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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고전읽기] 암브로시우스 <나봇 이야기>

샤마임 2017. 10.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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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고전 읽기]

암브로시우스 <나봇 이야기>


*이글은 마이트웰브에 기고한 글입니다. 

 

암브로시우스는 교회사에서 잘 알려진 인물입니다. 그는 밀라노 감독이었고, 어거스틴에게 세례를 준 감독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히에로니무스, 어거스틴, 그레고리우스 1세 와 더불어 서방교회 4대 교부에 속할 만큼 교회사에 중요한 인물입니다. 암브로시우스는 어거스틴에게 세례를 주었을 뿐 아니라 여러 면에서 영적 아버지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암브로시우스는 후기 교부에 속합니다. 니케아 후 교부들의 문헌은 두 가지 주제에 집중하게 됩니다. 하나는 금욕적 삶과 다른 하나는 신학적 주제입니다. 암브로시우스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유는 생애에서 간략하게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1. 생애와 주요 활동

 

암브로시우스의 생애는 파울리노가 쓴 <암브로시우스의 생애>로 인해 어느 교부보다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암브로시우스의 비서였던 파울리노는 어거스틴의 부탁으로 저술하게 됩니다. 2천년에 가까운 시간으로 인해 검증은 불가능하지만 대체로 그대로 받아도 무리는 없어 보입니다. 간략한 그의 생애는 이렇습니다.

 

암브로시우스는 340년 경 독일 지방인 트리어에서 태어납니다. 암브로시우스라는 이름은 그리스에서 온 것으로 불멸을 뜻합니다. 그의 아버지가 그리스를 선망했던지 그리스 지역의 어느 지역 출신이 아닌지 조심스럽게 추측만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전설에 의하면 암브로시우스가 태어날 때 꿀벌들이 날아와 그의 입술을 지식의 단물로 축였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 전설은 탁월한 설교와 정치적 영향력을 가진 그를 추앙하기 위해 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귀족출신의 갈리아 지방 총독이었습니다. 유년 시절 트리어에서 초등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일찍 세상을 떠나자 가족들은 로마로 돌아갑니다. 로마에서 암브로시우스는 철학과 당시에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수사학을 배우게 됩니다. 그 외에도 인문학자들이 배워야할 많은 학문들을 배우게 됩니다. 암브로시우스가 명석한 두뇌를 가진 것도 사실이지만 그가 그렇게 되기까지는 그를 물심양면(物心兩面)으로 그를 도왔던 안치오 프로부스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아버지의 친구였고, 로마 황제의 근위 대장이었습니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안치오 프로부스로 인해 암브로시우스는 어릴 적부터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었고, 적지 않은 사상적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그가 갑자기 예비신자의 신분에서 주교로 추대 받은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암브로시우스의 결단력과 명석함은 젊은 시절부터 변호사로 출세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의 직업은 후일에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기독교적 경제관과 금욕적인 생활, 이단에 대항하는 논리적 치밀함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서른두 살에 그는 로마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1세에 의해 밀라노에 관저를 둔 에밀리아 리구리안 지방의 통치자가 됩니다. 당시 밀라노 교회는 심각한 대립 상태에 놓여 있었습니다. 밀라노 주교였던 아욱센티우스가 죽자 주교를 후임자 선출을 두고 아리우스파와 정통교회가 싸웠습니다. 아리우스파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했고, 당시에 로마 전 지역에 깊숙이 뿌리 내리고 있었습니다. 각 교회마다 자신들의 원하는 주교를 세우기 위해 후임자 선출은 늘 긴장감과 대립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밀라노 교회는 그동안 아리우스를 지지하던 아욱센티우스가 죽자 정통교인들이 자신들이 원하는 지도자를 세우기 위해 강하게 반발하기에 이릅니다. 갈수록 치열한 대립 구도가 형성되자 밀라노에 적지 않은 소란을 일으킵니다. 지역 통치자였던 암브로시우스는 주교 선출을 중재하기 위해 교회로 들어가 연설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의 연설은 명확하고 우렁찼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어린아이가 암브로시우스 주교!’라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대립했던 사람들 모두가 함께 암브로시우스 주교!’라고 한목소리로 외쳤습니다. 암브로시우스는 사양했지만 사람들은 물러나지 않았습니다.

 

암브로시우스는 성격이 강직하고 곧았습니다. 그는 주교가 되어달라는 교인들의 청을 완강히 거부합니다. 아직 학습교인이고 총독의 자리를 황제의 허락 없이 내려놓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 믿었습니다. 밀라노 교인들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강청합니다. 당시 로마황제였던 발렌티안 1세에게 사람들을 보내 밀라노 감독이 되어 달라고 부탁하기에 이릅니다. 암브로시우스를 신임했던 황제는 크게 기뻐하고 환영합니다. 아마도 로마교회에 있어 두 번째로 중요한 밀라노 교회를 자신이 신임하는 신하가 감독이 된다는 것은 황제에게 큰 득이 된 것을 보았던 것이 분명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부르심을 직감하고 곧 세례를 받고 374127일에 밀라노 주교가 됩니다.

 

주교에 올라 그가 감당했던 직무는 혹독한 것이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예비신자로 기독교적 소양에서 자라났지만 정식적으로 성경을 배우고 강해한 적이 없었고, 교회 행정과 목회를 배우지 않아 모든 것이 낯설었습니다. 그는 가장 먼저 밀라노 교구의 심플리키아누스 감독의 지도를 받아 성경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후에 그는 암브로시우스의 후계자가 되어 밀라노교회를 맡습니다. 다행히 암브로시우스는 헬라어에 능통했기에 필론과 오리게네스 성경 주석을 통해 성경을 배웠고, 목회를 배워 나갔습니다. 곁에서 지켜본 파울리노는 암브로시우스가 자주 단식과 기도를 병행하는 수도승과 같은 삶을 살았다고 증언합니다. 심지어 주교가 되자 자신이 가지고 있던 재산을 교회와 사회에 환원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도록 했습니다. 목회활동을 하면서도 이단을 대항하고 교인들을 교육하기 위해 적지 않은 책도 저술했습니다. 특히 그의 책들은 설교를 받아 정리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책을 썼습니다. 갑자기 예비신자에서 감독의 자리에 오른 자신의 부족함을 그의 책 <성직자의 의무>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법원과 행정기관에서 일하던 나는 갑자기 사제직을 떠맡게 되었는데, 내가 배우지 않은 것을 여러분에게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배우기도 전에 가르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미리 배울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배우면서 동시에 가르쳐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암브로시우스의 고백은 겸손에서 나온 것이지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가문은 조상 중에 순교자가 있었고, 누나였던 마르켈리나는 수녀가 되었습니다. 또한 형인 우라니우스 사튀루스는 암브로시우스가 감독이 되자 직업을 버리고 밀라노 교회의 하급성직자가 되어 형을 도왔습니다. 이뿐 아니라 예비신자로 있으면서 요세푸스의 <유대 전쟁기>를 라틴어로 번역했고, 열왕기상. 하를 주석한 적도 있습니다. 이것은 그가 예비신자였을 뿐이지 신학이나 성경이 절대 문외한이 아니었습니다. 암브로시우스는 감독이 된 후 눈에 띄는 몇 가지 일에 집중했습니다. 하나는 금욕적인 생활이었습니다. 거의 국가 종교가 된 기독교는 점차 권력과 결탁하고 세속적인 성향으로 변질되어 갔습니다. 반동으로 적지 않은 사람들은 사막으로 들어가 은둔생활을 하거나 수도사가 되어 금욕적인 생활을 하게 됩니다. 암브로시우스는 형의 영향을 받아 수도사와 같은 금욕적인 생활을 했습니다. 주로 채식을 했고, 고기는 매우 조금씩 섭취했습니다. 금식을 자주했으며, 포도주는 마시지 않았고 교인들에게도 금주(禁酒)를 권장했습니다. 또 하나는 성경 연구였습니다


어거스틴의 참회록에 의하면 암브로시우스는 항상바쁘고 분주한 것처럼 보였고, 소리를 내지 않고 묵독으로 성경과 다른 책들을 읽었다고 합니다. 세 번째는 적지 않은 시간을 교인들을 상담하고 지도하는데 시간을 쏟았습니다. 특별히 가난한 사람들에게 대한 관심은 지대했습니다. 그의 저작들의 많은 부분이 가난한 자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마지막 네 번째는 아리우스파와의 논쟁이었습니다. 당시 서방교회는 예수의 신성을 부정했던 아리우스파가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습니다. 정통 신학을 따랐던 암브로시우스는 저작과 정치적인 힘을 발휘해 아리우스파를 381년 콘스탄티노플 회에서 이단으로 정죄하기에 이릅니다. 일생 동안 그는 가난하게 살았고, 제국의 권력자들에게 굴하지 않는 용맹함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뜨겁게 한 시대를 살다 397년 주님의 품에 안깁니다.

 


2. 저서

 

그의 저서는 오직 두 권만 한글로 번역되었지만 약 40권의 저서를 펴냈습니다. 대부분은 설교이며, 그의 강해설교를 속기로 기록하여 수정 편집한 것들입니다. 대표작으로는 <6일 창조론> <아브라함> <죽음의 선함에 대하여> 있습니다. 밀라노 교구에 속한 목회자들을 위해서 펴낸 <성직자들의 직무론>이 있습니다. 주제별로 간단하게 정리해 봅니다.


 

먼저 주석과 강해집이 있습니다. 이 책들은 대체로 속기한 것을 다시 주정한 것들입니다. 신약성경 강해집은 <누가복음 강해>가 유일합니다. 나머지는 모두 구약 강해집입니다. 신약이 아닌 구약에 집중한 이유는 영지주의 계통의 이단들인 말시온과 그 부류들이 구약의 하나님을 열등한 하나님으로 평가 절하하는 것을 변증하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감독 초기 시절의 <낙원론>이 있고, <가인과 아벨>이 있습니다. 구약 외경 도비야서의 주인공 도비야한 관한 설교인 <토빗 이야기>가 있고, 풍유적 해석이 강한 <노아 이야기>, 아브라함의 생애를 다룬 <아브라함 이야기>가 있습니다. <6일 창조론> 또는 <헥사헤메론>으로 부르는 책이 있는데, 창세기 1장의 6일 창조 이야기를 다룬다. 그 외에도 <시편 118편 강해> <족장 요셉 이야기> <엘리야와 금식론> <나봇 이야기> <족장론> <세속 도피론> 등이 있습니다.


 

교리서도 적지 않습니다. 교리서는 이단들을 향한 것이며, 대부분이 삼위일체논쟁과 기독론 논쟁을 위한 것들이었습니다. 유사파와 아리우스파를 대항하여 삼위일체 교리를 옹호한 <신앙론>이 유명합니다. 성령을 무시하거나 성부와 성자에게 종속된 어떤 것쯤으로 여기는 이단과 잘못된 신앙인들을 위해 성령의 완전한 신성과 인격성을 강조한 <성령론>이 있습니다. 그 오에도 <주님의 성육신의 신비론> <회개론> <죽음의 선함에 대하여> <성례론> <신경 해설> 등이 있습니다. 교리서들은 성경 속에 나타난 중요한 교리들을 정리하고 체계적으로 세우는 작업이었습니다. 암브로시우스는 이전 교부들의 문헌을 자주 읽었고 깊이 연구했습니다. 서방 4대 교부로 불리는 그의 능력은 선배들의 탁월함을 종합하고 정리하는 힘을 가진 덕분이었습니다.


 

마지막 윤리서가 있습니다. 목회자를 위한 <성직자의 의무>가 있고, 교인들의 삶을 지도하기 위하여 <과부론> <동정론> <동정 예찬> 등이 있습니다. 윤리서들은 스스로가 원했던 금욕적인 생활의 성경적 근거와 방법들을 말해 줍니다. 동정녀 마리아를 예찬하는 듯한 동정론책들은 대부분 과부들이 재혼하지 않고 정절을 지키며 금욕적 삶을 살아갈 것을 권면하기 위한 내용입니다. 암브로시우스의 형향으로 밀라노와 주변에 수도원이 생긴 것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금욕적인 삶을 사모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당시만 해도 수도원은 교회와 연결되어 있었고, 수도사이면서 감독인 경우가 적지 않았습니다. 교회의 국교화와 타락은 많은 사람들을 사막으로 몰아냈습니다. 하지만 암브로시우스는 도시 안에서 수도원을 건립하고 수도생활을 할 수 있는 모범을 보였습니다.


 

3. 나봇 이야기

 

<나봇 이야기>는 구약 열왕기상 21장의 이스라엘 사람인 나봇의 이야기입니다. 아합이 궁권을 짓기 위해 나봇에게 포도밭을 팔라고 합니다. 나봇은 자신은 원해도 여호와께서 금하신 일이며, 또한 조상들이 물려진 기업을 팔수 없다고 거절합니다. 아합의 아내인 이세벨이 아합의 이야기를 듣고 거짓 증인들을 세워 나봇을 돌로 쳐 죽이게 됩니다. 나봇의 이야기는 탐욕으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악을 행한 부자와 권력자들의 심판이 담겨 있습니다. 당시 밀라노를 비롯한 로마 많은 지역에서는 부한 자들이 권력자들과 결탁하여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는 악이 횡행했습니다. 법적으로 합리화된 폭압과 착취는 부유한 자들은 더욱 부유하게 하고, 가난한 자들은 더욱 가난하게 만드는 악순환의 고리가 되었습니다. 암브로시우스는 부자들의 탐욕을 낱낱이 드러냄과 동시에 발전과 개발이라는 미명아래 가난한 자들이 쫓겨나고 희생되는 사회적 부조리를 폭로합니다.


 

나봇 이야기는 모두 17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각 장의 주제를 요약하거나 일관성을 부여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종일관 부자들의 악들을 열거하며, 그 기원이 무엇인지 말하려고 애씁니다. 나봇 이야기를 시작하는 문장은 이 후의 모든 이야기를 끌고 갑니다.


 

나봇 이야기는 옛날 일이지만 날마다 벌어지고 있습니다. 날마다 다른 사람의 것을 탐내지 않는 부자가 누구입니까? 어떤 재벌이 가난한 사람을 그 작은 밭에서 내쫓지 않으며, 궁핍한 자를 조상의 땅 끝자락에서 몰아내지 않습니까? 그 누가 자신이 지닌 것만으로 만족합니까?”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나봇과 부자는 조금도 변한 것이 없다고 선언합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함께 사용하도록 창조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부자들은 하나님의 창조원리를 거부하고 자신만의 소유로 전락시키는 탐욕을 부립니다.

 

우린 여기서 암브로시우스가 생각하는 부자에 대하여 살펴봅시다. 야보고도 그랬지만 황금의 입이라 칭했던 존 크리소스톰도 부자들에 대해 냉혹할 만큼의 직설적인 설교를 했습니다. 암브로시우스의 <토빗 이야기><나봇 이야기>는 그동안 설교나 교훈으로서의 권면을 넘어 부자의 정체를 폭로하고, 그들의 탐욕을 책망하며, 숨겨진 악의 근원을 추적하고 있습니다. 부자들은...


 

-모으기를 좋아합니다.

 

부자들의 가장 큰 특징은 모으기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쌓고 모으기를 그 어떤 것보다 좋아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탐욕이라고 부릅니다. 탐욕은 자신의 형편에 만족하지 않고 남의 것을 자신의 것으로 갖기를 원하는 갈망입니다. 그래서 부자들은 창고가 많이 있습니다. 그 창고에는 수많은 곡식이 쌓여 좀먹고 썩어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더 쌓으려고 합니다. 그들의 통장에는 수년 동안 한 번도 꺼내지 않은 셀 수 없는 돈이 있습니다. 부자들은 땅을 차지하고 그곳에서 일하는 소농들을 자신들의 노예로 만들거나 쫓아냅니다. 그래서 종종 부자들이 구입한 땅에는 잡초들이 숲이 되어 있습니다. 묵은 땅이 됩니다.

 

그대는 가질수록 더 원하고, 그 무엇을 지닐지라도 여전히 그대에게는 부족하기만 합니다. ... 재산이 늘어날수록 탐욕도 커집니다.”

 

부자들은 말합니다. “더 큰 것들을 지어야지.” “거기에다 나에게 생긴 모든 것을 모아 두어야겠다.” 부자들의 머릿속에는 오직 무엇인가를 쌓아두는가만 생각합니다. 다른 생각은 없습니다. 하루 종일 돈을 벌고, 이익을 남기고, 손해 보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칩니다. 이것이 첫 번째 특징입니다. 두 번째 특징이 있습니다. 부자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잘 모릅니다.

 

부자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아무 것도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즉 가난하게 태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자연은 모든 인간을 가난하게 낳은 까닭에 부자들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옷도 걸치지 않고, 금과 은도 지니지 않은 채 태어납니다. 이 땅은 우리를 벌거숭이로 낳으며, 음식과 옷과 마실 것이 필요한 존재로 낳습니다. 땅은 우리를 벌거숭이로 낳았듯이 벌거숭이로 맞아들입니다.”

성경은 사람이 원래 먼지였고, 죽으면 다시 먼지로 되돌아가 간다고 일러 줍니다.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런데 부자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고 영생할 것처럼 모으고 또 모읍니다. 그것처럼 어리석은 것은 없습니다. 세 번째 특징은 비참합니다. 부자들은


 

-가난한 자들입니다.

 

겸손을 상징하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가난은 만족하지 못한 탐욕의 결과입니다. 탐욕은 언제나 만족할 줄 모르고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모으고 소유하고 싶어 합니다. 탐욕을 소유하면 할수록 더욱 강력해 집니다. 행성이 커질수록 중력이 강해지는 것과 같습니다.

 

풍족하게 사는 사람은 저마다 자신이 더 가난하다고 여깁니다. 다른 사람들이 소유하고 있는 것은 무엇이든 자기에게 부족하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에게는 온 세상도 모자라고, 세상은 그 탐욕을 다 담아낼 수 없습니다.”

 

부자들은 스스로 가난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만족하지 못하고 늘 불만에 가득 차있습니다. 또한 남의 것을 소유하고자 끊임없이 생각하고 고민하고 걱정합니다. 그래서 부자들은 비참한 것입니다. 탐욕에 사로잡힌 부자들은 나누지 못합니다. 항상 부족하고 가난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네 번째 부자들의 특징이 나옵니다. 부자들은


 

-이웃이 없습니다.

 

그들은 나누는 방법을 모릅니다. 부자들은 자신의 부가 자신들의 힘으로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먹는 밥, 입는 옷, 즐기는 여유는 그들이 착취하고 강압적으로 위협하여 노예로 삼은 가난한 자들이 한 것들입니다. 그들은 늘 가난하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자신의 것을 나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탐욕스러운 인간은 식량이 풍부해지는 것보다 물가가 엄청나게 오르는 것을 더 좋아하고, 모든 이와 더불어 팔기보다는 독점 판매를 더 원합니다.”


 

직원들에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희생을 강요하고 월급을 적게 주려는 사장과 같습니다. 암브로시우스는 부자들의 식탁은 수많은 가난한 사람의 피를 대가로 치른 것입니다. 그 식탁에 차려진 잔에서는 죽음으로 내몰린 수많은 사람의 피가 뚝뚝 흘러내리고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 부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참된 부자들이 있습니다. 성경은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이 있다고 말합니다. 또한 그 보물을 팔아 천국을 사라고 권면합니다. 천국을 사는 것은 자신의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생을 묻는 청년에게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너는 나를 따르라. 그리하면 하늘의 보물을 얻게 될 것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진정한 부자는 하나님 앞에 부자이어야 합니다. 그는 재화를 쌓을 줄 모릅니다.’ 하나님과 그 아들을 빚쟁이로 만듭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빌려주는 사람은 하나님께 빌려드리는 것입니다.(참 잠19:17)

 


하나님께서는 그 가난한 사람 안에서 그대의 빚쟁이가 되십니다. 마치 그분께 빌려 드린 것처럼 말입니다. 그대 정의의 곳간을 열어젖힘으로써, 그대가 가난한 이들의 빵이 되고, 궁핍한 이들의 생명이 되며, 눈먼 이들의 눈이 되고, 고아들의 아버지가 될 때 비로소 재산은 선한 것이 됩니다.”


 

나가면서

 

<나봇 이야기>는 설교형식을 가지고 있지만 암브로시우스가 직접 쓴 것입니다. 이곳에는 이세벨에 의해 죽임을 당한 나봇이 상징하는 의롭고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는 부자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지금까지 그 어떤 교부 문헌보다 암브로시우스의 저작들은 가난한 자들의 편에 서서 부자들을 책망하고 그들의 횡포를 폭로합니다. 그는 감독이 될 때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자들과 교회에 환원(還元)했습니다. 그는 설교와 저술들을 통해 모든 사람들에게 선물로 준 재화들을 사유화하는 것을 비판하고, 나누지 않는 것은 도둑질이라고 외칩니다. 가난은 게으름이 아니라 부자들의 탐욕에 있다고 선언합니다. 지금도 진보적이라 할 만한 강력한 주장들이 1600년이 훌쩍 넘은 시기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암브로시우스의 설교와 이야기들을 통해 나의 것이기에 내 마음대로 사용해도 된다는 극단적 이기주의에 함몰되어 있음을 발견합니다. 우리는 <나봇 이야기>를 통해 영양분을 탐하면서도 오직 자신만을 위해 살고 죽지도 않는 암세포가 되어가는 우리 자신과 현대교회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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