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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고전읽기] 루터의 노예의지론 (De servo arbitrio)

샤마임 2019. 12. 30.


[기독교 고전읽기] 루터의 노예의지론 (De servo arbitrio)


1. 들어가면서


종교개혁자들과 종교개혁사상을 이해하는 데 루터가 차지하는 비중은 지대합니다. 실제로 칼뱅인 츠빙글리, 불링거 등의 많은 사상가가 다양한 신학적 주장을 펼치고 논문을 발표하지만, 루터를 결코 앞서지 못 합니다. 루터의 서적들만 살펴본다 해도 종교개혁의 80% 이상을 이해했다고 할 만큼 중요합니다. 이후의 종교개혁가들은 루터의 글을 수정하고 보완하는 일에 치중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종교개혁을 신학적으로 대부분 완성했다고 말할 수 있는 칼뱅조차도 루터의 저작을 참고하고 보완했을 뿐 창의적으로 만들어낸 저술 활동은 거의 없었습니다. 이처럼 루터가 종교개혁에 미친 영향력이 막강했습니다. 루터의 신학은 ‘이신칭의’로 정의될 수 있습니다. 루터의 이신칭의는 성경 해석학, 만민제사장론, 인간의 의지에 대한 주장들에 녹아있습니다. 인간의 제도나 공로가 아닌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적 사역을 통해 인간은 오직 믿음으로 반응하여 ‘의’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루터는 ‘이신칭의’에 대한 논문은 쓰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이신칭의가 루터의 주된 신학적 논제인 이유는 그의 모든 주장과 논문들에 깊이 스며있기 때문입니다. 이신칭의가 가장 뚜렷이 드러난 저술들은 <로마서 서문> <갈라디아서 주석> <노예 의지론> <하이델베르크 논제>들입니다. 다른 저술들에서도 ‘이신칭의’는 여전히 중요합니다. 


오늘은 루터의 가장 중요한 논문 중의 하나님 <노예 의지론>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다음 시간에는 대사회적 논문인 <세속권세>를 살펴보고 루터는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노예 의지론>은 종교개혁사상가들이 가진 인간 본성에 대한 토대이며, 전제입니다. 반면 <세속권세>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속권세에 대해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가를 말합니다. <노예 의지론>은 보름스 회의를 통해 루터는 공식적인 종교개혁의 길을 걷게 됩니다. 살해의 위협 때문에 프리드리히 선제후는 루터를 바르트부르크 성에 숨겨 둡니다. 이때 에라스무스는 주변 무리의 충동 때문에 반강제적으로 루터의 종교개혁을 반대하는 <자유의지에 관하여>(1524,9)를 출간하게 됩니다. 아마 에라스뮈스가 이 논문을 쓰지 않았다면 루터와 죽을 때까지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을 것입니다. 루터는 에라스뮈스의 논문을 읽고 격분했고, 완전히 결별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일 년 후인 1525년 12월 <노예 의지론>을 발표하게 됩니다. 1524-5년 폭풍의 시기였습니다. 1522년과 1523년에는 ‘기사들이 반란’ 1524년의 재침례파와 연계된 ‘농민반란’이 일어나 폭력이 창궐하는 사태가 발생하게 됩니다. 농민 반란은 몇 번에 걸쳐 일어났지만 1524-5년에 일어난 반란은 이전 반란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격렬했습니다. 루터의 <노예 의지론>은 인간에 대한 루터의 고민이자 고뇌의 결과로 볼 수 있습니다. 


2. 간략한 요약


“인간의 의지에 관하여 말할 때 그것은 하나님과 마귀 사이에 서 있어 짐을 지는 짐승과 같아서 하나님이나 마귀가 그 짐승을 올라타거나 `소유'하거나 `탈'수 있어서 짐승은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된다.”(Of the human will, which stands like a beast of burden between God and the devil; either can mount, and `possess' or `ride' it; it has to obey.) 


기독교에 있어서 확신에 찬 주장들의 필요성에 대하여


먼저 나는 우리의 주장을 훼손하고 당신 자신의 주장을 아름답게 장식한 서문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스도인이 확신에 찬 주장을 하지 않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회의론자들과 학구파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사귐에 들어올 수 없다. 그리스도인은 사람들 앞에서 그리스도를 시인해야 한다.(마 10:32) 확신은 성령으로 인해 주어진 것이다. 확신을 버리는 것은 곧 신앙을 버리는 것이다. 당신은 ‘자유의지’의 문제뿐 아니라 성경의 권위와 교회의 결정에 대해서도 회의론적으로 대한다. 당신은 세상이 평온하기만 하다면 무엇을 믿고 따르든 상관없다는 것이다. 당신은 앞으로 그런 식으로 글을 써서는 안 된다. 성령은 회의론자가 아니며, 우리 마음에 새긴 것들은 생명보다 확실한 것들이다.


성령의 명확성에 대하여


당신은 기독교의 교리를 두 부류로 나누고 한 부류는 알아야하고 다른 하나는 알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어떤 것들은 난해하고, 어떤 것들은 분명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아버지는 아시며,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고 했다. 즉 아버지 안에서 모든 것은 계시된다. 당신들은 극소수의 모호한 단어 때문에 성경이 모호하다고 말한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이해력을 허락하시어 우리는 성경을 이해할 수 있고, 복음은 만민에게 전파되고 있다.


나는 많은 부분에서 성경이 모호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성경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진리를 보지 않으려는 완악한 마음 때문이다. 수건이 오히려 그들의 마음을 덮은 것이다.(고후 3:15) 드러나 빛에 거하지 않으면서 자신이 마음의 어둠을 탓하지 않고 성경을 탓하는 것은 신성모독적이다. 


‘자유의지’가 어떤 권능을 갖고 있는가를 아는 것의 중요성


당신은 자유의지를 쓸데없는 교리들로 치부한다. 하나님은 사랑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기만하면 되고, 그리스도인의 경건이 그리스도 없이도 가능하다고 말한다. 당신은 말한다. 우리 안에 힘이 있다. 우리의 노력으로 존재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노력에 자비를 베풀어 주실 것이다. 그런데 당신이 말하는 ‘힘’ ‘노력하는 것’은 무엇인가? 당신은 마치 눈과 귀를 막고 ‘전쟁이다’ 만을 외치고 돌진하는 사람과 같다. 당신 자신이 말하는 ‘힘’과 ‘노력하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정의하지도 못했고, 확신하지도 못하고 있다. 


하나님의 미리 아심의 필연성에 대해


하나님은 이미 아시고 모든 것을 아신다. 하나님은 우발적으로 미리 아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은 변치 않고 영원하고 한 치도 어긋남이 없는 뜻에 따라 모든 것들을 미리 아시고 행하신다. 이 폭탄은 ‘자유 의지’를 납작코로 만드신다. 당신 에라스무스는 하나님은 변함없이 의로우시며 자애로우시다고 말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은 제외시킨다. 하나님의 지식,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선하심, 하나님의 뜻에도 적용해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당신은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다는 말을 부정하는 모순에 빠져있다. 하나님은 왜 미리 모든 것을 아신다는 것이 모순인가? 하나님은 변하지 않는다면서 어떻게 미리 아심을 부정할 수 있는가. 


하나님이 어떤 것을 뜻한다면, 그것은 존재할 수밖에 없다. 당신은 모든 것들이 결과의 필연에 의해 일어난다고 말한다. 즉 일어났기 때문에 필연이라고 말한다. 일어남은 물질 자체의 본성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결과에서 필연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필연에서 결과가 나온다. 하나님은 ‘나의 모략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사 46:10)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지고, 하나님이 뜻하시면 이루어진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필연화 시키는 것을 아는 것의 중요성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예정하십니다. 그러므로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이며, 그것은 필연적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뜻이므로, 필연이다. 구원은 필연적이며, 불가항력적이다. 하나님은 약속하심으로 그것을 이루신다. 하나님의 뜻은 변함 없어야하고,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하나님은 참되시고, 신실하시고, 전능하시다. 그러므로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필연적이다. 하나님의 구원을 우발적이라 주장하는 궤변자들이여, 그것은 신성모독이 아니고 무엇인가.


은혜 없이 아무런 권능도 지니지 못하는 의지는 자유롭지 않다.


당신이 확신에 찬 주장을 하고 있는 ‘자유 의지’이 거짓임을 드러내고자 한다. 당신은 분명히 자유 의지의 권능이 작고 하나님의 은혜와 동떨어져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런 ‘자유 의지’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묻는다. 당신의 논리에 의하면 자유 의지가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져 있다면, 그 의지로 행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행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는 자유의지는 결코 선하지도 자유롭지 않다. 그 의지는 악의 죄수이자 노예이다. 자유 의지는 결코 선을 행할 수 없다. 그런데 자유 의지에 권능과 행할 능력이 있다고 말한다. 이것이야말로 궤변이 아닌가.


설교된 하나님과 설교되지 않은 하나님, 계시된 의지와 은밀한 의지


하나님의 계시는 모두에게 허용된다. 그러나 일부는 받고 일부는 부정한다. 왜일까? 하나님은 자신의 계획에 따라 기뻐하시는 자들에게 설교되고, 제공된 자비를 받고, 참여하도록 허락하시기 때문이다. 의지야 말로 가장 신비롭고 탐구되어야할 비밀이다. 하나님은 그것을 감추시고 숨기신다. 하나님께 드러내시고, 보이시지 않은 것을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런데 <자유의지론>은 하나님이 드러낸 것과 숨기신 것을 구별하지 못함으로 스스로 무지에 빠져있다. 우리는 드러나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하나님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인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지 우리의 의지가 아니다.


사람을 강퍅하게 하는 하나님


악인은 오직 자신과 자기 자신의 것에만 몰두 한다.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하나님의 것들에 관심도 없다. 그들은 미쳐 날뛰며 격노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복음에 대항하여 하나님의 격노이다. 그들은 본성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하기 위해 애굽의 바로를 공격할 때 바로는 포악해지고 강퍅해졌다. 이처럼 복음이 거듭나지 못한 이들에게 들어갈 때 그들은 즉각적으로 포악하고 강퍅해진다. 격노하며 교만으로 부풀어 오른다. 하나님은 그들의 교만과 강퍅을 통해 일하시고,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신다. 


바로를 강퍅하게 하신 것에 대해


하나님을 떠난 이들은 바로처럼 그 본성을 따라 강퍅하다. 그는 자신의 본성의 교만으로 초라하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모세를 무시하고 조롱한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행위는 그의 악한 교만에 압박을 가하시고, 그는 계속하여 마음을 높이고 강퍅하게 한다. 그는 사단에게 붙잡혀있고, 스스로 미쳐 날뛰는 것처럼 보인다. 그 안에서 악한 의지가 격동하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은혜가 없는 ‘자유 의지’는 악 외에는 아무 것도할 수 없음을 확증해 준다.


구원은 ‘자유 의지’에 의존하지 않는다.


마귀에 속한 자유의지가 어떻게 구원을 이루겠는가. 구원은 사람의 영혼을 사단의 손에서 빼앗아 오는 것이다.(요 10:28-29)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무너뜨리고 파괴하신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한다. 오직 아버지의 사랑과 용서만이 죄인들을 치유하고 회복한다.


사람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믿음


인간의 필연은 하나님의 저주 가운데 멸망 받는 것이다. 그런 인간에게 하나님의 자비는 어떻게 이르는가.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하다. 하나님의 공의는 인간의 헤아림으로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은 헤아릴 수 없다. 그렇다면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의 지혜와 능력, 힘과 권세는 하나님의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인간의 가진 것들은 하나님께 불의이고, 조롱거리 밖에 되지 않는다. 인간의 이성으로 하나님은 불의하며, 하나님은 악하다고 판단하게 된다. 세상은 결국 결과를 필연으로 가장하고 그것을 따르게 된다. 


이제 결론을 내려 보자. 자연의 빛, 은혜의 빛, 영광의 빛. 자연의 빛을 통해 선한 자들이 고통 받고, 악한 자들이 번성하는 것이 공의인 것을 증명할 수 없다. 그러나 은혜의 빛은 이것을 설명한다. 공의의 빛은 하나님의 의와 공의를 분명히 드러내실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들을 미리 아시고, 예정하신다. 하나님은 미리 아심을 통해 속임을 당하지 않고 방해를 받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자신의 뜻 가운데 행하신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 필연 속에서 일어난다. 그러므로 사람이나 천사나 그 어떤 피조물 속에 ‘자유 의지’란 존재하지 않는다. 


3. 나가면서


루터의 <노예 의지론>은 중세의 전통 속에서 이단적이며 혁명적인 사건입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기이한 것은 루터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성경해석법과 철학 등은 인문주의입니다. 인문주의는 철저히 이성과 인간의 합리성의 토대 아래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루터는 철저하게 신본적이며, 믿음에 의한 칭의를 주장합니다. 루터가 인문주의와 결별하거나 배제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철저하게 그것을 이용했고, 인문주의적 사고 아래에서 자신의 논문과 종교개혁의 방향을 잡아 나갔습니다. 루터의 ‘이신칭의’와 ‘노예의지론’은 치밀한 논리와 사고 체계를 통해 전개해 나갑니다. 그럼에도 결국 하나님의 예정 속에 그 모든 것을 종속시키고 있습니다.


루터의 <노예 의지론>은 종교개혁시기라는 시대적 상황 안에서 읽어야 합니다. 루터의 주장은 행위로 인해 ‘의’를 회득하려는 중세교회의 타락한 신학을 반격하기 위한 변증입니다. 그로인해 거듭한 이들의 마땅히 행해야할 의무들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루터의 대를 이은 칼뱅은 루터가 누락시킨 성령론과 성화론을 신학의 중요한 화두로 삼게 됩니다. 인간의 전적 타락으로 인해 ‘선’을 삶으로 드러내지 못한다면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선을 행할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은 칼뱅에 가서야 완성되게 됩니다. 이제 다음 시간에 <세속권세>를 살펴보고 루터는 마무리 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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