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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야곱 DNA

샤마임 2012. 1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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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야곱 DNA

-나는 욕망한다. 고로 존재한다.

정현욱




 ‘코기토, 에르고 숨’ (cogito, ergo sum)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말이다. 철학사에 이 명제가 중요한 이유는 사고의 주체를 신에게서 ‘나’라는 존재로 옮겨 놓았기 때문이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근대의 빛을 밝힌 명제이다. 얼마 전 읽은 황상민 교수는 ‘대통령과 루이비통’이란 책에서 ‘나는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말하면서 소비하는 존재로서의 현대인들을 규명한바 있다. 그럼 나는 여기서 이렇게 말하겠다. ‘나는 욕망한다. 고로 존재한다.’ 처음 이 책을 받았을 때 나는 절대 열어서는 안 되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고 싶은 은밀한 충동을 들킨 느낌이었다. 내 안의 숨겨진 욕망을 이 책 모두 까발리고 있다는 불길한 느낌이 들었었다. 거룩한 목사로 살아가야하고 살아가고픈 페르소나와는 다르게 내 안의 욕망은 추하고 거짓되고 악하기까지 하다. 문제는 ‘이런 나를 하나님이 사랑하실까?’라는 의문이 든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더욱 야곱에게 집착하고 야곱을 보면서 위로 받는지 모르겠다.

 

저자는 탁상공론을 일삼으며 상아탑 안에 갇혀 사는 신학자의 관점에서 저술하지 않았다. 그는 목회자이며, 학자이다. 철저하게 실존적이고 동시에 신학적이다. 야곱의 삶의 궤적(軌跡)을 추적해 가면서, 가장 야비하고 속물 같은 인간이 어떻게 거룩한 믿음의 족장이 되었는가를 ‘욕망’이라는 키워드로 풀어 나가고 있다. 저자는 야곱의 일생을 성경에 나오는 대로 연대기적으로 끌어 나가고, 10장으로 나누어 야곱의 전 생애를 조밀하게 분석한다. 필자가 보건대 야곱의 생애는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초기의 야곱은 세속적인 욕망과 하나님의 소명이 혼재된 상태이면서 세속적인 욕망에 소명이 함몰된 상태였다.(76쪽) 중기는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는 시기(6장), 마지막에서 야곱에게서 하나님의 얼굴이 슬며시 비춰진다. 저자는 이것을 복을 욕망하는 상태에서 복을 비는 상태로의 전환(轉換)이 일어나는 과정이라고 말한다.(13쪽)

 

야곱! 그는 어떻게 버러지 같은 존재에서 위대한 믿음의 족장이되는 인생역전의 주인공이 되었을까? 저자는 끊임없이 ‘은혜’라고 강조한다. 불가항력적 탄생의 적신 상태도 은혜였고(41쪽), 하란에서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살 수 없었고(150쪽), 생의 말년에서도 ‘은혜 아닌 것이 없다는 것’(249쪽)이다. 그렇다! 나의 삶에 있어서 은혜 아닌 것이 없다. 나의 탄생도, 고난도, 거듭남도, 목사가 된 것, 지금 여기 글쓰기 학교에 있는 것도 은혜다. 책을 다 덮고서야 판도라의 마지막 ‘희망’이 얼굴을 내밀었다. 찝찝하고 의기소침하게 했던 분열된 이중성의 자아조차도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고 생각하니 감사할 따름이다.

 

벌써 두 번째 읽었다. 처음 읽은 때가 작년 5월이었으니 벌써 1년 하고도 6개월이 지났다. 그때는 책을 참 썼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내 안에 야곱 있고, 야곱 안에 나 있음에, 야곱 같은 나에게 부어주실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를 생각하니 감격하지 않을 수 없다. 불공평해서 억울했는데 이제 나 같은 죄인 살리신 불공평한 하나님께(40쪽) 감사하고, 나를 둘러싼 고통과 원수가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임을 보여주시니 또 감사하고(167쪽), 고난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복이라는 것을(147쪽) 알게 해 주시니 더욱 감사한다. 이 책을 통하여 나로 하여금 인생을 성찰하게하고 감사의 눈물 흘리게 하신 김기현 목사님께 감사한다.

 

그래도 싫은 소리 하나는 하고 가야겠다. 세겜 이후의 생애는 그렇게 간략하게 처리해 버렸습니까? 형제간의 불화와 화해의 드라마는 요셉에게 떠넘기실 작정이십니까? 혹시 출판사의 독촉 때문은 아니었는지요? 또 한 가지 더 바란다면, 김훈 <흑산>처럼 서정적인 소설로 야곱의 생애가 태어나기를 기대해 본다.

 

밑줄긋기

모세는 공자가 아니다.(71)

인간이란 천사와 같으면서도 동물적이다.(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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