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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2장 14-26절 행함, 하나님께 드려지는 흠 없는 산 제물

샤마임 2021. 9. 28.

야고보서 2장 14-26절 행함, 하나님께 드려지는 흠 없는 산 제물

 

2:14-26은 행함 없는 믿음에 대해 다룹니다. 믿음은 지적인 이해로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삶이 수반되지 않는 믿음은 거짓된 것입니다. 믿음은 삶을 통해 믿는 바를 드러내야 합니다. 14-17절에서는 굶주린 형제에게 말로만 배부르라고 하는 것은 ‘행함이 없는 믿음’(17절)이며, 그것은 죽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18-26절에서는 아브라함과 라합의 예를 통해 믿음은 결국 자신의 삶을 통해 증명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2장을 마무리하면서 26절에서 ‘영혼’을 ‘행함’과 비유하면서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 없는 믿음도 죽은 것으로 정의합니다. 믿음에 있어서 행함은 몸의 영혼과 같은 것입니다.

 

14-17 죽은 믿음

18-19 귀신의 믿음

20-25 아브라함과 라합 행함

26 결론: 행함 없는 믿음

 
2. 강해

14-17 죽은 믿음

14절은 의미심장한 질문을 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이 자기를 구원하겠느냐는 것입니다. 믿음과 행함을 분리할 수 없다고 야고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행함 없이 믿음만 가지고 그것이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언행일치의 사람은 성인이라 존경 받습니다. 그 사람은 진실한 사람이고, 참 사람입니다. 믿음도 동일합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을 가진 자가 성도이고, 그가 참 사람입니다. 행함에 대한 논쟁은 묵은 것입니다. 믿음이 무엇인가를 정의할 때 앎과 행함은 언제나 동반 자였거나 적대적이었습니다. 완전한 균형을 이룬 적은 거의 없었던 같습니다. 심지어 오늘 우리가 살펴볼 야고보서에도 행함 없는 믿음으로 인해 교회 안에 심각한 갈등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채영삼 교수는 <공동 신학의 서신>에서 믿음과 행함은 대치가 아니라 ‘성취’의 관계로 보아야 할 것을 조언합니다. 즉 행함은 믿음을 ‘온전’(1:4)하게 하는 것입니다. 마치 감 씨앗을 심으면 싹이 트고 자라나 감이 열리듯, 행함은 믿음이 있다면 당연히 밖으로 드러나야 할 마땅한 것입니다.

 

야고보는 우리에게 질문합니다.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다면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14절)는 것입니다. 아뇨. 절대 구원할 수 없습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이 무엇입니까? 굶주린 형제에게 말로만 ‘배부르라’ ‘따뜻하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행함이 없는 믿음’이며, ‘그 자체가 죽은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행함은 사랑의 실천이며,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임이 분명합니다. 만약 내 자신이 굶주리고 헐벗었다면 말로만 하지 않을 것입니다. 먹을 것을 찾을 것이고 입을 것을 구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랑의 기초는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모든 율법에서 가장 중요한 계명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하나님 사랑은 ‘내 목숨, 내 뜻, 내 정성, 내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것입니다. 남의 것이 아닙니다. ‘내 것’입니다. 이웃 사랑 역시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을 사랑합니다. 그것을 말하지 않아도 가르치지 않아도 사랑합니다. 긍휼의 뜻이 타인의 아픔으로 내 아픔으로 여기는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18-19 귀신의 믿음

귀신의 믿음을 보십시오. 귀신은 사람보다 하나님을 더 잘 알고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군대 귀신들인 사람은 멀리서 예수님을 보고 엎드려 절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의 행하심을 알고도 동네에서 쫓아냈습니다. 야고보는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19절)고 말합니다. 아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행하는 것입니다. 귀신들은 알지만 사랑하지 않습니다. 사랑 없는 믿음은 거짓된 것입니다. 누구도 측량할 수 없는 신학적 깊이가 있다해도, 천사의 말과 같은 달변을 늘어놓는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꽹과리일 뿐입니다. 사랑은 행동하는 것이고, 자신을 희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예배는 주일날 11시부터가 아니라 주일 저녁 집으로 돌아간 때부터 시작됩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삭을 바치라 할 때 믿음으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믿음은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을 통해 ‘온전하게’ 됩니다. 우리는 야고보서 안에서 계속하여 ‘온전하다’(텔레이오스)를 발견합니다. 야고보는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믿음뿐 아니라 행함을 통해서도 받는다고 말합니다. 의로움은 하나님의 완전함을 말합니다. 야고보는 믿음은 행함과 분리할 수 없는 일체의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믿음이 씨앗이라면 행함은 싹이 트고 자라나 열매를 맺는 과정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육신을 지으시고 코 안에 ‘생기’(바람)을 불어넣으심으로 온전한 사람이 되게 했습니다. 이처럼 행함은 믿음에 생기는 넣는 것과 같고, 믿음을 믿음으로서 구실을 할 수 있도록 온전하게 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20-25 아브라함과 라합 행함

 

기생 라합의 순종은 아브라함의 순종을 더욱 확장시킵니다. 라합은 가나안이 멸망 받음을 이미 들어 알았습니다.(수 2:9-11) 라합뿐 아니라 모든 가나안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오직 라합만이 앎을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을 멸할 때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을 생각해 달라고 청을 합니다. 라합은 믿는 바를 행동으로 옮겼을 때 구원을 받았습니다. 노아도 하나님으로부터 홍수 심판의 계시를 듣고 방주를 짓는데 자신의 모든 시간과 재물을 다 쏟아 부었습니다. 믿음은 ‘행동하는 것’입니다.


신학자들은 야고보서를 마태복음과 유사하다고 주장합니다. 마태복음은 유독 ‘열매’를 강조하고, 그 열매는 ‘사랑의 헌신’입니다. 무화과나무의 저주와 공생애 마지막 주간에 행한 설교들은 모두 열매 없는 이스라엘이 심판받게 될 것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전통은 있으나 생명이 사라진 이스라엘의 종교를 저주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있다 하면서 행함이 없다면 하나님 보시기에 ‘온전한’ 것이 되지 못합니다. 그것은 ‘흠 있는 제물’이며, ‘부정한 존재’로서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것이 아닙니다. 믿음 없는 행함은 교만이며,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믿음은 행함으로 보이고, 행함은 믿음 안에 있을 때 진정한 믿음이 됩니다. 바울은 이렇게 우리에게 충고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행함이 있는 믿음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흠 없는 제물임을 기억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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