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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4:1–3 강해, 다툼은 어디서 오는가

샤마임 2025. 4.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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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욕의 뿌리에서 시작된 다툼의 열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갈등과 다툼이 발생할 때 그 원인을 종종 외부의 구조나 타인의 말과 행동에서 찾습니다. 하지만 야고보 사도는 본문에서 그것이 근본적 원인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싸움과 다툼은 외부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내면, 곧 마음속 깊이 자리한 정욕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야고보서 4장 1절부터 3절까지의 말씀은 매우 실제적이고 날카로운 영적 진단을 제시하며, 신자의 삶을 꿰뚫는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단순한 윤리적 경고를 넘어, 타락한 인간 본성이 어떻게 하나님과의 단절뿐 아니라 인간 관계마저 파괴하는지를 구속사적 관점에서 통찰하게 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우리 안에 깊이 뿌리내린 정욕을 직면하고, 주 앞에 회개하며, 다시 복음의 중심으로 돌아가는 은혜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1. 다툼의 뿌리는 정욕입니다 (4:1)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4:1)

야고보는 매우 강력한 수사 질문으로 본문을 시작합니다. 히브리적 문체에서는 반복된 질문이 독자의 양심을 깊이 자극하는 도구로 사용되는데, 여기서도 그러한 구조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싸움’(πόλεμοι)과 ‘다툼’(μάχαι)은 단순한 말다툼이나 의견 충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내에서 일어나는 치열한 갈등과 분열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이는 단지 인간관계의 문제가 아니라 영적 전쟁의 차원에서 발생하는 일이며, 성령의 공동체 안에 있어야 할 화평을 깨뜨리는 심각한 죄입니다.

 

야고보는 이 싸움과 다툼의 근원을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이라 밝힙니다. 여기서 ‘정욕’(ἡδονῶν, hēdonōn)은 육체적 쾌락과 자기 중심적 만족을 추구하는 본성을 뜻하며, 이는 성령의 열매와는 정반대에 있는 인간의 죄된 본성입니다. 누가복음 8장 14절에서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가 자라지 못한 것은 바로 세상의 염려와 재물, 쾌락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정욕은 말씀이 뿌리 내리지 못하게 막는 영적 가시덤불인 것입니다.

 

교부 크리소스토무스는 “정욕은 영혼을 흐리게 하여 하나님의 진리를 명확히 보지 못하게 한다”고 말했으며, 칼빈은 이 본문을 주해하면서 “정욕은 언제나 스스로를 중심에 두고 타인의 존재와 가치를 배제하는 성향을 가진다”고 하였습니다. 정욕은 이기심의 본질이며, 자신을 우상화하는 삶의 표현입니다.

 

구속사적 관점에서 보면, 이 정욕은 에덴동산에서부터 시작된 인간의 하나님 중심적 삶의 붕괴를 상징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통해 하나님을 떠나 자기중심의 삶을 선택했고, 그 결과는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뿐 아니라, 가인과 아벨처럼 형제 간의 분열과 살인으로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정욕은 단순한 인간의 욕망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 질서에 대한 근본적인 반역이며, 사탄이 인간 내면에 심어 놓은 거짓된 만족의 덫입니다.

 

2. 욕심은 만족을 주지 못하고 다툼을 불러옵니다 (4:2)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4:2)

야고보는 정욕이 어떻게 외적 갈등으로 확장되는지를 구체적으로 서술합니다. 인간은 욕심을 품고 그것을 성취하려 하지만, 결국 만족하지 못합니다. ‘욕심’(ἐπιθυμεῖτε, epithymeite)은 단순한 열망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강한 집착을 의미합니다. 이 욕심은 곧 우상숭배의 다른 이름이며, 하나님보다 어떤 대상을 더 사랑하고 집착하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이 욕심은 충족되지 않습니다. ‘얻지 못하여’라는 표현은 인간의 모든 욕망이 헛된 방향을 향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만족은 오지 않고, 오히려 살인과 시기로 발전하게 됩니다. 여기서 ‘살인’(φονεύετε)은 실제적인 생명을 해치는 것일 수도 있고,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마음속의 미움과 증오도 영적 살인에 해당합니다. 미움은 곧 하나님 형상을 지닌 자를 부정하는 것이며, 그 자체가 살인의 영적 형태입니다.

 

시기(ζηλοῦτε)는 타인의 복을 기뻐하지 못하고 비교와 열등감 속에 스스로를 학대하며, 결국 타인을 공격하는 감정으로 발전합니다. 그러나 이 시기심 역시 욕심과 마찬가지로 얻지 못하게 하고, 오히려 공동체 내에서 다툼과 경쟁을 유발합니다. 야고보는 이 모든 흐름이 정욕이라는 뿌리에서 나오는 독한 열매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인간의 욕망을 "채워도 채워도 더 목마른 심연"이라 말했으며, 루터는 "정욕은 인간의 마음을 하나님 없는 지옥으로 이끈다"고 경고했습니다. 결국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으로만 채워질 수 있으며, 다른 어떤 것으로도 그 공허함은 메워지지 않습니다. 하나님 없는 마음은 끊임없이 갈등과 불안, 분열을 생산해낼 수밖에 없습니다.

 

이 구절은 성도의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갈등의 배후에 자기중심적인 정욕과 탐심이 얼마나 깊게 자리 잡고 있는지를 드러냅니다. 표면상으로는 신학적 차이, 이해관계, 성격의 차이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 이면에는 하나님보다 자신을 더 높이려는 욕망이 도사리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 안의 분열은 외적 이유보다 내적 정욕의 문제일 때가 더 많습니다.

 

3. 응답받지 못하는 기도의 이유 (4:3)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4:3)

 

야고보는 정욕의 문제를 이제 기도의 영역으로 확장합니다. 신자는 하나님께 구하며 기도하지만, 그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이유는 단순히 하나님의 침묵 때문이 아닙니다. 본문의 핵심은 잘못 구했기 때문이라는 데 있습니다. 즉, 기도의 동기와 목적이 잘못되었기에 하나님의 응답이 막혔다는 뜻입니다.

 

‘정욕으로 쓰려고’(ἵνα ἐν ταῖς ἡδοναῖς ὑμῶν δαπανήσητε)는 구체적으로 자기 쾌락을 위해 하나님의 복을 요청하는 것을 말합니다. 기도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한 도구가 아닌,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 것입니다. 이것은 기도의 본질을 완전히 왜곡하는 행위이며, 하나님의 주권을 도구화하는 심각한 죄입니다.

 

칼빈은 이 구절을 주해하며 “인간은 본능적으로 하나님의 선하심마저 자신의 정욕을 위해 악용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고, 어거스틴은 “참된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게 하는 수단이지, 내 뜻을 강요하는 마술이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기도 중에도 정욕의 지배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침묵하심으로 오히려 우리를 회개의 자리로 이끄십니다.

 

응답되지 않는 기도는 성찰의 기회가 됩니다. 내가 무엇을 구하고 있었는가? 누구의 영광을 위해 구하고 있었는가? 진정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는 마음으로 기도했는가? 이 질문 앞에 겸손하게 서는 것, 그것이 회복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뜻에 합당한 기도를 기뻐하시고, 그러한 기도에 응답하시며,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우리를 사용하십니다.

 

결론: 정욕을 벗고 복음의 삶으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야고보는 우리 내면의 정욕이라는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단순한 갈등과 다툼, 미움과 오해, 기도 응답의 지연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 뿌리에는 하나님보다 자기를 더 사랑하는 마음, 즉 정욕이 깊이 박혀 있습니다. 이 정욕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왜곡하고, 이웃과의 관계를 파괴하며, 공동체를 분열시키고, 기도를 막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이 정욕을 십자가 앞에 내려놓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을 비우시고 우리를 위해 생명을 내어주신 것처럼, 우리도 자기중심적인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정욕의 자리에는 성령의 열매가, 다툼의 자리에는 화평이, 욕심의 자리에는 겸손과 자족이 자라야 합니다. 그리할 때 공동체는 살아나고, 기도는 다시 응답받고, 삶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로 회복됩니다.

 

오늘도 우리의 내면을 말씀 앞에 비추어 보고, 정욕과 탐심을 버리고, 다시 하나님만을 참된 기쁨과 만족으로 삼는 복음의 삶을 선택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 길이 곧 생명의 길이며, 참된 지혜의 출발입니다. 아멘.

야고보서 4장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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