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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평로강단-눈물의 미학/이성복목사

샤마임 2010. 9.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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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의 미학
(누가복음 7:11-17)

  나인성은 히브리어 ‘나임’ 즐겁다는 뜻입니다. 이 도시에 살았던 한 과부는 도시의 성격에 맞지 않는 눈물의 삶을 살게 됩니다. 나인성에 살았지만 즐거움이 없는 한 여인을 주님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스펄젼 목사님은 ‘하나님이 죄 없는 자녀는 한 명 두셨지만,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녀는 두신 적이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유일하게 죄가 없는 아들이었지만 예수님도 눈물을 흘리며 이 땅에 사셨습니다. 이 세상은 눈물을 피할 수 없는 삶입니다. 누가 눈물 흘리며 사는 것을 원하겠습니까? 그래서 눈물 없는 살기 좋은 도시를 찾아 이사도 하지만 눈물이 없는 곳은 이 땅 어디에도 없습니다. 눈물의 인생에 찾아오셔서 한 가정에 역사하셨던 예수님이 우리 삶 가운데 동일하게 역사하실 것입니다.

첫째, 울어야 합니다. 
성경시대에 여인은 남자에게 절대적 의존하는 삶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과부였으며 유일한 의존적 존재였던 아들마저 죽었습니다. 이 여인의 눈물은 장례식에 참석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숙연케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곳을 지나가다 이 여인을 보시고 불쌍히 여겼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이 청년의 관에 손을 대셨습니다. 이것은 부정한 일로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지 않는 행동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정한 관에 손을 대신 것은 아버지의 마음으로 이 청년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행동을 일으킨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이 과부의 눈물이었습니다. 눈물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임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의 눈물은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아 주시고 방문하시고 찾아와 주시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눈물은 필요합니다.

둘째, 울지 말라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울지 말라고 하십니다. 주위에 있었던 많은 사람들도 울지 말라고 이 여인을 위로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울지 말라는 말은 다른 의미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이 여인을 슬프게 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눈물을 그치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청년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주님이 오셔서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말씀으로 일으켜 세우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의 이 치유와 회복과 살리심의 말씀의 권능은 우리의 눈물을 보시고 아버지의 마음으로서 명할 때에 나타나는 능력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울지 말라 말씀하실 때까지 울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오셔서 관을 만져 주시면 우리 가정도, 교회도, 이 사회와 국가도 살아 날 줄 믿습니다.

셋째, 눈물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냅니다.
여인의 눈물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었습니다. 그 장례 행렬에 있었던 많은 사람들이 고백하였습니다. 예수님이 큰 선지자임을, 또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는 고백이 나왔습니다. 여인의 눈물이 주의 영광 나타나도록 하였습니다. 주의 영광은 인간의 성공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찾아오셔서 만나 주시고 보살펴 주시는 것이 주의 영광 나타나는 것입니다. 진주는 보석입니다. 그러나 그 진주를 품고 있는 조개에게는 고통입니다. 우리의 눈물이 이 교회를 주의 영광으로 가득 채울 줄 믿습니다. 우리의 눈물이 우리 가정을 주의 영광으로 가득 채울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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