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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난제] 지구는 언제(무슨 날짜) 창조되었는가?

샤마임 2018. 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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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는 언제(무슨 날짜) 창조되었는가?


우리가 아는 한 세상은 육일 동안 창조되었다. 그러나 육일 동안의 창조는 문자적 육일인지 아니면 개념 즉 한 시대나 개념적인 '일'인지 알 수 없다. 문자적인 것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육일의 창조를 주장한다. 즉 24시간의 하루를 계산한 육일의 창조다. 그러나 이러한 문자적 육일의 창조는 필자가 보기에 비 성경적이며, 성경을 오해한 수치라 감히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몇 가지 특징에서 육일의 창조는 논리적으로 타당하지 않고, 성경 자체가 옹호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교부문헌을 적지 않게 살펴본 바로서 육일 창조는 초대교회에 그다지 중요하지도 않았고, 그렇게 믿지 않았다는 것을 접할 수 있다. 



이상하게도 창세기 주석가들은 지구 창조에 대한 언급을 거의하지 않는다. 아니면 전우주를 창조하는 서론적인 이야기로 창1:1을 말한다. 하지만 창세기 1-2장을 살펴보라. 지구 창조는 없다. 심지어 가장 초기 창조를 다루는 빛의 창조인 첫날이나 궁창을 만드는 둘째날에 지구는창조되지 않고 전제되어 있다. 학자들은 궁창 위의 물과 아래의 물은 지구에서 일어난 바다와 하늘 구름의 분리로 생각한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문제는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지구가 이미 존재해야 한다는 점이다. 


셋째날의 창조 역시 지구 위에서 일어날 일이다. 넷째 날에 창조된 궁창의 별들... 이곳에서도 역시 지구는 나오지 않는다. 마치 지구에서 하늘을 바라보는 관찰자의 입장에 더 가깝다. 심지어 1:17 "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을 주목하여 보면 낮과 밤의 개념은 지구의 자전을 이야기하는 것이 분명하다. 우주에는 낮과 밤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이 공전과 자전에 의한 태양과 같은 항성과 지구와 같은 행성의 관계가 만들어내는 개념이다. 창세기는 이미 그것을 전제하고 있을 뿐이다.


즉 보수적 관점에서 말하는 시간적 육일창조는 성경 자체가 옹호하고 있지 않는 것이다. 창세기 저자는 분명히 다른 의도에서 창조를 기록했을 이유가 있다.


필자는 이러한 정황들을 살펴본 결론으로서 지구는 가장 처음 창조되었다고 믿는다. 즉 창1:1의 천지-하늘과 땅-는 하늘과 지구를 뜻한다. 지구로서의 에레츠는 그 어떤 피조물보다 가장 먼저 창조된 것이 분명하다.







지 즉, 땅의 히브리어는 'erets'로 성경에서 3000번 가까이 사용되는 범용적인 단어다. 번역의 용례를 보면 먼저 국가나 나라의 다라는 단어로 약 15번 정도 번역된다. 다음으로는 흑이나 먼지로서 몇 번, 발을 딛는 땅으로서의 개념은 약 백여 번, 가장 빈전히 번역된 단어는 영어 땅'earth'이다. 사용된 몇 곳을 찾아 보자. 


창세기 1-2장 안에서 용례이다. 1장에서는 1.2.10.11.12.15.17.20.22.24.25.26.28.30, 2장에서는 1.4.5절에서 사용된다. 1.2장에서 사용된 에레츠는 모두 사람이 딛는 대지로서의 땅을 의미한다. 그곳에서 사람이 살고, 발을 딛고 선다. 식물을 에레츠에 뿌리를 내리고 버티고 영양분을 공급 받는다. 또한 그곳은 소명을 이루어 가야한 장소로 주어진다. 


창세기 6장에서는 심판할 장소이다. 


"내가 홍수를 에 일으켜"(창 6:17)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내 아버지의 집과 내 고향 에서 떠나게 하시고 내게 말씀하시며 내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이 을 네 씨에게 주리라 하셨으니"(창 24:7)



창6의 땅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땅을 더럽히는 인간에 대한 심판이다. 이러한 비유는 가나안 사람들이 악을 행했을 때 땅이 토하고 그들을 거부한다는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이러한 개념은 이미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땅이 인간들을 거절하는 은유를 통해 분명해 진다.


"그 땅도 더러워졌으므로 내가 그 악으로 말미암아 벌하고 그 땅도 스스로 그 주민을 토하여 내느니라"(레 18:25)


에레츠는 지구의 개념이 아니다. 창세기 기자는 에레츠를 물리적 땅이 아닌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충성하는 인격적인 존재로 그려내고 있다. 성경속에서 에레츠는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지구가 아닌 사람이 발을 딛고 살아가는 기반이나 존재의 받침, 삶의 터전을 상징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허락하신 선물이다. 아브라함의 소명이 담긴 창 12:1에서는 보여줄 그 땅을 정확하게 '하(그) 아레츠(땅)'를 사용한다. 더이상 성경을 언급하는 것은 의미 없어 보인다. 이러한 에레츠의 용례들은 현대인이 아는 우주속의 '지구'와 사뭇 다르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분명해 진다. 이것은 창세기 1장의 창조가 단순한 문자적 의미로 받아 들일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를 수 있다.


먼저 이곳에서 간략하게 결론을 내려보자. 지구의 창조는 1:1의 창조를 인정하지 않으면 성경 어디에도 없다. 성경은 시작하면서 곧바로 하늘(샤마임)과 땅(에레츠)를 선포한다. 이러한 구도 자체는 논리적 순서를 따라 창조를 하지 않음을 말한다. 


이것을 육일 창조의 개념으로 끌고가면 창세기 1장의 창조는 엄밀하게 육일창조를 인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는다. 즉 상관 없다. 다만 육일의 개념을 통해 이후 일어날 모든 시간의 개념을 끌어 낸다. 그러므로 창조의 육일을 '24시간'의 하루의 육일로 볼 필요가 전혀 없으며, 그렇게 볼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다 아는 이야기지만 창1장의 창조는 구속사적 개념이 강하다.


빛-광명체

궁창(윗물.아래물)-새.물고기

땅(식물)-동물 사람

안식


이러한 구도는 창조가 무에서 유로, 무질서에서 질서로 나아간다. 또한 기초적인 생성과 그 다음에는 사람이 거할 수 있는 기반을 조금씩 준비해 가는 과정으로서의 창조다. 창2에서의 사람의 창조는 궁극적으로 사람이 없기 때문에 창조는 완성되지 않았음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2:5)이라는 구절을 유의해 보자. 사람의 창조는 곧 창조의 완성이다. 


창세기 1장의 창조는 분명하게 무에서 존재로, 무질서에서 질서로 나아간다. 존 H. 월튼은 <창세기 1장과 고대 근동 우주론>에서 '비존재'에서 '존재'로, '무의미'에서 '의미'로도 이동한다고 말한다. 창조의 초기 형태는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름을 지음으로 그들은 '기능적'이 된다. 월튼은 1-3일의 창조를 두고 이렇게 말한다. 


"세 가지 기능, 즉 시간, 날씨, 식량 생산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존재하며, 분리와 이름 짓는 행위를 통해 그들 나름의 기능을 부여 받는다."(301쪽)


우리는 고대 근동을 참조하지 않아도 성경의 자증을 따라 창세기의 창조가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드러내며, 창조의 목적이 '인간 창조'임을 발견할 수 있다. 보수적 관점에서 모세 오경을 모세의 저작으로 인정할 경우 창세기는 반(anti)애굽적으며, 비 신화적이며, 새에덴으로서의 가나안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런 점에서 지구의 창조는 창조에 모든 존재의 근원으로 전제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지구(에레츠)를 육일창조가 아니라 존재 방식을 통제하는 의미로 보여주고자 함이 분명하다.


이러한 정황을 살펴 볼 때 창1의 창조는 먼저 창조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소개와 창조의 궁극으로서의 사람을 말하고 싶은 것이지 창조 자체가 아니다. 어쩌면 우리는 창1을 해석할 때 좀 더 성경을 충분히 해석해야할 필요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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