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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과 기고글]/국민일보

[기독교 고전읽기] 20, 크리소스톰의 <부자>

by 하늘땅소망 2017. 1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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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고전읽기] 20, 크리소스톰의 <부자>

조계광 옮김 / 규장출판사

*이 글은 마이트웰브에 기고된 글입니다.

1. 들어가며

저는 지난주에 루돌프 브랜들렌의 <요한 크리스토무스>(분도출판사)를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크리소스톰의 몇 권 되지 않는 번역서 중에서 규장출판사에서 출간된 <부자>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브랜들렌은 크리소스톰의 생애를 세 단계를 구분해지만 저는 네 단계로 구분하여 정리했습니다. 초기는 어린 시절과 안디옥 시절(349-397), 두 번째 시기는 안디옥에서의 설교자 생활(386-397)이고, 세 번째 시기는 콘스탄티노플 시절(397-403)이고, 나머지는 후반기로 유배 생활과 복귀(403-407) 시절입니다. 크리소스톰이 가장 꽃을 피웠던 시기는 안디옥에서 안수를 받고 설교자로 활동했을 때입니다. 우리는 그를 콘스탄티노플 감독으로만 알고 있지만, 실제로 안디옥을 떠나면서 정치적 어려움으로 인해 설교다운 설교를 못했습니다. 이 책은 388년 안디옥에서 행한 부자와 나사로 비유를 연속적으로 설교한 것입니다. 특별히 안디옥에 큰 지진이 있었던 직후에 행한 설교였기에 자연재해에 대한 신학적 답변이 요구되었습니다. 자연재해는 이 시대에 고난과 긴밀한 연관이 있으며 최근에 일어나 경주와 포항의 지진으로 인해 오갈 데 없게 된 적지 않는 이재민들의 심정도 헤아려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초대교회 당시 성경 해석학에 있어서 오리겐을 중심으로 한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디옥에서 발흥한 안디옥 학파가 있습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소위 문장과 단어에 어떤 영적인 비밀이 있다는 식의 주장을 합니다. 알레고리적 해석이라고 부르는 이런 해석은 고대로부터 전해온 초대교회 전통적 성경 해석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해석은 시간이 지날수록 과도한 의미의 확장과 억지로 인해 성경의 원뜻에서 멀어져 가는 왜곡현상이 일어납니다. 문맥과 상황 등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지금의 상황으로 끼워 맞춥니다. 예를 들어 눅15장의 탕자의 비유에서 큰 아들을 유대인으로 작은 아들을 이방인으로 설정하는 억지스러운 해석 공식을 사용합니다. 이 부분은 그다지 크게 문제 될 것이 없다고 하지만, 새를 어느 곳에 나오든지 악마로 해석하는 경우 등은 심각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해 안디옥 학파는 문법-역사적 방법을 사용해 성경을 해석합니다. 이들은 20세기의 구조주의와 중세의 에라스무스의 성경 해석 방법론과 상당한 부분에서 일치됩니다. 단어는 문장의 전체 의미 속에서 찾아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또한 사회적 맥락과 문화적 환경이 시대의 언어를 만들어낸다고 보았습니다. 동일한 단어라 할지라도 시대나 문화가 다르다면 다른 의미로 사용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들은 또한 철저하게 논리적이고 문법적인 방법을 통해 성경을 해석하기 때문에 논리적 치밀함을 갖고 있습니다. 크리소스톰의 성경 해석은 안디옥 학파의 정수라 부를 만큼 성경을 명징하고 치밀하게 분석합니다. 특별히 문자적 해석을 강조하는 안디옥 학파는 성경을 순수하게 믿으려는 실용적 관점을 견지(堅持)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적용에 설교의 방점이 들어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2. 구조와 내용

구조는 여섯 개의 설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저는 세 편의 설교를 간략하게 정의하면서 크리소스톰의 성경 해석과 신학적 논지를 파악하려고 합니다. 목차는 아래와 같습니다.

1 진정한 부자는 사치가 아니라 덕을 쌓는다

2 진짜 가난한 사람은 재물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탐욕이 가득한 사람이다

3 악인의 형통은 긍휼 없는 심판의 전주곡이다

4 양심의 법정에서 죄를 면밀히 살펴 하늘 법정에서 자비를 얻으라

5 참된 부와 가난은 그 열매로 판단한다

6 영원한 하늘 보화가 예비된 좁은 문을 선택하라

 

1 진정한 부자는 사치가 아니라 덕을 쌓는다

지금 안디옥은 사탄의 축제(농신제)로 떠들썩하지만, 우리는 교회에 모여 신령한 축제를 즐깁니다. 우리는 포도주가 아니라 신령한 교훈이 가득한 술잔을 나눠 마십니다. 우리는 사치를 일삼는 이들을 경책해야 합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두 사람의 엇갈린 운명을 봅니다. 주님은 이 비유를 통해 우리를 교훈하십니다.

악하게 살았던 부자가 있습니다. 그는 불행이나 재난을 모릅니다. 그는 모든 것이 넘칩니다.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합니다. 그는 대문 옆에 누워있던 나사로를 무시했고, 자선을 베풀지 않았습니다. 굶주린 배를 움켜쥔 채 극심한 고통 가운데 허덕이며 일평생 끔찍한 질병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을 보고서 아무 도움도 베풀지 않았습니다. 그는 일말(一抹)의 동정심도 느끼지 못하고 계속하여 무시했습니다. 부자는 타인에 대한 불쌍한 감정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냉혹한 부자는 여러 가지 정황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동정심도 느끼지 않았습니다. 이런 잔인함은 악 중에서도 가장 큰 악입니다. 부자는 날마다 호화롭고 부도덕한 만찬을 즐겼습니다. 이것은 크나큰 악입니다. 그는 안식일에도 잔치를 벌였습니다. 사치스러운 삶보다 더 통탄할 만한 일은 없습니다. 인간은 먹기 위하여 살지 않고 살기 위하여 먹습니다.

나사로는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대개 고난 속에서 이것이 정녕 하나님의 섭리란 말인가?’ 원망합니다. 또한 시련을 잘 견뎠습니다. 가난은 인간으로서 자존심까지 뭉개는 비참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도 먹지 못합니다. 그는 개가 상처를 핥을 만큼 산송장처럼 누워있습니다. 무엇보다 나사로의 고통은 악인의 형통을 매일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이유 없는 고난 가운데 있는 욥에게 친구들은 네 죄 때문이라고 비방했습니다. 멜리데 섬 토인은 바울이 독사에 물린 것을 보고 이 사람은 살인한 자로다’(28:4)라고 판단했습니다. 나사로 역시 고통 속에서 사람들의 비판을 들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세상의 모습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부자는 지옥불에 던져졌고, 거지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습니다. 의인은 세상에서 많은 고난을 당하지만 선한 소망으로 살고, 순결하고 안전하며 영원한 기쁨을 누립니다. 그러나 악인들은 죄책감으로 괴로워하며 악을 행하면서 양심의 가책을 느낍니다. 그들은 애써 그러한 것을 잊으려 합니다.

나사로는 평생 괴로움 속에서 인내하며 살았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닥친 불행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당하는 고난으로 인해 뭇사람들의 비난의 화살도 받았습니다. 우리는 나사로가 받은 절반도 안 되는 고통을 참지 못한다면 무슨 할 말이 있을까요? 또한 그리스도는 나사로 같은 사람을 통해 우리가 어떤 고난을 받아도 인내하고 감사해야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현세의 고통을 기쁨으로 감당하고, 내세의 것들을 믿음으로 누려야 합니다.

2 진짜 가난한 사람은 재물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탐욕이 가득한 사람이다

우리는 앞선 설교에서 부자와 나사로의 운명이 바뀌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니 부자라고 미덕이 없어도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하고, 가난이 악이라는 생각도 버려야 합니다. 부자가 행운아도 아니고, 가난한 사람은 불운아가 아닙니다. 참된 빈자(貧者)는 재물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탐욕으로 가득한 사람입니다. 이것이 올바른 부와 가난의 정의입니다. 날마다 샘물을 마시면서 갈증을 느끼는 사람이 정상이 아니듯, 부를 소유하면서도 또 소유하길 원하는 사람도 정상이 아닙니다. 부자는 많은 수입으로 더 큰 곡간을 지으려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든든한 곡간도 가난한 자들의 굶주린 뱃속보다 안전한 곡간은 없습니다.

부자들은 즐겁게 떠들지만 결국 지옥불에 떨어집니다. 주님께서 오늘 밤에 부르시면 그것이 마지막입니다. 그는 다가올 세상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한순간에 모든 것이 재로 변할 것입니다. 저 세상에서 부자는 거지가 되었습니다. 그는 물 한 방울이 없어 나사로에게 구절 합니다. 이 땅에서 쓰는 왕, 장군, 의사, 교수 등은 모두 가면입니다. 그들의 가면을 벗기면 미덕의 빈곤을 발견할 것이고, 신분의 천박함에 놀랄 것입니다. 나눠주지 않는 사람들은 도둑이며 도둑질입니다. 자선을 베풀지 않으면 도둑질과 같은 형벌을 받게 됩니다. 우리는 재물의 청지기일 뿐입니다.

아브라함은 나그네를 들을 대접했습니다. 우리 또한 그래야 합니다. 가난한 자들의 배를 채워주십시오. 또한 성가시고 귀찮다고 불평하지 마십시오. 낙심하지 말며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들에게 선을 베푸십시오.(6:9,10) 아브라함은 나그네들을 차별하거나 가라지 않았기에 천사를 영접했습니다.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관대해야 합니다. 또한 헤아리지 말아야 합니다.(7:2) 너는 도울 가치가 있기 때문에 돕는다는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도 그렇게 생각하셨다면 우리는 이미 구원을 받지도 선택도 받지 못할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 아무런 가치도 없기 때문입니다.

5 참된 부와 가난은 그 열매로 판단한다

세상은 하나님께서 흔들 때 모든 것이 무너집니다. 이 세상은 잠시 존재하는 헛것일 뿐입니다. 우리는 지진을 통해 세상의 헛됨에 주목해야 합니다. 재물이 주인과 함께 멸망하고, 건물이 건축자와 함께 무너졌습니다. 씨 뿌리는 비유를 보십시오. 세 곳은 씨가 죽었지만 한 곳만 살아 남아 열매를 맺었습니다. 저는 오직 한 영혼이 구원받는다면 설교할 것입니다. 만약 죄 때문에 우울하고 낙심이 된다면 구원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벌하십니다. 그러나 형벌보다 이유가 되는 죄를 무서워해야 합니다. 우리는 악인의 형통을 보면서 울어야 합니다. 그들은 질병을 앓고 있는데도 치료할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온몸이 썩어 있는데 썩은 것을 도려내지 않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길입니다.

한 부자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아무런 열매가 없습니다. 큰 상수리나무는 도토리와 그늘을 제공합니다. 부자는 아무런 열매가 없습니다. 그는 가난한 나사로를 보지 못했습니다. 아니 않았습니다. 그는 구제에 아무런 가치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렇기에 열매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겉모습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말아야 합니다. 가난한 자를 사랑하는 사람은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나사로는 마치 길가에 떨어진 금화와 같습니다. 이 세상은 연극과 같습니다. 마지막에는 가면을 벗고 원래의 모습을 보일 것입니다. 모든 배역은 하나님께서 잠깐 맡기신 것입니다. 가면이 실체가 아니라 겉모습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반드시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부자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남의 재물은 소유했지만 진작 자신의 재물(구제)은 없습니다. 사람은 연약하기에 의로우면서도 악합니다. 구제하고 기부금을 내면서도 우월감과 거만할 수 있습니다. 또한 완전히 악한 악인도 없습니다. 악인도 어떤 부분은 선하고 친절합니다. 이것은 미덕을 추구하지 못한 만큼 철저한 악인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죄인들의 작은 선을 보상하십니다. 그러나 의인들의 작은 죄는 반드시 징벌하십니다. 죄인들은 다음 세상에서 받을 상이 없습니다. 의인들은 다음 세상에서 더 이상 징벌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악인의 형통 속에서는 하나님의 심판의 엄중함이 숨겨져 있고, 의인의 고난 속에는 하나님의 자비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그 열매대로 심판하시고 보상하시는 분입니다.

3. 평가 그리고 결론

크리소스톰의 설교는 현재의 탁월한 설교자들과 비교해도 부족한 면이 거의 발견되지 않습니다. 1700년 정도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말입니다. 알레고리적 성경 해석에 더 가까웠던 어거스틴에 비해서도 본문을 훨씬 명료하게 해석합니다. 안디옥 학파가 따랐던 성경 해석은 실존적이며 구체적인 것이었습니다. 본문 이면에 숨겨진 뜻을 애써 찾기보다 문법적 측면에서 본문이 갖는 의미를 명확하게 파악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가끔 은유적 해석을 통해 알레고리가 갖는 풍성한 면도 함께 추구한다는 점에서 명설교가였습니다.

부자와 나사로를 통해 현대인이 갖는 고난의 의미를 명징하게 풀어내 줍니다. 부자의 악은 어떤 악한 행위 이전에 가난한 자에 대한 무관심 자체를 큰 악으로 규정합니다. 초대교회가 ()’를 가난한 자들에 대한 구제와 동일시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타인에 대한 긍휼 한 마음을 갖는 것은 의의 전제이자 시작점입니다. 타인의 고난과 불행에 눈감는 자들은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심으로 아들을 보내셨고, 대속의 죽음을 허락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바로 긍휼이란 단어입니다.

또한 부자의 소유는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소유는 하나님의 것을 잠시 맡고 있는 청지기입니다. 그러나 크리소스톰은 하나님의 것이기 전에 타인의 것으로 규정합니다. 인간은 재물의 소유권을 갖지 않고 관리권만 갖고 있을 뿐입니다. 세상의 것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 순식간에 사라질 것입니다. 부도 명예도 권력도 사라집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의 본질은 된 것입니다.

악인의 형통은 영원한 심판을 위한 것입니다. 보이는 것은 전부가 아닙니다. 그것은 가면에 불과합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은 심판하실 것이고, 악을 쌓는 자는 지옥에 던져질 것이며, 의를 행하는 자는 자신의 그 소유로 천국에 들어갈 것입니다. 진정한 부자는 구제하여 선을 베푼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주장은 마태복음 6장에 담긴 권면처럼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6:20)는 것과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크리소스톰에 의하면 포괄적인 의미에서 고난은 죄의 결과이지만,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악인은 오히려 형통하고, 의인은 날마다 고통 속에서 보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사람은 고난당하는 자들을 향하여 죄의 결과라고 비아냥거린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고 어떤 가치가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도 포함됩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통해 이러한 그릇된 가치를 단죄하고 오직 의로운 삶만을 살아가도록 촉구합니다.

크리스소스톰의 설교는 실제적입니다. 적용에 있어서도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를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어떤 설교자들처럼 단지 성경만 주해하며 성령께 맡긴다는 소극적 자세를 취하지 않습니다. 성경의 뜻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적용을 이끌어내는 탁월함이 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크리소스톰은 목소리가 그리 크지 않았고, 다소곳한 편이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실제적면서 감성적인 설교는 수많은 청중들의 관심을 이끌어 냈고, 감동에 젖게 했습니다. 거의 매번 설교 중에 박수를 치는 바람에 설교가 중단된 적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의 설교는 세상의 권력에 타협하지 않았고, 성경이 말하는 것을 정확하게 설교했습니다. 이것은 어거스틴에게 세례를 준 암부로시우스와 많이 닮아 있습니다. 또한 크리소스톰은 스스로 금욕적인 삶과 검소함으로 본이 되는 삶을 살았습니다. 행정에도 능하여 교회가 여러 구제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열정적으로 일했습니다. 너무 정치적이지 못해 고통과 유배를 당해야 했지만, 오직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순박하고 정직하게 목회했습니다. 이러한 삶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탐욕과 권력에 흔들리는 목회자들에게 교훈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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