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 인물] 이성봉 목사(1900 - 1965)
[한국교회사 인물] 이성봉 목사(1900 - 1965)
한국교회사에 있어서 이성봉 목사는 빠뜨릴 수 없는 분이시다. 장로교회 일색인 한국교회 안에서 이성봉 목사는 성결교단이면서도 수많은 성도들에게 사랑받은 분이시다. 이성봉 목사는 부흥사와 천로역정 강해자로 유명하다. 그의 의 천로역정 강해 파일이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들려지고 있다는 것만 봐도 그에 대한 갈망이 얼마나 깊은지를 잘 보여준다.
수년 전에 우연히 글로만 읽던 이성봉 목사님의 천로역정 강해를 음원으로 듣게 되었다. 간단 명료하지만 박진감 넘치는 해설은 영적 감동을 선물해 주었다. 아직 더 많은 책은 읽지 못했지만 철저한 경건과 종말론적 소망을 놓치지 않았던 이성봉 목사님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아래는 이성봉 목사의 천로역정 강화 서론과 설교 <십자가의 도>이다.
이성봉 목사의 천로역정 강화 서론
17세기 영국 베드포드(Bedford)에 한 야금사(冶金師)가 있었으니 무식한 불량자 존 번연(John Bunyuan)이었다. 하루는 은은하게 어떤 소리가 귀에 들렸다. "네가 회개하고 구원 얻는 것이 좋으냐? 죄를 그냥 짓고 지옥에 빠지는 것이 좋으냐?"하는 그 소리를 듣고 회개하였다.
후에 순박하고 영민한 그 심령은 인생의 신성과 존귀를 깨닫는 것에 힘을 다하여 심중의 마력(魔力)을 멸하고자 한즉 회개의 눈물은 그치지 않고 애걸의 호소는 듣는 자로 하여금 저로 불쌍히 여길 만큼 되었다. 위로 하늘을 쳐다본즉 태양은 그 광선을 저 같은 죄인에게 발휘하는 것이 참으로 가석(可惜)하며 굽어 땅을 바라본즉 산천초목(山川草木), 금수어별(禽獸魚鼈)은 그의 의식(衣食)을 제공함이 참말로 황송하게 생각되었다. 그리하여 야심없는 금수를 부러워하였다. 이는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순례자의 고통이었다.
그러나 미구에 십자가 밑에 나아가서 등에 있는 무거운 짐이 떨어짐을 느꼈다. 그 눈에는 감사의 눈물이 흐르고 그 가슴에는 하늘의 평강이 충만하였다. 그는 후일 이 경험을 "아! 그리스도, 아! 그리스도, 나의 눈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제하고는 나는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하였다.
나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피, 그의 매장, 그의 부활, 귀중한 사실을 이것저것 하나하나 나의 마음에 다 실험시켰다. 나의 몸에 받은 은혜는 마치 부귀한 사람이 많은 금전을 은행에 저축하고 그 주머니에는 용돈만 조금 가지고 가는 것 같은 것이다. 아! 나의 전재산은 예수께 저축하였다.
주께서 내가 하나님과 합체되는 깊은 뜻을 나에게 알게 하자, 나는 그에게 속하여 그의 육체의 육이 되었나니 만일 그와 나와 일체 되면 그의 의, 그의 공, 그의 승리는 다 나의 것이다. 할렐루야!
"나는 나의 그리스도 안에서 천국에 있는 자요, 나의 육체로서 땅에 있는 자이다. 나는 그를 의지하여 의로워지고 그의 죽음과 부활 승리를 항상 찬미하노라"고 외쳤다.
이러한 구원의 경험이 철두철미한 존 번연이 불타는 가슴으로 복음을 전하다가 정부의 박해를 받아 12년간 옥중 생활을 하면서 얻은 단순한 복음의 진수가 천로역정이다.
본서의 내용은 장망성(將亡城)에 살던 기독도(基督徒)가 천성(天城)을 향해 가는 길에 갈래 길이 많으므로 때에 따라 쓰러지고 때로는 곁길로 어려운 산, 험한 골짜기를 지날 때에 여러 가지 희노애락을 돌파하고 마지막 사하(死河)를 건너 천성에 들어가는 인생의 일로요 신앙의 노선이다. 본서에는 인명(人名)과 지명(地名)이 많이 나오는데 이는 신구약의 진리요, 우리 신앙 생활에서 적절한 비유로 되어 있다. 그러나 천로역정은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되어 있기 때문에(수백개 국어로 번역되었다) 각자 보는 책에 따라 혹 다른 점도 있을 것이고, 또한 원문에서도 가감하여 대지 요령만 들어서 내 은혜 되는대로 자유로 강설한 것이니, 독자들도 취사 선택하여 더 많은 새로운 진리가 발견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그리고 참고서로는 일문역과 게일(J. S. Gale)박사 역과 오천영(吳天泳) 목사의 전역 초역을 주로 하였으며, 인생일로(人生一路)란 책자에서 얻음도 많았다. 본 강화 중에 종종 노래가 나오는데 곡조는 대개 합동 찬송가 456장(통일 찬송가 278장)의 곡으로 부르면 좋을 것이다.
장망성을 떠난 객이 천성을 향해 가는 길에
갈래 길이 많으므로 그릇 들기 쉬웁도다
그러하나 우리 구주 천성 가는 길이 되고
성신 우리 인도하니 안심하고 따라가세.
설교 십자가의 도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다(갈 2:20)
강원도 도시사로 있던 우성준씨가 말하기를 "내가 예수를 믿어 보니까 도(道)는 꼭 밤송이와 같다"고 하였다. 그것이 무슨 말이냐 하면 밤송이는 껍데기에 무서운 가시가 있지만 속에는 밤알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먹을 것은 아니다. 두꺼운 껍질을 벗기고 또 그 속의 내피를 벗기면 누르스럼한 달고도 고소한 먹을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좀 믿어 보겠다고 피상적으로 와서 거닐다가는 좀 어려운 일을 만나면 즉시로 내버리고 마는 것이다.
십자가에는 여러 가지 진리가 있으나 세 방면의 진리가 있는 것이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나타나 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중에 사는 것은 그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니 그는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몸을 버리셨느니라.
첫째는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몸을 버린 십자가 곧 대속의 십자가요, 둘째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혀 죽은 체험의 십자가요, 셋째는 내가 지고 사는 십자가이다.
1. 나를 위하여 몸을 버린 십자가이다
그는 내가 원수 되었을 때에 죽으시고, 내가 죄인 되었을 때에 죽으시고, 내가 약할 때에 대신 죽으신 십자가이다.
남을 죽이고라도 자기만 살려고 하는 세상에서, 남을 못살게 하고라도 자기만 잘 살려고 하는 세상에서 주님은 탄생 이후 최후까지 십자가를 지시고 녹아지고 사라져 마지막에 피 한방울 남기지 않고 다 쏟아 주셨다. 순백의 주님이 순흙이 되사 귀중한 옥체의 머리에는 가시관을 쓰시고 양손과 양발에 쇠못이 박히고 옆구리에 창을 받으시고 만인 도중에 벌거벗고 십자가에 달려 일곱 마디의 말씀을 남겨 놓으시고 운명하심이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 수치를 가리려고 무화과 잎으로 치마를 둘렀으나, 아침에 해 입으면 저녁에 부스러진다. 그래도 그것을 두르고 안심하는 것은, 오늘날 모든 범죄한 인간들이 그 부끄럼을 가려 보려고 인위적 종교와 수양 도덕으로 꾸미는 것과 같다. 그것은 무화과 잎의 종교이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것이다. 그 후에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그것을 벗기시고 짐승의 가죽으로 친히 지어 입히시니 만년무파라. 그것은 신본신앙의 애상인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피흘린 대속의 종교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의 장자를 전멸시키는 심판을 할 때에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라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넘어갔다. 이와 같이 어린 양 예수의 십자가피를 마음 문설주에 바른 심령은 하나님의 심판이 상관없는 것이다.
구약 율법에 사람이 범죄하면 어린 양을 가지고 가서 손을 얹고 자복하고 제사장은 그 위에 손을 얹고 축복한 후에 준비한 칼로 그 목을 찌러 피를 받아 지성소로 가지고 들어가고, 그 양은 가죽을 벗기고 각을 떠서 번제를 드려 속죄한 것도 십자가의 영원한 속죄의 모형이다.
그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몸 버린 십자가의 피가 우리 심령에 속죄의 평안을 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항상 깨끗하게 하시는 것이다.
어떤 술주정뱅이가 만취하여 기차레일을 베고 잠을 자고 있었다. 급행열차는 고동을 틀면서 달려오건만 그 술꾼은 정신없이 코를 드르렁드르렁 골고 있다.
그때에 한 자비로운 사람이 그것을 보고 견딜 수 없어 "여보시오, 저기 기차가 옵니다. 속히 일어나시오" 하고 고함을 치나 그 자는 "기차는 무슨 기차, 우리 집 아랫목이야"하면서 돌아눕는다. 그 자비로운 사람은 보고 견딜 수 없어 달려들어가 술주정뱅이 다리를 끌어 철둑 아래로 내동댕이쳤다.
술주정뱅이는 떽데굴떽데굴 굴러갔으나 무정한 기차는 미처 정거를 못하고 건지던 그 사람을 끌고 들어갔다. 목이 잘라지고 다리가 끊어지고 팔이 잘라지고 창자가 나와 즉사하였다. 기차는 그제서야 정거를 하고 기관수와 차장이 달려와서 머리 갈라진 것, 팔, 다리 끊어진 것을 모아 놓고 걱정들을 한다.
술주정뱅이는 한참 굴러가는 바람에 정신이 들었다. 그러나 하늘이 돈짝만하다.
" 아하, 기차가 정거를 하였구나. 웬 사람이 저렇게 많이 둘러싸고 있노. 누가 또 기차에 치인 것이로구만. 아이구, 조심을 하지, 어떻게 하노, 어디 가서 구경을 좀 해야지" 하면서 비틀비틀 올라가 "그거 무엇들 그러시우" 하고 뚫고 들어가니 거기에는 참혹한 시체가 있었다.
"아이구, 끔찍해라. 저 사람 왜 저렇게 되었소" 하고 물으니 옆 사람이 눈에서 불이 번쩍 나게 따귀를 후려갈겼다. "이 자식아! 이 사람은 너 때문에 이렇게 되었어"하니 그 사람이 달려들면서 왜 생사람을 때리느냐구 덤볐다.
"그래두 정신을 못차려. 네가 여기서 술을 먹고 기차 레일을 베고 잠자고 있는 것을 아무리 소리 질러 깨워도 안 깨니까 이 사람이 너를 건지러 들어갔다가 너는 건지고 달려오는 기차를 피하지 못하여 대신 끌려 들어가 이렇게 참살을 당했단 말이야." 그 사람은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아침에 나무 한 짐 지고 가서 1원 70전 어치 술을 먹고 30전에 쌀 한 됫박을 사서 지게에 걸고 흙탕같이 취하여 거기서 잠자던 것인데, 이 사람이 살려준 것을 깨달았다. 이제 이 사람이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인가? 기차 레일을 베고 잠자는 사람은 누구이겠는가? 이 글을 쓰는 사람부터 온 세상 사람들인 것이다.
이 이야기는 멸망의 기적은 고동을 들면서 오는데 죄악의 술을 마시고 취생몽사(醉生夢死)로 허영의 꿈만 꾸는 것을 살리기 위하여 하나님의 성자가 33년간 외치시다 못하여 죽을 대신, 멸망 받을 대신에 죽으신 십자가의 대속을 말하는 것이다.
성자 예수 그 머리에 가시관 쓰고
십자가에 못박혀서 돌아가셨네
이와 같이 넓고 크신 사랑에
아직 감복 않는 자야 사람이랄까.
2. 체험의 십자가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 십자가는 십자가대로 나는 나대로 있으면 십자가가 상관이 없는 것이다. 이 십자가에 예수께서 벌거벗은 나체로 매달린 것처럼 인간의 외식의 껍데기, 체면의 껍데기 다 벗어버리고 나의 정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도록 나의 수치를 못박아야 한다.
그 머리에 가시관을 쓰신 것같이 나의 머리, 나의 사상, 나의 계획, 나의 조직 모두에 가시관을 씌우고, 주님 손에 못을 박은 것처럼 나의 더러운 손, 음란한 손, 도적질하는 손에 못을 박고 나의 수단 방법에 다 못박으라.
그 발에 못을 박은 것처럼 과거의 불의한 걸음의 자취, 마귀를 따르고 세상을 따랐던 옳지 못한, 구별되지 못한 걸음을 못박고 내 완력의 환도뼈가 부러져야 하는 것이다. 주님의 가슴에 창을 박아 물과 피를 쏟은 것처럼 내 불의한 마음과 불결한 심정을 찔러 회개하고 정과 욕심까지 못박는 경험을 가질 것이다.
철두철미한 회개를 하는 때에 세상이 나를 향하여 못박고 내가 세상을 향하여 못박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성은 종종 나를 괴롭히지만 시간시간 나를 쳐서 복종시킴은 내가 복음을 전한 후에 버림을 받을까 두려워하는 것이다.
어떤 청년 전도사가 하룻밤 같이 자는데 밤중에 내 이부자리를 잡아 뜯는다. 나는 놀라서 왜 그러느냐 하니 "목사님, 베드로는 닭이 울 때 회개하였지요? 나도 회개하겠어요"라고 한다. "아니, 전도사가 아직 회개를 못 하였는가?" 하니 "변변치 못한 죄는 회개했으나 큰 죄는 차마 부끄러워 여지껏 숨겨 두었어요"한다.
그래서 자다가 일어나 기도하는데 그 형제는 차마 말 못할 자기의 정체성을 그대로 벗겨 십자가에 매어 단다. 주께서 그를 생명의 성신으로 다시 살리시고 충만케 하사 지금 능력 있는 목사로 귀하게 쓰임을 받는다.
철저하게 주와 같이 죽는 경험 없이는 부활의 주님을 체험하지 못하는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를 포기하고, 자기를 말살시키라. 사정없이 못박아 버리라.
3. 십자가를 지고 사는 생활이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이기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 주와 같이 죽는 사람은 하루하루 사는 생활이 십자가를 지고 사는 것이다. 십자가를 지란다고 어떤 사람은 나뭇가지로 십자가를 만들어서 지고 다닌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자기 몸에 십자가를 그려 붙이고 다니고 천주교인들은 십자가에 항상 키스한다.
그렇게 한다고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십자가 정신으로 산다는 것이다. 십자가에는 무슨 정신이 들어 있는가?
1. 용감한 십자가이다
죽어도 같이 죽고 옥에도 같이 가겠다고 하던 제자들이 다 주님을 버리고 달아날 때도 주님은 용감히 끌리어 태연자약(泰然自若)하게 십자가에 못박혀서 운명하셨다. 사람마다 필부의 용맹은 있으나 참된 의의 용맹은 십자가를 지는 자 외에는 없는 것이다.
왜정시대에 북만주에서 토벌대들이 삼십여 명이 모이는 교회를 둘러싸고 예수님의 사진을 문 안에 세우고 한 사람 한 사람 내보내면서 그 사진에 침을 뱉으라는 것이다. 장로도 나가면서 퉤하고 침을 뱉고 집사도, 권찰도, 늙은이도 다 침을 뱉는다.
마지막에 어떤 청년이 나아가 침을 줄줄 흐르는 예수의 사진을 손수건으로 닦고 용감하게 나를 죽이라고 가슴을 내민다.
"물론 이 사진이 참 사진은 아니오. 그러나 당신들이 나의 신앙을 시험하는 데는 나는 못 하겠소. 침 뱉고 몇 날 더 살면 뭘 하겠소. 죽여주시오"하니 토별대장은 네가 참 예수쟁이로구나 하고 따로 세운 후에 침 뱉고 살겠다고 하던 사람들을 다 잡아 조사해 보니 별일이 없음으로 석방시키면서 "에익, 못된 놈들, 예수를 믿으려면 똑바로 믿으라. 누가 예수 믿으면서 예수 사진에 침을 뱉는다던? 나는 예수를 안 믿어도 그런 짓은 안 하겠다"하며 조롱을 하며 조롱을 하여 망신을 톡톡히 당했다는 것이다.
너는 극히 강하고 담대하라, 용감한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하신다.
2. 인내의 십자가이다
조롱을 받아도 참고, 가시관을 씌워도 참고, 양손과 양발에 못을 박아도 참고, 늙은 어머이가 십자가를 붙들고 우는 것을 보고도 참았다. 십자가는 참는 도이다. 그 정신을 본받아서 모든 일에 인내로써 시종을 일관함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끝까지 참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거야 어떻게 참겠느냐고 하겠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것까지 참으라고 하신다. 참을 수 없는 것을 참아야 참된 인내지 참을 수 있는 것이야 누근들 못 참겠는가?
인내는 신앙의 보호자요, 인내는 화평의 유지자이며, 인내는 사랑의 육성자이고, 인내는 겸손의 선생이라고 어떤 성도는 말하였다.
3. 공의로운 십자가이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나는 예수 안 믿어도 괜찮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기 때문에 우리가 죄를 지어 지옥에 잠깐 들어가게 할지는 모르나 거기서 영원히 고생하는 것을 우너하지 않을 것이다. 즉 아무리 못된 자식이라도 부모가 징계를 하면서 불쌍히 여김같이 지옥에 갔다가도 곧 나오게 될 것이라"고 한다. 그것은 마귀의 소리다.
하나님의 사랑은 공의를 겸전(兼全)한 사랑임을 모르는 말이다. 어떤 임금이 법률을 선포하였다. 누구든지 간음죄를 지으면 두 눈을 뽑는다고 하였다. 제일착으로 임금님의 황태자가 그 죄를 지었다. 그래서 임금님은 황태자의 눈을 뽑기로 결정하고 눈을 뽑으려 하니 대신들과 백성들이 "독자의 눈을 뽑으면 왕위를 계승할 수 없을 것이라"고 굳이 만류하였다. 그러나 왕은 듣지 않고 그러면 법이 없어지는 것이야 하고는 눈 한 개를 사정없이 뽑았다.
그러나 또 하나를 뽑으면 정말 장님이 되겠고 안 뽑으면 법이 완성되지 못하니 왕은 생각하다 못하여 그만 자기의 오른 눈을 뽑았다.
그리하여 누구든지 간음죄를 지으면 두 눈을 뽑는다는 법을 준수한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계명을 모든 인생들은 다 범하여 멸망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생을 다 멸망시키자니 하나님의 사랑이 허락치 않고 또 무조건 용서하자니 하나님의 공의로운 법이 파괴될 것이므로 마침내 자기의 오른 눈보다 더 귀한 독생자를 희생시키어 공의를 나타내셨다.
그러므로 공의로운 십자가를 깨닫게 될 때에 죄를 미워하고 또한 하나님의 법을 중히 여기는 생활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4. 사랑의 십자가이다
세상 사람들은 사랑을 많이 말한다. 사랑하는 아내, 사랑하는 남편, 사랑하는 친구, 사랑하는 선생님, 사랑하는 목사님, 사랑하는 장로님, 집사님 하며 사랑 사랑 하나 참된 사랑이 있는가? 세상의 사랑은 그림자와 같아서 밝은 때는 잘 따라오지만 어두우면 달아나는 것이다.
자기에게 좋게 하면 사랑 사랑 하지만 조금이라도 수틀리면 냉정하게 박차 버리는 것이 세상의 사랑이다.
모스크바에 흉년이 들어 어떤 아기 어머니가 며칠을 굶고 풀뿌리라도 캐어 먹으려고 들에 나왔는데 등에 업힌 어린애가 젖을 먹겠다고 조른다. 그러나 삼일간이나 굶은 어머니 가슴에서 젖이 나올 리가 없다.
그만 그 어머니는 주머니에서 장도를 꺼내어 젖꼭지를 찢어 피를 내어 어린아이에게 물리니 어린 것은 피를 빨고 있고 어머니는 기절하였다고 한다. 모성애의 참 사랑이다.
우리 주님은 목마르고 굶주린 우리들을 위해 희생의 피를 흘려 주셨으니 우리도 그 십자가를 지는 것은 주님을 위하여, 남을 위하여 희생의 생활을 하는 것이다.
5. 평화의 십자가이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또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평화함을 시켜 화목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라고 하였다. 악마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항상 참소하여 이간을 붙이고 또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이간을 붙여 불평, 불만, 원망, 시비, 분쟁이 가득한 세상이 되게 하였다.
이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원수된 인간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하나님께로 인도하고, 중보의 기도로 하나님의 사랑을 인간에게 미치게 할 것이며, 내가 십자가를 지고 화목케 하는 직책에 충성하여야 할 것이다.
어떤 부부가 결혼한 날부터 밤낮 싸움을 하다가 마침내 합의 이혼을 하게 되었다. 재판소에 가서 수속을 하는데 재판장이 그래 참말로 백년 가약 맺은 것을 일조일석에 파괴할 것이냐고 다짐한다.
두 남녀는 굳은 결심을 보이며 이렇게 이상이 맞지 않는 부부는 항상 분쟁하면서 같이 사는 것보다 차라리 헤어져서 각각 이상이 맞는 사람을 만나서 같이 지내는 것이 좋겠다고 단언한다.
재판장(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 있는 6, 7세 되는 아이를 가리키며) "그럼, 저 어린 딸은 어찌할 것이냐"고 하니, 아버지는 "물론 내종자이니 내가 데려가야지요"하고, 여자는 "흥! 그것을 내가 낳아서 기르느라고 얼마나 고생한 것인데 그러냐구, 내가 길러야지요"하고 또 싸운다.
재판장은 "그럴 것 없이 어린 것이 이제는 철이 들었으니 아버지를 따라간다면 아버지에게 주고 어머니를 따라 간다면 어머니에게 줄 것이다"라고 하였다. 방청석에서는 그것 참 명재판이라고 찬성한다.
그래서 재판장이 어린 아이에게 "화목네야, 너희 아버지와 어머니는 같이 살지 못하고 아버지는 저 먼 곳으로 가구 어머니도 다른 데로 멀리 헤어져 살게 되었다. 너는 누구 따라가서 살겠니?"하고 물으니 어린 딸은 눈을 깜박깜박하더니 "아버지두 내아버지구"하며 아버지 손을 꼭 쥐고 또 다른 손으로 어머니 손을 꼭 붙잡으면서 "어머니두 내 어머니야. 난 아무도 못 놓겠어요"하며 하염없이 우는 것이다.
그 처량한 울음에 온 방청석에서도 다 울고 재판장까지도 눈물을 흘린다. 성이 독같이 난 사나이도 눈에 눈물이 흐르며 "여보, 저 계집애 때문에 이혼하면 안되겠구만. 다시 가서 살면 어떻겠소"하니 여자도 독사같은 마음이 풀어지면서 "그럼, 도로 가서 삽시다"하고 화목네를 한 손씩 붙들고 도로 와서 그럭저럭 잘 살았다는 것이다.
우리들도 분쟁과 파쟁으로 싸우는 교회와 사회에서 화목동이가 되려면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결말
대속의 십자가의 참된 사랑에 녹아져서 항상 감사 찬송으로 십자가를 자랑하고, 나의 과거 현재 미래의 자아 중심주의를 십자가에 못박아 매장하고 산 그리스도가 내 중심에 계시어 살든지 죽든지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한 생활을 보내며, 아버지와 인류를 위하여 주님께서 맡기신 십자가를 지고 날마다 날마다 그가 가신 자취를 따라 승리의 개선가를 부를 때까지 십자가를 사랑할 것이다.
현재 이성봉 목사의 홈페이지는 그의 생애와 설교들이 담겨 있다. [이성봉 목사 홈페이지] 이성봉 목사 홈페이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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