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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칼럼, 중고책 이런 재미로 읽는다.

샤마임 2013. 9. 25.


독서칼럼

헌책에서 읽어 내는 시대 이야기


헌 책방에서 책을 구입하면 솔솔찮은 재미가 있다. 헌책은 새 책이 줄 수 없는 세월과 시대의 흔적을 담고 있다. 헌책의 묘미는 거시적 풍경뿐 아니라 미시적 풍경을 아우르기 때문이다. 일례로 헌책을 읽다보면 책 속에 기록한 메모와 끼어져 있는 명함들을 발견하는 재미가 있다. 또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린 저자나 출판사의 흔적이기도 하다. 당시의 역사들을 더듬어 찾아가다보면 또 다른 세계를 만나게 된다. 마치 오래된 옛 영화 한 편을 보는 것처럼.

 

수개월 전 보수동 헌책방에 들렀다. 몇 권의 책을 골라 나중에 읽을 양으로 책장에 꽃아 두었다. 엊그제 교육에 대해 알고 싶은 집에 교육 관련 서적을 살폈다. 루소의 에밀이 눈에 들어왔다. 비에 젖은 흔적이 남아있다. 책 테두리가 삭아간다. 출간년도를 보니 1987년 4월 15일 발행이다. 88올림픽 이전에 출간 되었으니 벌써 27살이다. 적지 않은 나이다. 순수한 사람의 나이로만 치더라도 결혼할 나이가 아닌가. 





읽기 전에 이곳저곳을 뒤져가며 옛 주인의 흔적을 찾았다. 아니나 다를까 첫표지에 윤정근이란 이름과 그가 메모한 몇 줄의 시처럼 보이는 문장이 보인다. 혹시 시인이 아닌가 싶어 검색해보니 시인은 아니다. 정말 주인의 사인인가 보다. 에밀을 읽을 정도면 적어도 대학생은 됐을 터. 27년에 23년을 보태니 50이다. 그는 분명 사십대 후반이거나 오십대 초반일 것이다. 결혼해서 이 책을 샀을 때의 자기나이만한 자녀를 두었겠지. 글씨체를 보니 남자이고 대체로 차분한 성격을 지내고 있다.

 

내지 상태는 어떤지 살피니 중간에 뭔가 있다. 명함이다. 명함의 주인공은 MBC부산문화방송 프로듀서인 도인봉씨다. 주소지가 중앙동인 것을 보면 아직 옮기기 전이다. 명함은 분명 책을 사서 곧바로 끼어 놓은 것 같다. 아니면 몇 주가 흘렀을지도 모른다. 전화번호를 알아보니 (주)윤택지에이 손해보험회사로 나온다. 아마도 방송국에 입주하면서 전화번호를 그대로 받은 것 같다. 주소도 그대로다. 이 책의 주인은 누굴까? 명함에 나온 분이 아직도 살아계시는가 싶어 인터넷 검색을 시도했다. 아직 살아계신다.(검색결과링크) 이 분은 알고 있을까. 자신의 명함을 책의 주인에게 주었다는 것을. 직접 물어보면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책을 뒤적거리니 앞 부분에 밑줄이 있고 그 뒤로는 읽은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줄을 긋지 않는 습관은 아니다. 읽었다면 공감이 가는 부분이 밑줄이 있을 것이 뻔하다. 책주인은 그다지 책에 대한 열정은 없어 보인다. 그냥 호기심에 샀다가 몇 장 읽고 덮어 버렸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의도인지 아닌지는 모르나 책을 헌책방에 팔았다. 아니면 이사 가면서 버린 것을 고물상이 주워 헌책방에 팔았을지도 모르겠다. 후자의 가능성이 더 높다. 80년대 중후반, 전두환 대통령이 나라를 호령하고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권세를 휘두를 대가 아니던가. 책주인은 누구였을까? 암담한 시절을 보내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꿈을 가지고 살았을까. 무척 궁금하다. 혹여나 이 분을 만나 그 때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적어도 나보다는 5살에서 10살 정도는 더 많은 분일게다. 



책마다 사연이 있다. 핑계 없는 무덤 없듯, 사연이 없는 헌책은 없다. 다행이다. 폐지로 버려지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남았으니 말이다. 500쪽이나 되는 책의 가격이 고작 4500원이다. 동일한 출판사의 에밀 가격이 만원이다. 삼십년 가까이 흘렀는데 가격은 두 배 정도니 일반 물가가 오른 것에 비하면 책값은 턱 없이 올라가지 않았다. 우리나라 책값이 비싸다고 난리지만 엄살이다. 나 같은 책중독자에게만 비쌀 뿐이지 한 달에 고작 한 두 권 읽는 이들이 책값을 운운하는 건 어울리지 않는다. 책에 들어있는 추억과 사연까지 합하면 결코 비싸다고 할 수 없다.

 

냄새가 케케하다. 비에 한 번 맞고 나면 책은 뒤틀려 바르지 않다. 종이 표면에도 보풀이 일어난다. 거기에 케케한 냄새까지 더해지니 그야말로 모양새가 나지 않는다. 그런데 난 이런 책이 좋다. 바울의 고백처럼 보화를 담은 질그릇이 된다. 책의 소중함은 화려한 외양이 아니다. 그 속에 담긴 귀한 정보와 책 자체가 담은 사연이다.

 

당시의 제지기술은 그다지 좋지는 않았는가 보다. 가장자리가 누렇다. 화공약품이 빠져나가면 종이가 빛을 잃어 간다. 파릇파릇하고 상그러운 맛이 사라지고 칙칙함이 대신한다. 글씨가 작고 행간의 좁다. 여백도 많지 않다. 요즘 나오는 책들이 디자인과 읽기 편함을 추구한다면 예전 책들은 많은 정보를 전달하려는 목적이 크다. 그러다보니 예전 책들을 대하면 답답함과 힘겨움이 읽기를 방해한다. 계발을 강조하고 효율을 중요시하던 시대적 정신을 책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시대적 산물이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일게다.

 

한 권의 헌 책에 이렇게 많은 사연과 역사의 풍경이 담겨있다. 아직도 읽지 못한 헌 책들이 즐비하다. 지난들에 익은 웬디 웰치의 [빅스톤갭의 작은 책방]에 보면 헌 책에 얽힌 사연을 소개한 부분이 있다. 어떤 책은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사연도 있다. 희노애락이 한 권의 책에 담긴 것이다. 단지 정보만을 구하려 한다면 새 책을 구입할 일이다. 그러나 오래된 인류의 흔적을 읽고 싶다면 헌책을 사야 한다. 꼭 그래야만 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누군가의 추억이 되고 역사가 된다. 그러고 보니 나도 한 권의 책이 되어 삭아간다. 곰삭듯 잘 삭아 지리라. 나도 누군가의 추억이 될 터이니 말이다. 가을이다. 독서의 계절이지 않는가. 이번 주에 보수동 책방골목에 가서 누런 헌책 한 권 사들고 읽어보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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