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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물며의 하나님

샤마임 2010. 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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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기도회 설교

‘하물며’의 하나님

본문 누가복음 18:1-8

 

우리는 이런 말을 종종 합니다. 처음 초신자 때는 하나님께서 즉각적으로 기도를 들어주시지만 신앙생활을 오래하다보면 잘 들어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떻게보면 맞는 말 같기도하고, 어떻게 보면 이상하게 들리는 그런 말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기도에 대한 낙담과 실망과 영적인 퇴보가 내포되어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기도 응답의 부재를 잘못된 회의주와 영적인 퇴보로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영적인 경륜과 영적인 성장의 결과로 오해하고 있다는 점은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 주님은 한 과부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러한 분이 아니심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1절은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을 가르치기 위해 이 비유를 말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들은 누구일까요? 17장 20절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나옵니다. 다시 22절에서는 제자들이 나옵니다. 주님은 바리새인들에게 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분명 제자들에게 말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주님은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기도가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불쌍한 과부의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것 같습니다.


등장하는 인물과 배경을 조금만 살펴봅시다.


2절을 보면 오늘의 배경은 어떤 도시입니다. 시골이 아닌 도시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도시의 특징은 하비콕스가 이야기한 것처럼, 익명성, 기동성, 합리성, 보편성 등이 있을 것입니다. 도시는 합리적인 고이어야 합니다. 합리적이지 않으면 도무지 복잡한 도시가 운영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도시의 재판관은 먼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과 사람을 무시한다는 말은 동일한 의미로 철저한 이기적 존재요 교만하고 포악한 존재라는 뜻입니다. 있어서는 안될 존재란 뜻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는 이러한 불의한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비유는 우리의 현실 속에서 기도를 어떻게 할까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과부의 형편을 살펴 봅시다.


먼저 그녀는 여자입니다. 또한 과부입니다. 3절에 의하면 그녀는 원수가 있습니다. 참으로 불쌍한 여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자인 데다가 과부입니다. 과부는 홀로 존재할 수 없는 전적인 의존적인 존재입니다. 당시의 시대 속에서 과부는 인간으로 대부 받을 수 없는 그런 존재였습니다. 그런데다가 원수가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그녀의 연약함을 알고 그녀의 적은 가산까지 탐을 내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벼룩의 간을 꺼내 먹는 놈’이라는 말처럼 참으로 악날하기 그지없는 존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20:47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들이 더 엄중한 심판을 받으리라 하시니라


어쩌면 이 비유는 기도에 대한 교훈이라기보다는 외식적인 바리새인들은 책망하기 위한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음 비유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하는 이야기를 읽어보면 아마 그런의도가 맞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과부의 원수는 경건한척 하면서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해서는 안되는 악날하고도 간사한 일을 저지르는 바리새인들인지도 모릅니다.

 

우리 주님의 비유는 계속됩니다. 불의한 재판관은 생각합니다.

눅 18:4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18:5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불의한 재판관은 과부의 원한을 들어 주기로 했습니다. 이유는 5절의 ‘나를 번거롭게 하니’입니다. 이 말씀은 3절의 ‘자주 그에게 가서’와 통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문제는 자주 갈 필요가 없는 문제입니다. 옳은 재판관이라면 딱 한번만 듣고도 그것이 불의한 것이라면 당장 들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재판관은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왜일까요? 주님은 그 이유에 대해서 잘 설명해 주지 않고있습니다. 다만 그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이유 만을 밝히고 있습니다. 과부가 자주 그를 찾아가다는 것은 그가 과부를 무시했으며 별 볼일 없는 존재로 여겼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6절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무엇을 들어야 합니까? 불의한 재판장이 한말입니다. 그말은 귀찮아서 들어준다는 것입니다. 귀찮아서... 이 말 안에는 과부의 끈질김과 포기하지 않는 열정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누구도 이 열정에는 이기지 못합니다.

 

예전에 어떤 집사님께서 기도 잘하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렇게 간단하게 대답해 주었습니다. ‘엉덩이만 무거우면 됩니다. 단지 엉덩이만 무거우면 기도의 용사가 될 것입니다. 그 한가지만 잘하면 됩니다’ 그러자 그 집사님은 공감을 하면서도 영 미더운지 실천에 옮기지는 않았습니다.

 

응답받는 기도의 비결은 열정이며, 성실함이며,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는 진지한 결단입니다. 주님께서는 그것을 보고 싶은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헛된 것을 위해서는 자신의 열정을 쏟아 붇지만 정말 중요한 것들에 대해서는 열정이 별로 없습니다.


주님께서 계속해서 말을 이어가십니다.

7절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8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주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여기서 7절의 ‘하물며’라는 단어에 주목하라고 권면드리고 싶습니다. 하물며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주님은 하물며의 하나님이심이십니다.

 

마 6: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마 7: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우리 주님은 자녀들에게 좋은 주시기 원하시는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기도에 대한 확실한 응답이 있을 믿고 기도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께 나아갈 때에 믿음이 없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선언합니다. 또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삭을 후사를 약속했을 자신의 몸과 사라의 몸이 도무지 생산할 수 없는 거의 죽은 지경이 되었음에도 믿음으로 주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이러한 기도에 대한 확신이야 말로 우리가 기도를 포기하지 않고 결국 응답 받을 수 있는 비결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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