμα τοῦ χρόνου)’ 하나님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율법 아래에서 벗어나 ‘아들의 명분’(5절)을 얻게 하셨습니다. 또한 그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6절)로 부르게 됩니다. 바울은 우리 가운데 ‘아들의 영’을 보내셨다고 말합니다. 아들의 영은 곧, 예수의 영이여, 예수의 영은 곧 성령 하나님을 말합니다. 그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종이 아니라 아들입니다. 아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있게 됩니다.(7절) 갈라디아서 4:4-7은 로마서 8:1-17을 요약하고 있는 듯합니다.
갈라디아서 4장 |
로마서 8장 |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4절) |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 육신에 죄를 정하사(3절) |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4절 하) |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3절) |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6절) |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15절) |
2. 8-11절 율법으로 돌아가려는 어리석은 갈라디아인
바울이 1-7절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는 이미 아들이 되었고, 다시 어린 아이가 될 수도, 될 필요도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왜 다시 종의 상태로 돌아가려고 하느냐? 8-11절에서 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갈라디아인들에게 ‘그때에는’, 즉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에는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 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아닌 자들은 3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세상의 초등학문, 또는 세상의 어둠의 영들을 말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세상의 초등학문의 이면에는 어둠이 영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의 대학자인 더글라스 무는 ‘하나님이 아닌 자들’을 ‘거짓 신들’이라고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0으로 돌아가 볼까요? 바울은 고린도전서 10:19-20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0:19-20] 19 그런즉 내가 무엇을 말하느냐 우상의 제물은 무엇이며 우상은 무엇이냐 20 무릇 이방인이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다시 세상의 초등학문으로 돌아가려는 갈라디아인들에게 깊은 우려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제 아들이 되었는데 왜 다시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 다시 종노릇하려는가 따집니다.(9절)
3. 12-20절 거짓 교사들의 열심
12-20절에서 바울은 교회를 걱정하는 바울의 심정이 담겨 있습니다. 초기에 갈라디아교회는 바울을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14절)했습니다. 15절에 의하면 눈이라도 빼어 바울에게 주려고 했습니다. 이 표현이 속담을 가져온 것인지 실제의 눈을 말하는 것인지 모호합니다. 분명한 것은 초기에 갈라디아교회의 성도들은 바울을 그만큼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짓 교사들이 교회에 들어와 그들에게 전통과 권위라는 이름으로 교인들을 충동질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열심은 교인들을 바울에게서 떼내어 자신들에게로 향하게 하려는 이간질이었습니다.(17절)
바울은 다시 시작합니다. 19절을 보십시오. 초반에 ‘갈라디아인들아!’라 불렀는데 이제는 ‘나의 자녀들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얼마나 기가 막힐 일입니까? 바울은 이 표현을 통해 자신이 수고와 애씀으로 갈라디아교회를 이루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제 다시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리’라고 말합니다. 마치 이단에 속아 집을 나간 자녀를 보는 부모의 심정이 아닐까요. 아버지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허랑방탕한 삶을 살았던 누가복음 15장의 탕자를 보는 것 같지 않습니까? 저는 이것이 목회자의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4. 21-31절 하갈과 사라의 비교
바울은 다시 율법과 복음의 차이를 설명합니다. 하갈과 사라, 시내산과 예루살렘이란 단어로 설명합니다. 하갈은 종이고, 사라는 아브라함의 아내 즉 자유자였습니다. 하갈에서 난 아들은 종이고, 사라에게서 난 아들은 주인인 아버지의 기업을 물려받을 아들입니다. 23절에서 바울은 의미심장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한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는 약속으로 말미암았습니다. 이것은 이스마엘과 이삭의 차이를 말합니다.
바울은 이것을 다시 시내산과 예루살렘으로 비유합니다. 시내산은 모세가 율법을 받으러 올라간 산으로 옛 언약 즉 율법을 말합니다. 시내산은 지금의 땅에 있는 예루살렘을 말합니다.(25절) 그런데 땅에 있는 예루살렘이 아닌 ‘위에 있는 예루살렘’(26절)은 복음, 즉 새 언약을 말합니다. 땅에 있는 예루살렘은 아브라함의 육신적 후손인 유대인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아직도 율법의 행위를 의지해 살아갑니다. 하지만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에 있는 자들은 자유 하는 자들이며,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28절)이며, ‘성령을 따라 난 자’(29절)입니다. 율법은 절대 생명을 낳지 못합니다. 율법은 정죄하고 저주합니다. 그러나 성령은 생명을 낳고,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로 세웁니다. 요한계시록 21장으로가면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예루살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계시록의 정황상 역사의 종말을 말하고 있는 하지만 서술되는 내용은 새언약을 통해 이루어질 새로운 시대를 말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요한계시록 21:1-4]
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새 언약이 시대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며, 예수님을 통해 우리의 아픔을 치유하시고,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는 예수님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의 비유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육신 이스라엘은 어떻습니까? 이스마엘이 이삭을 박해하듯, 육신의 이스라엘은 영적 이스라엘을 핍박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분명히 말합니다. 종의 아들이 기업을 물려받을 수 없듯, 율법에 종노릇하는 이들은 결코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받을 수 없습니다. 오직 자유한 여자의 아들만이 유업을 얻게 됩니다.(30절) 우리가 누구입니까? 종입니까? 아니면 아들입니까? 만약 우리가 약속의 자녀이고,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라면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받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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