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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철학 / 헤르만 바빙크 / 박재은 옮김 / 다함

샤마임 2019. 10.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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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철학 

헤르만 바빙크 / 박재은 옮김 / 다함

 

 

[갓피플몰] 계시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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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바빙크는 진중하고 치밀하다. 화란 개혁주의 신학은 헤르만 리델보스의 <바울 신학>이 처음이었던 것 같다. 신학을 이제 시작한 마당에 무지막지한 책을 읽었으니 아직도 아찔하다. 지적 갈망을 이기지 못하고 헤르만 바빙크의 <신론>을 들고 읽었다. 성경에 대한 목마름은 성경을 가장 잘 정리한 조직신학을 욕망하게 되었고, 결국 바빙크의 책을 읽기 시작했다. 바빙크의 두 번째 책은 당연히 <하나님의 큰일>이었다. 아직도 그 책을 다 읽었을 때 느낌이 선명하다. 내용은 거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저자가 천재라는 것은 분명했다. 한 구절, 한 문장을 써 내려갈 때마다 성경 곳곳에서 합당한 구절을 찾아 근거로 제시했다. 책의 절반 이상이 아래와 같은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하나님, 곧 아버지와 아들과는 구별될지라도, 그는 두 분과 가장 깊은 교통 가운데 있다. 그는 전능자의 기운(욥 33:4), 그의 입의 영(시 33:6)이라 불리고 아버지와 아들의 보내심을 받았으면 (요 14:26; 15:26), 두 분으로부터 나왔으니, 곧 아버지뿐만 아니라 (요 15:26) 아들로부터 나왔다. 이는 그가 기꺼이 아버지의 영으로서 그리스도의 영 혹은 아들의 영이라 불리기까지 하기 때문이다.(롬 8:9)”(<하나님의 큰 일> 중에서)

 

바빙크의 글은 철저하게 성경적이고, 성경에서 가져왔고, 성경으로 돌아간다. 그는 단 한 문장도 허투르게 말하지 않는다. 한 구절이나 적은 내용을 파고 또 파고 들어갔던 청교도들과 전혀 다르게, 바빙크는 몇 문장 안에서도 성경 전반에 흐르는 중요한 구절들이 촘촘히 박혀있다. 최근에야 성경 프로그램들이 발달하여 적은 노력으로도 많은 성과를 얻을 수 있지만, 바빙크가 살았던 19세기 말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성경을 읽어 나가면서 주제별로 구절을 나누고, 주해하여 마침내 적당한 구절을 명료하게 분류한 뒤에야 가능하다. 바빙크의 성경을 책을 직접 보지 않았지만, 아마도 그의 성경책은 닳고 또 닳아 더 글이 보이지 않을 만큼 되었을 것이다. 그것도 수십 권의 성경책이 말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런 글이 나올 수는 없는 것이다.

 

바빙크의 <계시 철학>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기대와 걱정이 동시에 찾아 들었다. 헤르만 바빙크를 사랑하는 독자들이라면 한국 내에 바빙크의 책이 얼마나 미미한지 알 수 있다. 인터넷 서점에 들어가 ‘헤르만 바빙크’로 검색하면 다른 출판사에서 중복으로 번역한 책을 모두 합해도 한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는다. <하나님의 큰일> <개혁주의 신론>이 출간된 후 바빙크의 책은 찾아보기도 힘들었다. 그러다 2011년 부흥과개혁사에서 <신론>을 포함하여 4권으로 된 <개혁 교의학> 전집을 출간했다. 그 외의 책은 2017년 도서출판 100에서 출간한 <교회의 분열에 맞서>와 허동원의 번역으로 우리 시대에서 출간된 <믿음의 확실성>이 고작이다. 나머지는 동일한 책을 다른 번역자가 번역 출간된 책들이다. 한두 권밖에 번역되지 않은 다른 저자에 비한다면 많을 수 있겠지만 3대 칼뱅주의 신학자요, 화란 개혁주의 학자라는 타이틀을 가진 바빙크로서는 너무나 초라하다. 바빙크의 새로운 책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은 바빙크를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이른 비와 같은 즐거움을 선사한다. 그러나 ‘철학’이라는 말은 왠지 그에게 어울릴 것 같지 않다는 걱정이 드는 것은 나만의 기우일지 모른다. 기대감과 걱정으로 책을 읽을 나가면서 역시 ‘기우’인 것을 확인했다. 실제로 이 책은 1985년 위거찬에 의해 성광문화사에서 <계시 철학>이라는 동명으로 출간되었다. 노련한 박재은 교수의 손에 의해 번역되어 다시 들려졌으니 번역은 더욱 명료하고 선명하다. 이 어찌 행복하지 않을까.

 

‘최근 들어 헤르만 바빙크에 대한 연구가 날개를 달았다.’고 한다. 이 책은 1908~1909년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바빙크가 강의했던 강의안을 수정 보완한 것이다. 후에 책으로 출간되었다. 그러다 2018년 다시 코르 브록과 나다니엘 수탄토의 두 사람에 의해 교정과 각주 해설 등을 추가하여 재번역하여 출간한다. 총신대의 박재은 교수가 영어로 번역된 것을 한글로는 최초로 번역하기에 이른 것이다. 한국의 외진 시골에 있는 필자로서는 ‘바빙크에 대한 연구가 날개를 달았다’는 표현을 잘 이해할 수 없지만, 분명 가치 있는 것임은 틀림없다고 본다. 우리는 성경학자인 바빙크가 ‘철학’을 언급해야 했고, 철학의 위치와 정체성을 보수신학자로서 재정립해야 했는가를 고찰할 필요가 있다.

 

바빙크가 살았던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는 격변의 시기였다. 철학적으로는 근대의 종말과 함께 실존주의 철학이 서서히 철학의 주류를 이루기 시작한다. 신학은 자유주의 신학의 절정과 동시에 종말이 서서히 대지에 내리고 있었다. 일반 학문은 신학의 종속에서 급하게 벗어나 자신의 길을 힘있게 걸어 나갔다. 전제주의 종말과 함께 근대정신은 무너져 내렸다. 새로운 주석 판 서문에서 번역자는 ‘낭만주의 초기 운동의 창조적 감각에로의 참여’(41쪽) 로 표현한다. 합리적 지성체계가 무너지고, 상대주의적 감성과 개별적 문명이란 키워드가 세상을 지배하기 위해 움트고 있었다. 바빙크는 이러한 시대적 사조를 미리 간파하듯 계시와 철학의 관계를 정리하고 있다.

 

헤르만 바빙크가 살았던 시대는 네덜란드 교회도 분리와 통합이 이루어지는 시대였다. 종교개혁시기에 생겨난 개혁주의 교단은 ‘헤르포름드 교단’(Nederlands Hervormde Kerk)이다. 그러다 1834년 일부의 목사들이 교단의 타락을 지적하며 새로운 교단인 ‘기독분리개혁교회’(Christian Separated Reformed Church)를 세우게 된다. 이 교단에서 세운 신학교가 바로 캄펀(Kampen) 신학교이다. 그러다 다시 1886년 아브라함 카이퍼를 위시한 많은 목사들이 네덜란드 주 교단인 '헤르포름드 교단'을 탈퇴하여 먼저 탈퇴한 교단과 합동하여 새로운 교단을 만들게 된다. 이 교단을 ‘화란 개혁교회’(Reformed Churches in Netherlands)로 부른다. 그러나 아브라함 카이퍼의 신학을 신뢰하지 못해 '합동'하지 않은 남겨진 교회들은 '기독 개혁교회’(Christian Reformed Churches in Netherlands)로 개명하게 된다. 이들은 아펄도른(Appeldoorn)에 신학교를 세운다. 헤르만 바빙크는 ‘화란 개혁교회’(Reformed Churches in Netherlands) 소속으로 아브라함 카이퍼의 대를 이어 캄펜신학교에서 강의하고 후에는 자유 대학교에서 교의학을 강의한다. 교단의 정체성으로 말하면 네덜란드의 국교회와 같은 헤르포름드 교단보다는 개혁적이고, 극단적으로 보수적인 ‘기독 개혁교회’보다는 진보적이다.

 

이 책은 1908~1909년 미국 프린스턴의 스톤 강연을 문서화시켜 책으로 출간한 것이다. 당시 사회는 근대주의가 파괴되고 실존주의(Existentialisme)가 머리를 들기 시작할 때이다. 신학적으로는 독일을 중심으로 고등비평이 쓰나미처럼 신학의 섬을 뒤엎을 기세로 밀려왔다. 프린스턴을 중심으로 미국의 보수주의 신학교는 성경의 무오류성을 변증하기 위해 몸부림을 쳤다.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B. B. 워필드(B. B. Warfield, 1851~1921), G. 보스(Geerhardus Vos, 1862~1949), G. 메이첸(Gresham Machen, 1881~1937) 등이 그들이다. 이곳에서 헤르만 바빙큰 ‘오직 성경으로만’ 변증하지 않고, 계시와 철학의 문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변증법적 평가를 시도한다.

 

모두 10장으로 되어 있으며, 1-3장은 ‘계시와 철학’의 관계를 다룹니다. 본론에 해당되는 4-9장까지는 계시와 자연, 역사, 종교, 기독교, 종교경험, 문화 등을 비교하며 분석한다. 결론부에 해당되는 10장에서는 계시와 미래라는 제목으로 잘못된 미래관을 비판하고 신적 계시로 돌아가야 할 것을 당부한다. 필자는 ‘계시와 철학’ ‘계시와 자연’을 개략적으로 요약 비평하고 마지막으로 총평하고자 한다.

계시와 철학의 관계

범-바벨론 세계관으로부터 시작하는 논증은 계시의 독특성을 확고하게 붙들려 하는 바빙크의 확고함이 엿보인다. 계시와 문명은 언제나 초월과 내재 사이에 갈등하며 긴장 관계를 유지해왔다. 바빙크는 ‘기독교만의 정신으로 옛 세상을 정복하고 감화시킴을 통해 발전’(63쪽)되었다고 믿는다. 종교개혁을 자연과 은혜의 관계를 기계적이 아닌 역동적이고 윤리적 관점으로 변혁시킨 사건으로 본다. 그럼에도 종교 개혁가들은 초월적 세계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하지만 인문학적 성향을 다분히 가진 종교개혁 사상은 계몽주의로 이끌었고, 18세기가 되자 초자연적 개념을 버리게 된다. 계몽주의의 등장과 진화론의 시작은 초월의 부재, 계시에 대한 무관심에서 일어난 것이다.

 

진화론은 계몽주의에 더하여 인간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 없는 자발적 진화가 가능하다고 넌지시 조언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르낭이 ‘초자연적인 것은 없다’(77쪽)고 선언한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모든 것은 오직 물질만 있게 된다. 허무와 물화만이 19세기 말과 20세기를 지배한다. 그러나 20세기 들어서자 물신론은 무너지고 다시 범신론이 생기를 찾는다. 바빙크는 에리우게나와 스피노자와 같은 범신론자들의 등장을 ‘헤겔의 체계에서 이미 구현된 범신론적 세계-개념의 재탕에 불과하다’(80쪽)도 평가한다. 하나님은 초월해 계시지만 동시에 내재하신다. 계시는 신학의 토대일 뿐 아니라 계시 철학의 시작이다.

 

“역사 철학, 예술 철학, 그 외의 다양한 철학들처럼, 계시 철학도 그 시작을 반드시 그것 자체의 대상 즉 계시로부터 시작해야 한다.”(92쪽)

 

계시가 전제되지 않은 철학은 뿌리가 없는 나무와 같으며, 계시 철학은 철학이 아닌 계시가 전제되고 선행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바빙크의 철학에 대한 해석은 그가 철저한 기독교 신학자이며, 칼뱅주의자인 것을 드러낸다. 더 나아가 철학 함의 주체인 자아를 ‘합성’이 아닌 ‘현실적 존재와 이상적 존재의 통일 그 자체’(157쪽)로 본다. 또한 자신의 구원을 두렵고 떨림으로 이룰 수 있는 존재인 동시에 자신을 파괴하고 황폐화시킬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자아는 ‘현재 그 존재 자체인 동시에 되어가고 자라나는 존재’(159쪽)인 것이다. 바빙크의 자아관은 자아 자체가 불가피하게 피동적이고 의존적 존재라고 말함으로 철학의 기저가 불완전하다는 것을 폭로한다. 철학이 온전하기 위해서는 외부적 계시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계시는 존재의 전제인 동시에 존재의 방식으로 작용한다.

 

계시와 자연과의 관계

 

세상은 하나님과 ‘분리된 채로 존재할 수 없’(194쪽)다. 바빙크는 이 점을 명확히한다. 세상에 하나님의 지식이 충만하기 때문에 자연을 알고 연구하는 것은 영생으로 가는 길이 된다. 과학 함으로 하나님에 대해 알아가는 것은 정당하지만, 자연과학은 모든 것을 증명할 수 없으며, 제한된 영역에서만 자유롭다. 과학은 필연적으로 제한적이며 한계를 갖는다. 모든 물질의 움직임과 존재 방식을 밝혀낸다 해도 본질에 대한 수수께끼는 풀 수 없기 때문이다. 자연의 법칙 또한 그것을 세운 초월적 존재이신 ‘입법자인 하나님’(214쪽) 전제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자연에 대항했던 존재로서의 인간이든, 범신론에 빠져 자연과의 일체를 구하는 인간이든 결국 자연 너머의 초월적 존재를 알지 못한다면 무의미로 전락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바빙크는 ‘하나님과 참된 관계에 있는 인간만이 자연과 참되고 자유로운 관계를 얻을 수 있다’(220쪽)고 선언한다. 결국 자연조차도 ‘계시에 근거해 존재’(221쪽)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바빙크는 자연은 경배의 대상도 아니며, 무시해야 할 존재도 아니라고 말한다. 자연은 계시를 통해 온전해진다.

 

나가면서

 계시는 모든 것의 존재를 밝히고, 존재의 전제이다. 그 부분은 이후에 이어지는 ‘계시와 역사’ ‘계시와 종교’ ‘계시와 종교 경험’ ‘계시와 문화’를 통해서 재차 언급된다. 계시는 존재의 뿌리이다. 바빙크는 계시를 통해 모든 것이 바르게 규명되며, 이해될 수 있다고 말한다. 계시를 떠나 인간 자신에게 함몰된 자력 구원이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 오직 계시만이 인간에 관계된 모든 것을 바르게 밝혀 준다. 계시를 떠나 ‘자율적 인간’을 전제로 만들어낸 학문과 문화, 과학과 철학은 뿌리가 잘린 나무와 같다.

 

초월성을 무시하고 내재성만을 추구했던 시대적 상황 속에서 바빙크는 당당히 초월로서의 계시를 주장한다. 초월이 사라진 내재는 물신론과 범신론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를 이마누엘 칸트가 형이상학을 추방했기 때문으로 보았다. 계시가 사라진 교회는 성장과 현시적 축복에 함몰되었고, 형이상학이 사라진 철학은 모든 것을 물화(物化) 시켜 인간의 정신을 도태시킨다. 실존주의와 사회주의가 친구처럼 20세기를 지배했던 이유는 초월이 사라지고, 계시가 무시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철저히 영적인 존재인 인간은 존재 이유를 찾고자 신비주의를 추구했고, 교회는 오순절 운동에 휩쓸리게 된다. 바빙크는 이 일들이 일어나기 직전 모든 것을 간파했고, 계시만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책 <계시 철학>은 교회가 돌아가야 할 근원적 자리, 또는 관점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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