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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e Note/성경개론

[성경개론] 구약 역사 7. 포로․재건시대(B.C. 586-420?)

by 하늘땅소망 2020. 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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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개론] 구약 역사 7. 포로재건시대(B.C. 586-420?)


7. 포로재건시대(B.C. 586-420?)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기원전 722년에 멸망을 당합니다. 앗수르는 신바벨론에의해 멸망을 당합니다. 바벨론은 기세를 몰아 애굽을 평정하고 레반트 지역을 점령해 나갑니다. 결국 남유다도 기원전 586년 신흥 바벨론에 의해 멸망을 당합니다. 포로기의 시작은 정확하게 남유다가 멸망한 기전원 586년이 아닙니다. 포로기를 세 번에 결쳐 이루어지며 결국 최종적으로 586년에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면서 유다는 나라로서의 모든 기능을 상실하고 포로의 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곳에서는 예루살렘 멸망 전후로부터 시작하여 말라기 선지자가 활동했던 마지막 시간까지를 간략하게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구약의 7시대 구분

1. 창조시대(B.C. ?-2200?)

2. 족장시대(B.C. 2200?-1847)

3. 광야시대(B.C. 1580?-1400?)

4. 사사시대(B.C. 1400-1050)

5. 통일왕국시대(B.C. 1050-931)

6. 분열왕국시대(B.C. 931-586)

1) 분열왕국시대(B.C. 931-840)

2) 분열왕국시대(B.C. 840-722)

3) 분열왕국시대(B.C. 722-586)

7. 포로시대(B.C. 586-420?)


7.1. 포로재건시대 개요

포로 재건 시기는 두 시대로 명확하게 구분하기는 힘들지만 대체로 구분할 필요는 있습니다. 비록 예루살렘 멸망이 기원전 586년에 이루어지기 했지만 포로의 시작은 그 이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은 예루살렘으로 쳐들어와 멸망 시기키 전에 식민지로 삼고 포로들을 잡아갔습니다. 유다 멸망 이후에도 모든 사람들이 바벨론에 끌려 간 것이 아닙니다. 왕과 귀족, 관리들 중심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갔고 일반 백성들의 대부분은 그대로 남겨져 있었습니다. 이들은 후에 주변 나라들에게서 온 이방 민족들과 결합하여 새로운 세력을 형성하게 됩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서를 읽어보면 이방세력들이 예루살렘에 깊게 뿌리 내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포로 이후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지낸 생활은 성경에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만 다니엘서와 에스더서를 통해 일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은 바벨론으로 잡혀가 노예로 살거나, 다니엘과 같은 일부의 사람들은 정치에 관여하기도 합니다. 또한 시간이 지나면서 터전을 잡고 생활하는 이들이 늘어납니다. 바벨론이 메대-바사(페르시아)에 의해 멸망당합니다. 바사 왕 고레스는 나라가 어느 정도 안정이 되자 곧바로 포로들을 귀환시킵니다. 바벨론이 억압 정책을 폈다면 바사는 융합 정책을 통해 광대한 나라를 통치했습니다.

포로 귀환은 자원자에 한하여 세 차례 이루어집니다. 예루살렘을 돌아온 유대인들은 성전을 건축하고, 율법을 문자적으로 지키려는 에스라와 느헤미야를 통해 일어납니다. 이방민족과 결혼한 사람들을 제사장의 자격에서 박탈시키는 등 개혁을 일으키지만 결국 유대는 포로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말라기서를 끝으로 구약 속의 예언은 끊기고 제2성전기로 불리는 신구약 중간기로 접어들게 됩니다. 이곳에서는 말라기 선지자까지의 과정을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합니다.

7.2 예루살렘 멸망과 포로

애굽과 앗수르 사이에 끼어있는 이스라엘은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운명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앗수르가 강하면 앗수르의 지배를 받아야했고, 애굽이 강하면 애굽의 지배를 받아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안에서는 친앗수르파와 친애굽파가 항상 갈등을 낳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왕들은 애굽과 앗수르 사이에서 선택의 기로에서 갈등합니다. 그런데 앗수르는 신흥 바벨론에 의해 완전히 패배 당하고 새로운 열강의 패권(霸權)국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이스라엘로서는 앗수르가 바벨론으로 바뀔 뿐 나아진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바벨론이 힘을 과시하기 위해 이스라엘을 쳐들어옵니다. 포로 시기는 3차에 걸쳐 일어납니다.

1차 포로 시기(B.C. 605?)

최초의 포로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B.C. 605-562)에 의해 일어납니다. 43년이라는 짧지 않는 통치 기간 동안 느부갓네살은 바벨론을 세계 최대 최강의 나라로 만듭니다. 바벨론은 70년 정도의 극히 짧은 기간 동안 존재했지만 성경 전반에 걸쳐 강력한 이미지를 심을 정도로 강하고 위대했습니다. 속속 발견되는 바벨론 왕국의 화려함은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눈으로도 눈부실 정도입니다. 그러나 느부갓네살 이후 바벨론은 급속하게 위축되어 결국 메대-파사(성경의 바사) 연합군에 의해 멸망당하고 맙니다. 

605년 느부갓네살은 왕이 된 후 애굽 정벌에 나섭니다. 갈그미스 평야에서 애굽 군대와 맞붙어 싸웁니다. 이것을 2차 갈그미스 전쟁이라 부릅니다. 1차 갈그미스는 그의 선왕 나보폴라살이 갈그미스에서 애굽과 전쟁을 말합니다.(609) 애굽을 격파한 느부갓네살은 곧바로 바벨론으로 돌아가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내려와 많은 포로들을 끌고 돌아갑니다. 이때 여호야김의 아들 여고냐와 유다 고관들과 목공들과 철공들을 데리고 갑니다.(렘 24:1) 이 때 다니엘과 세 친구인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도 끌려 갑니다. 후에 다니엘은 벨드사살, 하나냐는 사드락, 미사엘은 메삭, 아사랴는 아벳느고로 개명합니다.(단 1:1-7)

2차 포로시기(B.C. 597)

왕하 24:8-16, 대하 36:9-10

2차 포로는 여호야긴 왕 때 일어납니다. 고작 18세에 왕이 되었지만 석 달 동안만 통치하다 포로로 바벨론에 끌려갑니다. 바벨론은 왕은 동일한 느부갓네살 왕이었습니다. 바벨론은 예루살렘 성전의 모든 보물과 왕궁의 보물을 가져가고, 솔로몬이 만든 성전의 금 그릇을 파괴합니다. 예루살렘에 거하는 많은 사람과 지도자, 군사들과 장인들을 데리고 떠나랍니다. 2차 포로 시기는 유다의 생존의 위태로울 만큼 치명적이었습니다. 느부갓네살은 여호야긴을 잡아가고 그의 숙부 맛다니야를 왕으로 삼습니다. 맛다니야는 이름을 시드기야로 고쳐 부릅니다.

2차 포로기에 여호야긴을 포함하여 에스겔서를 기록한 에스겔 선지자(제사장이었다)를 잡아 갑니다. 에스겔은 유다가 바벨론에 포로가 된 것은 하나님께서 약하기 때문에 그들의 죄를 하나님께서 징벌하기 위함이라고 예언합니다. 에스겔서의 초중반은 유다백성들의 수많은 죄악들을 열거합니다.

3차 포로시기(B.C. 586)

왕하 24:17-25:21, 대하 36:11-12, 39:1-10

포로기를 70년으로 계산하는 것은 기원전 605년 바벨론의 1차 예루살렘 공격으로부터 시작해야합니다. 539년 바벨론이 멸망할 때가지는 정확하게 70년이 채워지지 않습니다. 66년 정도의 기간을 성경은 계속하여 70년을 이야기합니다. 구약의 저자들은 포로 기간을 성전이 파괴된 기원전 586년과 재건된 515년을 70년으로 잡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엄밀하게 바벨론이 멸망하고 바사 고레스 왕에 의해 예루살렘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포로 기간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는 계속하여 바벨론-바사(페르시아)-헬라 제국에 의해 식민지로 남기 때문입니다.

7.3 바벨론에서의 생활

다니엘 에스겔 에스더

포로기의 상황을 그려낸 성경은 에스겔과 다니엘, 그리고 에스더가 가장 중요한 내용들을 담고 있습니다. 에스겔은 회개에 대한 촉구와 환상으로 채워져 있어서 포로기의 정서는 담고 있으나 실제적인 상황은 모호합니다. 다니엘서는 귀족의 자녀들로 바벨론에 잡혀가 바벨론의 관원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일반 평민의 이야기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포로 생활을 읽어 낼 수 있습니다. 에스더서는 바사(페르시아)를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지 않고 바사에 남아 있던 유대인들의 이야기를 단편적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포로기의 상황을 그려낸 성경은 에스겔과 다니엘, 그리고 에스더가 가장 중요한 내용들을 담고 있습니다. 에스겔은 회개에 대한 촉구와 환상으로 채워져 있어서 포로기의 정서는 담고 있으나 실제적인 상황은 모호합니다. 다니엘서는 귀족의 자녀들로 바벨론에 잡혀가 바벨론의 관원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일반 평민의 이야기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포로 생활을 읽어 낼 수 있습니다. 에스더서는 바사(페르시아)를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지 않고 바사에 남아 있던 유대인들의 이야기를 단편적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1차 포로였던 다니엘의 삶은 일반 포로들과는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귀족이었고, 바벨론에서 일반 평민이 아닌 관리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바벨론의 특징들을 몇 가지로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비록 그들은 포로들이었지만 학대를 받거나 심각한 통제를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부분은 다니엘서와 에스더서를 통해 추론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바벨론과 이후 바사에서도 직업을 가지고 있었고, 정치에서도 어느 정도 참여했습니다.

바벨론을 그린 상상화

바벨론에 끌려온 유대인들은 순수한 유대인은 아니지만 일정한 공간에서 자유를 가지고 마을을 형성하고 터전을 잡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촌락이 형성되고, 마을의 장로들이 존재하고, 어느 정도의 치안도 가능했습니다. 물론 자기의 집도 소유했습니다. 관리뿐 아니라 상업도 가능했습니다. 즉 권력과 재산을 소유하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들은 후에 포로에서 돌아올때 많은 재산을 가진 이들과 권력을 지닌 이들이 쉽게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발목을 잡게 됩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에서 많은 귀한 자들의 이름이 기록된 것을 발견합니다. 그들이 터전을 닦은 바벨론의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다시 예루살렘을 회복하기 헌신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으로 보입니다.

바벨론 포로기는 단순히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인한 삶의 터전이 붕괴된 것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예루살렘을 우주의 중심을 알고, 솔로몬 성전이 최고의 성전으로 알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커다른 충격을 주었습니다. 당시 바벨론의 궁전과 신전들은 예루살렘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거대하고 화려했습니다. 또한 여호와 하나님이 바벨론의 마르둑보다 약하다는 신학적 왜곡 현상이 일어납니다. 바로 이러한 오해를 바로 잡기 위해 에스겔는 이스라엘의 죄를 지적합니다. 이스라엘에 멸망 당하고 포로가 된 것은 여호와가 약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죄를 지었기 때문임을 밝힙니다.

바벨론의 하늘정원

이슈타르 신전 입구


7.4. 포로 귀환

에스라 느헤미야 학개 스라갸 말라기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는 포로 후 예루살렘 재건에 대한 실제적인 이야기들을 들려줍니다. 학개는 성전 건축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사건을 들려줍니다. 화려했던 바벨론은 순식간에 멸망합니다. 사치하고 게으른 왕은 결국 선조가 물려준 자리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메사-파사 연합군에 의해 조금씩 금이 가던 바벨론은 결국 바사의 고레스에의해 완전히 무너집니다. 고레스는 바벨론을 평정한 후 곧바로 칙령을 내려 원하는 자신들은 고토(古土)로 돌아가도 된다고 허락합니다. 이렇게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기회를 얻게 됩니다. 귀환은 세 번에 걸쳐 이루어집니다. 1차 귀환은 바사가 바벨론을 멸망시킨 바로 그해(B.C. 438)에 이루어졌고, 2차는 80년 후인 B.C. 458년에 일어납니다. 3차 귀환은 2차 귀환 후 13년이 지난 아닥사스다 20년인 B.C. 444년에 일어납니다. 3차 귀환 후 얼마 가지 않아 구약 성경 속의 역사는 끝이 납니다. 아마다 말라기가 구약의 마지막 부분에 놓인 것은 성전 건축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황을 담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1차 포로 귀환(B.C. 438)

대하 36:22-23, 스 1:1-2:70, 6:3-5

바벨론을 무너뜨린 바사(페르시아)의 고레스는 포로로 끌려온 민족들에게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칙령을 내려 허락합니다. 유대민족뿐 아니라 다른 많은 민족들도 원하는 자들은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민족들은 돌아가지 않았지만 유대인들은 최소 1/3 정도는 돌아간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관리로 있었던 다니엘의 영향이 적지 않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귀스타브 도레, 칙령을 내리는 고레스왕

[에스라 1:1-4] 1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이르되 2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세상 모든 나라를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3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 너희 중에 그의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라 그는 예루살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 4 그 남아 있는 백성이 어느 곳에 머물러 살든지 그 곳 사람들이 마땅히 은과 금과 그 밖의 물건과 짐승으로 도와 주고 그 외에도 예루살렘에 세울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예물을 기쁘게 드릴지니라 하였더라 

고레스의 칙령을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가는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사항은 이스라엘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포로 ㅇ이후 이스라엘이란 명칭은 거의 사용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솔로몬 이후 이스라엘은 북왕국이 이스라엘이란 명칭을 가져갔고, 유다 지파를 남왕국이 가져갔기 때문입니다. 북이스라엘이 완전히 멸망하고 남유다만 남겨진 상태였기 때문에 포로기부터는 이스라엘이란 호칭보다는 유다 또는 유대라는 호칭을 더 많이 사용하게 된다. 이 용어는 현재도 동일하게 사용됩니다.

고레스칙령이 발표된 그해(B.C. 538)이거나 그 다음해 귀환한 것으로 보입니다. 인도자는 세스바살이었습니다.(스 5:14) 그레스를 그를 유다 총독을 세워 자원하는 자들과 함께 유대로 돌아가게 합니다. 함께 동행한 총수는 42,360명이며 7,337명의 노비도 함께 돌아갑니다.(스 2:64-65)


[에스라 2:64-65] 온 회중의 합계가 사만 이천삼백육십 명이요 65 그 외에 남종과 여종이 칠천삼백삼십칠 명이요 노래하는 남녀가 이백 명이요

 1차 귀환자들이 도착해 가장 먼저 한 일은 성전을 건축하는 일이었습니다. 성전을 건축해야 모세의 율법을 제대로 지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사 없는 율법은 사실상 의미가 없었습니다. 70년 동안 성전이 파괴되고 포로로 끌려가 제사를 드리지 못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성전건축은 미룰 수 없는 중대한 일이었습니다. 시작은 훌륭했습니다.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주축이 되어 터를 세우고 성전 건축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들이 반대하기 시작합니다. 성전 건축이 힘들어 지자 사람들은 쉽게 포기하고 당장 먹고 살아야할 집을 짓고 농사에 마음을 쏟기 시작합니다. 결국 성전 건축은 여러가지 이유로 중단되고 16년 동안 아무러 진척을 이루지 못합니다. 다리오 2년(B.C. 520, 학 1;1)이 되자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 각성 운동이 일어나고 성전건축이 재기 됩니다. 그러나 또 반대에 부딪혔지만 페르시아 왕궁이 고레스칙령을 확인 해 줌으로 공사가 재기되어 4년 후인 다리오 6년(B.C. 515)에 완공 됩니다.

2차 포로 귀환(B.C. 458)

에스라 7-10장, 아닥사스다 7년

성전이 완공 된 후 58년이 지나 2차 귀환이 이루어집니다. 왜 58년이 지나야 했는지 의하지만 당시의 역사적 상황은 모호하기만 합니다. 에스라서에 의하면(9장) 성전이 완공 된 후 유대인들은 다시 이전처럼 우상숭배와 이방인들과의 결혼이 보편화되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을 지키려는 의지도 열심도 대부분 사라진 것입니다. 이러한 정서는 예루살렘뿐 아니라 바사에 사는 유대인들도 비슷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에스라는 아닥사스다 왕에게 허락을 받고 자원하는 자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향합니다. 이것이 2차 귀환입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이들을 아바하 강 주변에 모이게 하여 함께 출발합니다. 숫자는 1차에 비하면 참으로 보잘 것 없어 고작 1500명 정도였습니다.(스 8)

에스라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이방여인들과의 결혼을 취소하고 율법을 가르치는 일에 매진합니다. 그러나 에스라의 사역 만으로 턱없이 부족했고, 에스라를 다시 바벨론으로 돌아갑니다.

3차 포로 귀환(B.C. 444)

느 1-13, 아닥사스다 20년

3차 귀환은 느헤미야에 의해 주도됩니다. 에스라가 귀환한지 약 13년 정도가 흐른 뒤였습니다. 느헤미야의 귀한 때는 함께 귀환한 사람들의 명단과 숫자가 나오지 않습니다. ‘군대장관과 마병’(느 2:0)을 보낼 정도라면 최소한 500명 이상으로 보입니다. 느헤미야는 술관원장이었습니다. 요즘말로 하면 행사를 관장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하나니아가 예루살렘에 대한 비참한 소식을 들려주자 느헤미야는 슬픔 속에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마침내 때가되자 왕에게 구해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기회를 얻게 됩니다. 아닥사스다 왕은 수 년전에 사마리아 사람들의 음모로 보내진 편지를 읽고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지 못하도록 명령한 상태였습니다. 이러한 사정을 알고 있었을 느헤미야가 왕에게 이야기한 것은 아닥사스다 왕이 느헤미야를 얼마나 아꼈는가를 보여줍니다. 

귀스타브 도레, 느헤미야의 주도 아래 성벽을 재건하는 유대인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벽을 돌아보고 곧바로 사람들을 모아 성벽 재건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많은 적들이 반대하고 모함합니다. 사마리아 총독인 산발랏이 더욱 거세게 반대합니다. 산발랏은 자신의 딸을 예루살렘 대제사장 엘리아십 가문으로 시집을 보냈기 때문에 입김이 작지 않았습니다. 암몬 사람 도비야와 합세하여 니헤미야를 공격합니다. 그러나 시작한 지 52일 만에 완공하여 적대자들을 꼼짝 못하게 합니다. 

느헤미야는 성벽 재건 뿐 아니라 에스라와 함께 율법을 가르치고, 이방인들과의 결혼을 무효화시켜 돌려보내는 일을 합니다. 수많은 반대가 있었지만 훌륭하게 해냅니다. 물론 느헤미야의 개혁 운동이 완전히 성공한 것은 아닙니다. 결국 구약 성경은 침묵합니다. 구약 성경의 마지막 예언서인 말라기서는 느헤미야 시대에 기록된 것으로 보입니다. 말라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부도덕성과 부경건함, 십일조에 대한 경시들을 비판합니다. 


이것으로 구약의 역사를 끝이 납니다. 이후 400년 정도 성경에 나오지 않는 중간기가 시작됩니다. 이부분은 [제2성전기 역사]를 참고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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