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서신에 담긴 위대한 복음 / 이상웅 / 솔로몬
작은 서신에 담긴 위대한 복음
이상웅 / 솔로몬
한 왕이 있었다. 나이가 들어 자신의 왕위를 물려줄 때가 되었다. 그 나라의 전통은 장남에게 주지 않고 가장 지혜로운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왕은 어떻게 하면 지혜로운 아들을 구별할 수 있을까 며칠을 고민하다 한 가지 묘안을 찾았다. 당시 자신이 쓰던 나라의 창고 열쇄를 세 개의 상자 중 하나에 넣고 그것을 찾는 왕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기로 한다. 하나는 보석과 금으로 만들어진 상자이고, 두 번째 상자는 단단한 금속과 자물쇠로 잠가진 상자이다. 마지막 상자는 허름한 나무로 된 것으로 볼품도 없었다.
명예를 사랑하고 권위적인 큰아들이 먼저 들어갔다. 이 나라의 왕이 사용하시는 열쇠이고 나라의 보물을 간직한 창고이니 당연히 화려하고 아름다운 곳에 보관해 둘 것이라 생각했다. 보석이 박힌 금 상자를 열었다. 하지만 열쇠는 보이지 않았다. 둘째 아들이 들어갔다. 지식과 냉철한 이성을 가진 둘째 아들은 소중한 열쇠를 가장 든든한 금고에 넣어 두리라 생각하고 두 번째 상자를 열었다. 역시 열쇠는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 막내가 들어갔다. 들어가니 세 개의 상자가 보였다. 셋째 아들은 자신이 왕이라면 어디에 열쇠를 숨길까를 고민했다. 그리고 허름한 나무 상자를 열었다. 열쇠는 그곳에 있었다.
왕이 아들에게 어떻게 열쇠를 찾았냐고 물었다. 만약에 도둑이 들어왔을 때를 생각해 보았다. 보석이 달린 금 상자는 사람들이 상자를 훔쳐가 열쇠를 잃어버릴 것이고, 두 번째 상자는 튼튼해 그곳에 열쇠를 숨겨 놓았다고 금세 알 것이다. 그러나 허름한 나무 상자에 소중한 열쇠를 넣어 두리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절대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왕은 셋째의 지혜에 탄복을 하고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복음은 어디에 담아 두어야 할까?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고 말한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강조하려는 목적이다. 그러나 한 편으론 복음이 연약한 질그릇 같은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알려 준다. 이상웅 교수의 빌레몬서 강해 집의 제목을 ‘작은 서신에 담긴 위대한 복음’으로 정했는데, 이것은 참으로 적절한 표현이다. 왜냐하면 빌레몬서는 유다서와 더불어 신약에서 가장 작은 서선이다. 유다서가 신학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적지 않은 관심을 받는 반면 빌레몬서는 분량만큼 관심도 적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적 삶’이 무엇인지 가장 실제적으로 보여주는 서신서이다.
빌레몬서는 복잡한 교리나 신학적 주해를 위한 서신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 어떤 서신에도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정성욱 교수가 추천사에서도 소개하듯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적절하게 강조’하면서 ‘성도 간의 아낌없는 칭찬과 적극적인 사랑의 중요성을 바르게 지적’하고 있다. 필자의 눈에 비친 빌레몬서는 현대 교회가 상실한 자발적 사랑의 헌신을 통해 살아있는 복음이 무엇인지 잘 가르쳐 준다. 노예제도라는 시대적 오류를 자발적 헌신을 통해 세상을 놀라게 한다. 만약 노예제도가 없는 현대를 배경으로 한다면 빌레몬서의 위력은 현저히 감소할 것이다. 복음은 모순과 아이러니를 제거하지 않는다. 오히려 모순을 내재화하고, 아이러니를 현실 속에 침전시킨다. 복음은 시대의 폭력을 숭고한 사랑으로 치환시키는 힘을 발휘한다.
이 책의 특징을 몇 가지로 정리해 보자.
먼저, 이 책은 설교 집이다.
본서는 산격 제일 교회에 담임하면서 열 번에 걸쳐 행한 설교이다. 그러나 이 책은 단순한 설교 집으로 치부할 수 없다. 화란에서 돌아와 몇 년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는지 텍스트에 대한 집요함이 설교에 스며있다. 빌레몬서를 전체적으로 조망하면서 차근차근 주해해 나간다. 깊이와 넓이가 어우러진 주해와 강해를 겸한 설교이다.
둘째, 적절한 원어 해석이 돋보인다.
성경을 깊이 알기 위해서는 원어 해석을 불가피하다. 그러나 과도한 언어 해석은 본문의 흐름을 깨뜨릴 뿐 아니라 전체의 흐름을 놓치게 만든다. 적당하지만 꼭 필요한 해석은 설교에서 중요한 기법이다. 저자는 지혜롭게 성경 원어를 적절하게 해석하고 활용하고 있다. 적절한 성경 원어를 통해 의미의 풍성함을 맛볼 수 있다.
셋째, 빌레몬서의 핵심을 짚어 준다.
11-14절을 설교하면서 ‘자발적인 선행’으로 강조한다. 자발적 선행은 ‘내 심복’이란 단어를 해석하면서 그 의미를 설명한다. ‘내 심복’인 ‘τὰ ἐμὰ σπλάγχνα’(타 에마 스플랑크나)는 의역하면 ‘바로 나 자신’(95쪽)이란 뜻이다. 이미 복음으로 낳은 오네시모는 바울 자신이 된 것이다. 그런 오네시모로 하여금 주인인 빌레몬에게 돌려보내 ‘자신의 힘으로 주인에게 용서를 구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발적 선행의 의미다. 저자는 이곳에서 복음의 핵심을 짚어 낸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이와 같은 자발적인 헌신이요, 자의에 의한 봉사입니다. ... 눈에 보이는 보상이 없을지라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봉사가 감화력이 있습니다.”(97-98쪽)
주석이든 설교 집이든 필자가 알고 있는 빌레몬서를 단 권으로 다룬 책은 김주한의 <익스포지팅 빌레몬서>라는 헬라어 강독 집 외에 이 책뿐이다. 책의 제목대로 이 책은 빌레몬서에 담긴 복음의 위대함을 설교의 그릇에 담았다. 화려하지 않기에 소외되기 쉽고, 간략하기에 무시당할 수 있는 서신서이다. 그러나 복음의 삶이 무엇인지 실천적으로 보여주는 설교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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