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사 인물]
[종교개혁사 인물]
종교개혁에 관련된 인물 목록입니다.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친 인물을 중심으로 엮었습니다. 최종글이 아니면 계속하여 수정 증보됩니다. 기본적으로 위키백과 사전을 참조하여 수정 증보 되었음을 밝힙니다.
1. 종교개혁 이전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0년경 ~ 1384년)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0년경 ~ 1384년)는 영국의 기독교 신학자이며 종교개혁가이다.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하였으며, 1374년 교황이 납세 문제로 영국왕 에드워드 3세를 불러들였을 때 위클리프도 사절단으로 따라갔다.
그 후 교구장이 되어 로마 교황청의 부패를 탄핵하기 시작하였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11세로부터 이단이라는 비난을 받았으나, 계속해서 교황의 권력과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리에 공격을 가하였다. 후에 종교 개혁 운동의 여러 원리는 모두 그의 교설 가운데서 싹텄다고 여겨지기도 하며 위클리프의 교설은 롤라드 즉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 의해 각지에 퍼졌다. 민중에게 복음의 진리를 전하기 위해 라틴어로 된 성서를 영어로 번역하여 마침내 1382년에 완성하였다. 순교자 윌리암 틴데일에게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화체설을 반대하고(transubstantiation), 수도원제도를 비판하고 교황의 권위를 반대하였다. 얀 후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롤라드(Lollardy, Lollardry, Lollardism) 부흥운동
위클리프는 순회 설교자들을 조직하여 영국 국민들에게 직접 가르쳤다. 말틴 루터가 위텐벨그 성 교회 문에 95개 조항을 붙이기 2세기 이전에 위클리프를 따르는 ‘가난한 사제들’은 영국 전역의 마을을 돌면서 영어로 설교했으며, 부패한 교회의 개혁을 부르짖었다. 롤라드 부흥운동은 기성교회로부터 심한 박해를 받았다.
1382년 그리스도의 승천 날에 영어로 첫 설교를 한 ‘롤라드’는 니콜라스 히어포드였는데, 이것은 영국 전역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보통 사람들에게 전하는 계기가 됐다. 역사가들은 위클리프를 ‘종교개혁의 아침 별’이라고 불렀다.
기성 교회는 이들 ‘가난한 사제들’을 ‘롤라드들’(Lollards)이라고 불렀다. ‘롤라드’란 것은 ‘중얼거리는 자, 가라지, 위선자, 게으른 자’라는 여러 가지 뜻으로 기성교회가 갖고 있는 이 운동에 대한 적개심을 잘 나타낸 명칭이었다.
‘롤라드’ 부흥운동은 위클리프가 죽기 2년 전에 시작됐다. 위클리프의 가르침은 롤라드 부흥운동을 촉진시켜 다음 세대로 이어져서 15세기 초엽에는 영국인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그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았다.
위클리프는 교회의 부패를 공개적으로 비판했으며, 성경만이 모든 교리와 실천을 위한 궁극적인 권위라고 말했다. 교황도 성경의 가르침과 다른 말을 할 때는 믿어선 인된다고 함으로써 기성교회와 다른 입장을 취했다.
교황 그레고리 9세는 위클리프를 정죄했으며, 1382년에 켄터베리 주교의 지휘아래 공의회는 위클리프의 교리 24개 항목을 정죄했는데 10개항은 이단으로, 14개항은 잘못된 것으로 판결했다.
위클리프는 1384년 12월 31일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위클리프가 죽은 다음 44년이 지난 후에 교황은 칙령을 내려 위클리프의 사체를 발굴하여 이단으로 화형에 처하게 했으며, 그의 재를 테임즈 강에 뿌리게 했다. 위클리프의 재가 강을 따라 바다로 흘러감과 동시에 그가 조직한 ‘가난한 사제들’(롤라드 부흥운동)의 복음은 영국을 넘어 유럽 대륙으로 계속 전달됐으며, 평신도 운동으로 점차 확대되어 갔다. 1523년에 네덜란드의 신학자 에라스무스(Erasmus, 1466-1536)는 ‘롤라드’운동을 ‘정복되었으나 소멸되지 않는’ 부흥운동이라고 했다.
[이 글은 '요한 위클리프 : ‘롤라드’ 부흥운동 '에서 가져왔습니다.]
얀 후스(Jan Hus, 1372년? ~ 1415년 7월 6일)
얀 후스(Jan Hus, 1372년? ~ 1415년 7월 6일)는 체코의 기독교 신학자이며 종교개혁가이다. 그는 존 위클리프의 영향으로 성서를 믿음의 유일한 권위로 강조하는 복음주의적 성향을 보였으며, 로마 가톨릭 교회 지도자들의 부패를 비판하다가 1411년 대립 교황 요한 23세에 의해 파문당했다. 콘스탄츠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1415년 화형에 처해졌다. 하지만 그가 화형당한 이후 그의 사상을 이어받은 사람들이 보헤미안 공동체라는 공동체를 만들고, 그의 주장은 마르틴 루터 등 알프스 이북의 종교개혁가들에게도 영향을 끼치게 된다. 현재에는 18세기 이후에 설립된 모라비아 교회 혹은 체코 개신교라는 명칭으로 명맥을 이어나가고 있다.
지롤라모 사보나롤라(Girolamo Savonarola,1452-1498)
지롤라모 사보나롤라(Girolamo Savonarola, 1452년 9월 21일 ∼ 1498년 5월 23일)는 이탈리아의 도미니쿠스회 수도사·설교가·종교개혁가이다. 사보나롤라는 설교를 통해 피렌체 시를 개혁하고, 민주정치를 실시하려고 했다. 또한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부도덕을 비난하고, 로마 가톨릭교회와 이탈리아가 벌을 받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러나 결국 피렌체 시민들로부터 버림받아 화영 당한다.
윌리엄 틴데일(William Tyndale, 1494년~1536년)
윌리엄 틴들(틴데일)(William Tyndale, 1494년~1536년 웨일스 슬림브리지 출신)은 영국의 종교인이다. 존 위클리프에게 영향을 받아 영어로 성경을 번역한 사람이다. 그는 영어 번역을 위해 독일로 건너가 비밀리에 번역작업을 했으며 기존에는 없던 새로운 단어를 만들기도 했다. 성경을 번역한 죄로 체포되어 1536년 10월6일 화형당했다. 킹 제임스 성경 영어 판의 70%가 틴데일의 성경에 근거한다. 영국 캠브리지에는 그의 이름 가진 틴델하우스가 있는데 많은 전문학자들이 연구하고 발표하는 연구소로 유명한 곳이다.
데시데리위스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 1466,10,27~ 1536,7,12)
에라스무스는 말한다. 내가 낳은 알을 루터가 부화시켰다. 루터보다 일찍 종교개혁의 바람을 일으켰지만 자신은 종교개혁에 동참하지 않음으로 루터와 결별한다. 헬라어로 신약 성경을 완성하고, 종교개혁의 토대를 놓았다. 자유의지 논쟁으로인해 루터와 결별하고 결국 홀로 고독히 죽어간다. 그러나 그는 모든 교리적 측면에서 종교개혁가들과 함께 했고, 종교개혁이 일어나도록 도왔다.
이제 모든 준비는끝났다. 대륙에서 일어난 종교개혁의 바람은 영국해협을 건너 영국 본토에도 일어날 것이다. 틴데일은 루터부터 십 년 후의 사람이지만 영국은 아직 동토의 땅이기에 종교개혁 이전 사람에 넣었다.
2. 종교개혁자들
마르틴 루터(독일어: Martin Luther, 1483,11,10~1546,2,18)
마르틴 루터(독일어: Martin Luther, 1483년 11월 10일~1546년 2월 18일)는 독일의 종교개혁가이다. 당시 비텐베르크 대학교의 교수였으며, 훗날 종교개혁을 일으킨 역사적인 인물이다.[1] 본래 아우구스티노회 수사였던 루터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면벌부 판매를 회개가 없는 용서, 거짓 평안(예레미야 예언자의 가르침을 인용함)이라 비판하고 믿음을 통하여 의롭다함을 얻는(der Rechtfertigung durch den Glauben) 이신칭의를 주장하였다. 칭의를 통한 개인 구원의 새 시대를 열어주었다. 면죄부 판매를 비판한 그는 1517년 95개 논제를 게시함으로써 당시 면죄부의 대량 세일을 하는 도미니코회 수사이자 설교 담당자인 요한 테첼에 맞섰다. 1520년 그는 교황 레오 10세로부터 자신의 모든 주장을 철회하라는 요구를 받았으나 오직 성경의 권위을 앞세우면서 성서에 어긋나는 가르침들을 거부하였다. 1521년 보름스 회의에서도 마찬가지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인 카를 5세로부터 같은 요구를 받았으나 거부함으로써 결국 교황에게 파문을 당하였다. 그는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대학교 교회 문에 95개 논제를 붙였는데 이것이 종교 개혁의 시작이 되었다. 그의 종교 개혁은 당시 종교와 사회에 큰 영향을 주었다.
츠빙글리 (Huldrych Zwingli)
독일에서 루터를 중심으로 개혁 운동이 일어남과 더불어 스위스에서는 츠빙글리에 의해 프로테스탄트 개혁운동이 일어났다. 루터보다 조금 후인 1519년 스위스 쥬리히에서는 츠빙글리가 교회의 예배형태를 개혁하기 시작했다. 성경에 근거한 철저한 개혁을 주도하였다. 루터와 성만찬 논쟁으로 인해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 결국 결별한다.
칼뱅 (Jean Calvin or John Calvin)
츠빙글리와 루터는 칼뱅이라는 저수지에서 만난다. 교리적이고 신학적 측면에서 종교개혁을 완성시킨 장본인이다. 개혁주의의 시조이다. 기독교 강요을 통해 종교개혁 교리를 완성시킨다.
토머스 크랜머 (Thomas Cranmer)
영국의 종교개혁을 이끈 최초이자 강력한 학자이다. 종교개혁 초기에 종교개혁을 이한 신학적 바탕을 준비했다.
토머스 크랜머(Thomas Cranmer, 1489년-1556년)는 캔터베리 대주교이자 종교 개혁 시기의 기독교 신학자이며 종교 개혁가이다. 축일은 3월 21일이며, 성공회, 루터교에서 이 날을 기념한다.
로마 가톨릭 신자인 메리 1세의 성공회와 개신교에 대한 탄압으로 휴 레티머, 니콜라스 리들리 주교등과 함께 화형으로 순교하였다. 강요와 회유공작을 받은 토머스 크랜머 대주교는 견딜수 없는 정신적 압박에 시달린 끝에 개신교 믿음을 버린다는 믿음철회서에 서명을 하였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개신교 신앙을 버리지 않겠다고 입장을 바꾸고 순교하였는데, 순교 직전 믿음철회서에 서명한 오른손을 불에 집어넣었다.
하인리히 불링거(독일어: Heinrich Bullinger, 1504-1575)
하인리히 불링거(독일어: Heinrich Bullinger)는 스위스의 종교개혁가이며 목사이다. 울리히 츠빙글리의 후계자로서 44년간 스위스 취리히 개혁교회 의장(Antistes)을 역임하며 종교개혁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1504년 7월 18일 스위스 아르가우(Aargau)의 브렘가르텐(Bremgarten)에서 태어나 1575년 9월 17일 취리히에서 사망했다.
[종교개혁사 추천도서]
1. 황희상의 <특강 종교개혁사>흑곰북스
쉽지만 가볍지 않다. 종교개혁에 관련된 핵심을 추려 담았다.
2. 어윈 루처의 <하룻밤에 읽는 종교개혁 이야기> 국제제자훈련원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종교개혁사 이야기다. 스토리 중심이며, 종교개혁을 알고 싶어하는 일반 신자들에게 추천한다.
저자 : 황희상 | 출판사 : 흑곰북스 판매가 : 25,000원 → 22,500원 (10.0%, 2,500↓) ‘특강 소요리문답’과 ‘특강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라는 신개념 교리학습서 시리즈를 출간해온 흑곰북스에서 이번에는 신개념 교회사 학습서를 출간했다. 2017년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여 기획된 ‘특강 종교개혁사’가 그것이다. 지난 시리즈가 교리 자체에 집중했다면, 이번 책은 교리가 만들어진 역사적 현장으로 독자들을 안내한다.저자는 책의 도입부에서 독자들을 유럽 종교개혁사의 여명기에 데려다 놓는다. 그리고 종교개혁의 “핵심 정신”이 무엇이었는지, 그 정신에 따라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 1백여 년에 걸쳐 구체적으로 어떤 종교개혁이 일어났는지를 한달음에 살핀다. 일반 역사와 교회사를 씨줄과 날줄…[더보기▶] |
[종교개혁사에 관련된 더 많은 참고도서는 다음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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