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 복음의 심장 / 데이비드 드실바 / 오광만 옮김 / 이레서원
바울 복음의 심장
데이비드 드실바 / 오광만 옮김 / 이레서원
본성이 얼마나 무서운지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필자의 기억에 아직도 생생하고 무서웠던 추억이 하나 있다. 중학교 3학년에 갓 올라왔을 때 일이다. 당시 2학년 교실은 본관 2층이었고, 3학년 교실은 본관 1층이었다. 3월이 되어 새학기가 시작되었다. 버스에서 내려 학교로 들어갔다. 교실에 들어가 가방을 풀고 앞을 보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런데 낯선 아이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조금 지나니 친한 동네 동생이 들어왔다. 순간 내가 교실을 잘못 들어왔다는 생각이 폭풍처럼 밀려 들어왔다. 급하게 가방을 다시 챙겨 1층 3학년 교실로 내려갔다. 그런데 그 일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3일째 되는 날까지 이어졌다. 물론 3일째 되는 날은 교실까지 들어오지 않고, 계단을 오르다 내려가기는 했지만 말이다. 습관은 기억의 관성을 만들고, 관성은 새로운 것에 대한 저항으로 이어졌다. 신학교에 들어가 죄에 대해 공부하면서 과거의 이야기가 웃픈 추억이 되어 떠오르곤 한다.
복음은 좋은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복음을 원의적 함의를 풀어내면서 ‘복음(福音)’ 즉 ‘기쁜 소식’으로 포장하려 한다. 물론 복음은 기쁜 소식이다. 그러나 복음이 주는 기쁨은 고통을 동반하는 기쁨이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축적하는 것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을 포함하지만, 훨씬 더 혁명적 변화를 요구한다. 그래서 고통스러운 것이다. 복음을 회개 없는 죄, 변화없는 삶을 위한 몰핀 조사로만 이해되고 있는 현대의 복음 이해는 초대교회가 가진 복음의 의미를 상당부분 훼손된 것이다. 데이비드 드실바는 바울복음을 살피면서 ‘변화’에 초점을 맞추었다. 변화는 고상하고 당연하고 식상한 주제로 보인다. 하지만 죄의 관성의 악날함과 교활함을 안다면 복음이 가져오는 ‘변화’의 혁명성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복음이 요구하는 변화는 영국 여행을 스페인 여행으로 바꾸는 수준의 변화가 아니다. 존재의 변혁이며, 전존재적 죽음과 태어남을 말한다. 바울은 바울의 능력을 ‘새 창조(καινὴ κτίσις)’라고 선언했다. 복음은 믿는 자들을 ‘새로운 피조물(καινὴ κτίσις)’로 만드는 창조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고 싶은 진정한 ‘변화’이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란 구호는 최봉석(崔鳳奭, 1869-1944) 목사의 피끓은 외침이었다. 필자는 최봉석 목사의 구호를 부당하게 생각하거나 어리석은 전도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곳에는 치명적인 결함이 숨겨져 있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에는 예수를 믿음 ‘죽어서’ 천당가고, 믿지 않으면 ‘죽어서’ 지옥 간다는 것이다. 이 구호는 틀리지 않았지만, 복음을 죽음 이후의 문제로 한정시키는 결함을 가지고 있다. 천당은 죽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때 천국을 살아야 한다. 교회는 보이지 않는 천국의 가시적 임재 공동체이다. 성령은 죽기 전에 택하신 백성들에게 ‘인치심’으로 천국을 보장한다. 천국은 ‘아직’ 완전히 도래하지 않았지만 ‘이미’ 우리 가운데 와 있다. 주님은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마 12:28)했다고 선언하신다. 이 책은 복음이 갖는 ‘혁명성’에 대해 변화란 주제로 바울서신을 톺아가는 책이다. 이백 쪽 분량의 짧은 책이면서 이신칭의 중심의 바울신학을 ‘변화’의 관점에서 ‘바울복음 새로 읽기’를 시도한다. 그렇다면 바울이 말한 복음의 핵심 또는 ‘변화’는 무엇일까?
변화의 전제
오래되었지만 거듭남의 핵심을 명료하게 보여준 경건서적이 있다. 맥스 루케이도 목사의 <예수님처럼(JUST LIKE JESUS)>이란 책이다. 이 책은 ‘하나님은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사랑하시지만 예수님처럼 변화되기를 원하신다’라는 한 문장으로 정의할 수 있다. 데이비드 드실바는 그리스도인들이 변화되는 것이 바울복음의 핵심으로 지적한다. 그렇다면 그 변화의 합당한 근거는 무엇일까? 저자는 놀랍게도 ‘칭의’에 있다고 말한다. 칭의, 즉 ‘의롭다 함을 받음’은 다른 미에서 ‘어떤 사람을 의롭게 만들다’(60쪽)라는 뜻을 가진다고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칭의’는 변경 또는 재조정을 수반한다. 칭의에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을 의롭게 만드시고 그를 디카이오쉬네(의:義)를 드러내는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과정이 포함된다.”(60-61쪽)
즉 칭의는 ‘의롭게 됨’이라는 일시적 선언이 아니라 칭의 이후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을 포함한다. 저자는 이것을 ‘우리는 인도하고 형성하는 내적인 규범으로서의 성령을 따’(64쪽)름으로 설명한다.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은 육체를 거스르며, ‘하나님의 영에 맞추어’(69쪽) 사는 삶이다. 칭의는 결과인 동시에 과정이다. 칭의는 의롭게 되었기 때문에 의롭게 살아야 한다는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소명이 새롭게 주어지는 사건이다. 칭의는 변화를 요구하고, 변화될 수밖에 없는 존재로의 창조이다. 하나님은 이 변화를 ‘신자들 안에서 시작하셨고,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루실(빌 1:6) 선한 일’(37쪽)로 규정하신다. 바울은 자신의 삶을 이미 이룬 것이 아니라 ‘달려가고 있는 중’이라고 말한다.
빌립보서 3:12-14(표준 새번역)
내가 이것을 이미 얻은 것도 아니요, 또 이미 목표점에 이른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아직 그것을 붙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는 일은 단 한 가지입니다. 곧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만을 바라보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오직 은혜로(sola gratia)’로는 은혜로 구원 받았다는 의미는 동시에 은혜로 살아가야 한다는 책임을 지운다. 아니 새로운 피조물은 은혜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아이삭 왓츠의 유명한 찬송가 가사를 보라. ‘놀라운 사랑 받은 나 몸으로 제물 삼겠네’라고 고백하지 않았던가. 그리스도인은 ‘우리 자신이 주도하는 과제와 스스로 정한 목표와 상황에 대한 반응에서 돌아와서, 성령님이 주도하고 성령이 방향을 정하시는 과제와 행위에 우리 자신을 넘겨’(91쪽) 드리는 존재이다.
변화의 대상
변화의 관점에서 바울읽기를 시도했을 때 가장 급격한 관점의 변화는 ‘그리스도인의 삶’과 ‘교회론’에 대한 새로운 각성이다. 저자는 이 책의 목표를 ‘개인의 변화와 신앙 공동체의 변화와 우주자체의 변화’(21쪽)로 설정한다. 그리스도인은 이미 변화 받았고, 계속 변화 과정 속에 있다. 삶 속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우리는 ‘성화(sanctification)’라고 부른다. 18세기 영국 부흥운동을 주도했던 찰스 웨슬리는 ‘성결’을 거듭남의 확고한 징표로 이해했다. 비록 신학적인 칼뱅주의와 견해를 달리하지만 그는 거듭났다고 하면서 거룩한 삶이 없는 그리스도인을 참그리스도인으로 보려하지 않았다. 그는 거룩한 삶을 위해 몸부림 쳤고, 그렇게 살다갔다. 칼뱅의 경우, 성화를 점진적인 것으로 이해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끊임없이 성화 되어가야 한다고 말한다. 성화는 죄의 본성을 이기려는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의 연속이다. 악한 습성과 거룩한 영의 인도하심의 전쟁터인 셈이다. 죄는 관성의 법칙처럼 악의 속도와 방향으로 지속적으로 움직이게 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우리가 가던 길을 멈추게 할 수 있는 힘’(101쪽)이 있다. 악으로 향하는 삶을 바꾸기 위해서는 또 다른 힘이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십자가’ 곧 복음이 힘이다.
성화는 전쟁이다. 개인적인 경건을 위한 몸부림과 구조적 악과의 개혁을 포괄한다. 저자는 개인과 교회, 나아가 창조세계를 복음으로 변화 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동안 개혁교회가 변화의 범위를 지극히 개인적인 범위 안에 축소시키려는 성향이 적지 않았다. 위대한 인물로 추앙하면서도 먼 과거나 지금 우리와 상관없는 인물로 여겨지는 영국의 노예 해방자 윌버포스는 이러한 신학적 성향 때문이다. 변화는 한 개인에만 한정될 수 없다. 하나님은 삶의 전 영역에서 변화가 일어나야할 것을 명한다. 저자는 ‘가족’과 ‘몸’의 이미지를 가지고 변화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자기중심적 삶에서 벗어나 가족을 위한 이타적 중심으로 변화될 때 변화는 시작된다.
“가족으로서 이 공동체는 서로의 필요를 채워 주는 데 마음을 쓰고 용서하며 화목과 회복위해 힘쓰고, 서로를 하나님의 동일한 자녀로 존중하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대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며, 또 그렇게 하기를 기대하게 된다.”(136-7쪽)
나가면서
데이비드 드실라의 주장은 마땅히 되새겨야할 복음의 핵심을 짚어 준다. 변화는 불가피함을 너머 필연적이다. 변화 없는 중생도, 변화 없는 구원도 존재할 수 없다. 바울은 거저 복음을 받았지만, 반드시 변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동안 많이 간과되었던 ‘변화’에 대한 바울복음 이해는 사랑을 잃고, 경건의 능력을 상실한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도전한다.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옛 사람을 벗었다고 하지만 새 사람으로 살아가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지 되물어야한다. 다시 복음으로 돌아가자. 그러나 바울이 말하고자 했던 변화에 대한 갈망을 가지고 다시 바울 읽기를 시작해 보자.
저자/역자 : 데이비드 드실바/오광만 | 출판사 : 도서출판 이레서원
판매가 : 13,000원 → 11,700원 (10.0%, 1,300↓)
바울이 전한 복음을 이신칭의로만 제한하는가?바울이 선포한 복음, 곧 변화와 갱신의 메시지에 주목하라.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가진 힘이 무엇인지 깨달았기에, 정처 없는 방랑자가 되어 로마 제국 전역에 다니며 복음을 전했으며 온갖 핍박과 궁핍을 견딜 수 있었다. 바울이 그렇게도 모든 사람들과 공유하고자 했던 “좋은 소식”은 무엇인가? 오늘날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무심코 복음을 “지옥을 면하게 하는 통행권”으로 축소시켰지만, 복음에는 훨씬 풍성한 의미와 강한 능력이 있다. 이 책에서 드실바는 독자들이 ‘이신칭의’뿐만 아니라 바울 서신에 나타난 복음 메시지 전체를 이해하도록 안내한다. 로마서에서 바…[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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