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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과 기고글]/국민일보

[기독교고전읽기] 어거스틴의 <성령과 문자>

by 하늘땅소망 2017. 9. 26.

성령과 문자 De Spiritu Et Littera

어거스틴 / 공성철 옮김 / 한들출판사

*이글은 마이트웰브에 기고한 글입니다. 


1. 저작 동기와 시대적 배경


어거스틴의 생애는 논쟁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어거스틴이 살았던 시대는 다사다난하다는 말이 어울리는 시기였습니다. 비록 로마는 기독교를 인정하고 국교화했지만 얼마 가지 않아 고트족의 침입으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핍박으로 인해 배교자와 이교도들을 교회가 어떻게 받아들일까를 고심해야 했고, 수많은 이단들이 기독교를 공격해 오기 시작했습니다. 기독교가 정치적으로, 신학적으로 심각한 도전을 받았던 시기였습니다. 고트족의 침입과 게르만 족의 황제 폐위는 결국 천년의 영원한 도성처럼 보였던 로마를 완전히 역사에서 사라지게 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폭풍 가운데 어거스틴은 교회를 지키고, 성도들의 바른 신앙을 위하여 끊임없이 신학적 논쟁에 휘말려야 했습니다. 자신이 자처한 것이기도 하고, 누군가의 부탁으로 논쟁을 치러야 했습니다. 초기의 저작들이 철학적이고 사변적인 측면이 강하고 후기에 들수록 신학적이고 목회적인 책이 많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개인의 요구에 따라 살아가던 어거스틴이 주교가 되고 시대적 요청에 응답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멸망해 가는 카르타고와 교회를 걱정했습니다. 어거스틴의 중반 이후는 교회를 지켜내기 위한 신학적인 논쟁이었습니다.


어거스틴의 중요한 3대 논쟁은 먼저, 마니교와의 논쟁이고, 둘째는 도나투스파와의 논쟁, 마지막 세 번째는 펠라기우스와의 논쟁입니다. 세 논쟁은 시기적으로 분리되어 있지만 내용상으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먼저 마니교와의 논쟁에서는 악의 기원이 하나님이 아님을 증명했습니다. 어거스틴은 마니교와 논쟁을 그의 <자유의지론>이란 책을 통해 풀어 나갑니다. <자유의지론>에서 어거스틴은 악이 어떤 존재, 즉 신이 아닌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의지를 악용함으로 생겨난 것으로 보고, 악의 책임과 출처가 사람에게 있다고 말합니다. 두 번째 논쟁은 도나투스파와의 논쟁은 교회가 배교한 사람들을 받아 들일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어거스틴이 살았던 시대는 이미 핍박이 끝났지만 도나투스가 살았던 시대는 배교자에 대한 문제로 교회가 골머리를 앓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그 여파가 어거스틴이 살았던 시대까지 이어진 것입니다. 도나투스파는 배교자나 율법을 잘 지키지 않은 자들에 대해 교회가 엄격해야 하며, 그들을 교인으로 받아서는 안되다고 주장합니다. 한 번 세례를 받으면 결코 죄를 지어서는 안된다는 전제가 그들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죄를 지었을 경우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도나투스파는 교회의 거룩에 대한 극단적 염려로 인해 결국 보편 교회를 버리고 새로운 교회를 만들어 나가 분리주의자라는 별명에 얻기에 이릅니다. 어거스틴은 비록 세례를 받았다 할지라도 사람은 불안전하며, 회개하고 돌아온 자들은 교회가 받아 주어야 한다는 취지의 주장을 하게 됩니다. 세 번째 논쟁은 죄의 기원을 다룬 펠라기우스와 논쟁을 하게 됩니다. 마니교에서 이미 죄의 기원을 다루었지만, 펠라기우스와는 또 다른 의미로 죄의 문제를 다룹니다. 본론에서 다루겠지만 펠라기우스의 가장 큰 문제는 아담의 죄성이 후손들에게 전가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유의지를 통해 완전한 삶을 추구할 수 있다는 엄숙주의를 주장하게 됩니다. 펠라기우스와의 논쟁은 마니교와의 논쟁에서 죄의 기원, 도나투스파의 완전한 삶을 종합해야 하는 신학적 복합성을 띠게 됩니다. 우리는 이제 <성령과 문자>를 살펴보면서 펠라기우스 논쟁의 흐름을 짚어 나가 봅시다. 펠라기우스 논쟁은 이후에 일어날 수많은 이단들과 중세의 타락과 종교개혁, 그리고 회심과 성화의 문제까지 두루두루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2. 책의 구조와 내용


책은 전체 66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이 책에서 어떤 논리적 귀결이나 논증을 차근차근 풀어 나가지 않기 때문에 명확한 주제로 나누기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책의 전반적인 흐름에 따라 저는 아래와 같이 네 단계로 구분했습니다. 1은 서론 부분이고, 2.3은 본론에 해당하며, 마지막 4는 결론 부분에 해당합니다.

1) 1-4장 인간에게 완전함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2) 5-26장 율법(문자)는 죄를 깨닫게 합니다.

3) 27-53장 하나님의 은혜로 의로워집니다.

4) 54-66장 우리는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1) 1-4장 인간에게 완전함은 존재하지 않는다.

첫 부분은 인간에게 완전함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마르켈리누스에게 전하는 편지 형식으로 시작합니다. 이 책은 엄밀하게 펠라기우스를 논박하기 위하여 쓴 책이 아닙니다. 펠라기우스와의 논쟁은 이 책이 출간된 후 한참 후에 시작됩니다. 어거스틴은 유아세례와 인간의 완전한 의로움에 관한 작은 책자를 언급하는 것을 볼 때에 그것을 보완하기 위하여 쓴 것으로 보입니다. 인간에게 완전한 의로움은 없다는 것이 이 책의 요지이지만, 그것은 완전함을 추구했던 도나투스파를 논박하기 위한 중요한 논지였습니다. 완전한 거룩을 추구했던 도나투스파를 향하여 어거스틴은 인간은 절대 완전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절대 의로울 수 없다고 선언합니다. 이러한 논지는 어거스틴을 은총 박사로 부르게 되는 신학적 전제입니다. 어거스틴은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먼저 인간이 누구인지 간략하게 정의합니다.

인간은 어느 누구도 완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한다면 죄가 없는 인간이 있을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인간을 자기 안에서 살게 하시는 한 분 빼고는 이 땅에 누구도 이러한 완전함에 도달한 자가 없었고, 또 없을 것’(33)이라고 말합니다. 즉 가능성은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 외는 아무도 없었고,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 역사에 이미 나타났고, 증언 되었습니다. 최고, 최초의 인간이었던 아담도 그랬고, 탁월한 능력자였던 아담과 노아, 아브라함, 야곱, 아브라함, 모세 등등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 완전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시편 기자는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14:3)고 고백하며, 심지어 어거스틴도 시편 143:2 ‘주의 눈앞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를 인용하며 그것을 증언합니다.(35)

인간은 하나님의 힘이 필요합니다.

어거스틴은 여기서 중요한 한 가지를 지적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힘또는 하나님의 도움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도움으로 의로울 수 있다고 전제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스스로의 힘으로 절대 의로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움 없이 인간 의지의 힘이나 인간 자신의 의로움을 통해 이 완전함에 도달하거나 꾸준히 그를 향해서 전진할 수 있다고 여기는 자들에게는 아주 날카롭고도 사정없이 저항해야 합니다.”(37)

인간은 계명을 따라 살 때 영원한 삶을 얻습니다.

자칫 행위 구원의 문제로 보일 수 있지만, 앞으로 전개될 논지를 따라가면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성령의 순종하는 의지의 문제로 이어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선천적으로 주어진 자유의지를 가지고, 이미 제시된 길을 가며 꾸준히 그리고 의로우며 경건하게 살게 되면 축복되고 영원한 삶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39)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어거스틴이 주장하는 인간이고, 마지막 세 번째는 펠라기우스의 주장입니다. 펠라기우스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다고는 하지만, 스스로의 힘으로도 완전함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펠라기우스를 직접적으로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그의 저서를 읽고 해로움을 인지하여 이곳에 기록한 것으로 보입니다. 어거스틴은 비록 인간에게는 완전한 의로움의 가능성은 존재하지만 결코 완전할 수 없고, 하나님의 도우심(은총)으로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이에 비해 펠라기우스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하긴 하지만 그것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인간 스스로 얼마든지 영원한 삶, 즉 의로운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인간에 대한 전제를 가지고 다름 주제들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2) 5-26장 율법(문자)는 죄를 깨닫게 합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타락했습니다.

어거스틴은 곧장 자유의지의 문제로 넘어갑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죄짓는 것 밖에 다른 것을 할 수 없’(41)다고 말합니다. 즉 거듭나기 전의 인간은 자유의지가 정욕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있는 자유란 고작 악을 행하고, 불의를 선택하는 자유 밖에 없는 상태에 이릅니다. 후에 루터는 이것을 노예 의지라고 말합니다. 즉 인간은 성령의 도우심이 없다면 악한 삶으로 점철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어거스틴은 중요한 것을 지적합니다.

말하자면 꾸준히 그리고 올바르게 살라는 명령을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은 성령이 함께 하지 않으면 죽이는 문자에 불과합니다.”(41)

문자는 율법, 또는 계명을 말합니다. 그런데 왜 살리는 율법이 사람을 죽일까요? ‘모든 죄는 탐욕을 통해서만 존재하기 때문입니다.’(43) 타락한 인간은 절대 스스로 선을 행할 수 없습니다. 바로 이 부분에서 율법이 주어질 때 율법은 인간으로 하여금 선을 행하도록 이끄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범하도록 만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은 그들의 마음에 성령을 통해서 사랑을 불어넣어 주셨기 때문’(47)입니다. 성령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악을 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문자(율법)는 인간의 탐욕을 이끌어 냅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받지 못한 인간의 자유의지는 결국 악을 행하게 됩니다. 선을 행할 수 없고, 악만을 행하는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계명은 인간들의 악을 더욱 선명하게 합니다.

오히려 우리가 위에서 말했던 것같이 죄를 지으면 안 된다고 가르치는 율법의 문자는 살리는 영이 없으면 죽이는 것이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율법의 문자는 죄를 막기는커녕 알게 하며, 악한 욕망에 더하여서 율법을 범함도 덧붙여지기 때문입니다.”(49)

율법은 인간이 누구인지 보여 줍니다.

여기서 율법의 역할은 죄를 죄 되게하고, 우리의 심령을 가난하게 합니다. 율법은 바울의 주장처럼 죄를 깨닫게 합니다.(7:7) 율법을 마치 거울과 같아서 거울을 보지 않을 때 사람들은 자신이 더러운 줄 모르다가 거울을 보고 더러운 것을 발견합니다. 칼빈은 하나님에 대한 신지식이 하나님 없이(계명)는 불가능하다고 선언합니다. 바른 인간관은 절대 거룩이신 하나님과 악의 실체인 인간을 비교함으로 갖게 됩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아래와 같이 결론을 내립니다. 그래서 바울은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3:21)고 충고합니다.

그러므로 문자의 오래됨은 성령의 새로움이 없으면 죄로부터 자유케 하기보다 죄를 알게 함으로 죄인을 만든다는 것이 분명합니다.”(103)


3) 27-53장 하나님의 은혜로 의로워집니다.

율법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율법이 죄를 드러내고 사람들을 정죄하는 것으로 끝나는가? 아닙니다. 율법의 목적은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바울은 비록 율법이 우리를 죽이게 하지만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은혜입니다. 그것은 이미 구약에 숨겨져 있으며, ‘그리스도 복음 안에 드러난 것입니다.(105) 은혜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그 선물은 이미 두 돌판에 기록된 율법 안에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지키는 그 비유의 그림자 속에 있습니다.’(107)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율법을 통해 완전하게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사랑은 율법의 완성’(13“10)이라는 바울의 말을 가져와 율법은 결국 사랑으로 완성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법은 사랑’(109)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법은 사랑입니다. 여기에 육신의 지혜로움을 굴복치 않았습니다. 그리고 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돌판에 사랑의 일들을 기록함으로써 이 육신의 지혜로움을 두렵게 하려고 행위의 법과 범죄자를 죽이는 문자가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믿는 자들의 마음에 부어지는 것이라면, 믿음과 영의 법은 사랑하는 자를 살리는 것입니다.”(109)

사랑은 성령으로 능력으로 가능합니다.

율법이 주어짐으로 사람들은 더욱죄인이 되었습니다. 율법이 하는 일은 죽음의 직무이며 정죄의 직무’(113)입니다. 사람의 자유의지는 결코 이웃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어거스틴은 여기서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신약으로 끌고 옵니다. 신약의 직무를 영과 의의 직무로 표현하며, ‘성령의 선물로 인해서 우리가 의를 이루며 범법함의 저주로부터 자유함을 얻’(113)는 다고 말합니다. 성령으로 인해 얻는 자유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자유에서, 사랑할 수 있는 자유입니다. 이로 인해 죄인들은 하나님의 의가 됩니다.(고후 5:21) 성령이 없는 율법이 사람을 죽였다면, 성령에 의한 삶은 의로운 삶을 살게 합니다.

자유의지로 사랑을 행하며 기뻐합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본성이 자체가 변화된 사람입니다. 그는 이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성태가 아니라 죄를 짓지 않고 선을 행할 수 있는 상태가 됩니다. 그는 본성적으로 하나님을 기뻐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삶을 통해 그것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건강한 영혼은 형벌을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의를 사랑하기 때문에 선을 행하게’(171) 됩니다. 성령이 없는 자유의지는 본성적으로 욕망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자유롭지 못합니다. 필연적으로 멸망의 길로 떨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자유케 하는 아들의 자유’(8:36)가 있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선을 행합니다.


4) 54-66장 우리는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합니다.

이제 마지막 부분에 도달했습니다. 하나님의 도움, 또는 선물, 또는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들은 불가피하게 악합니다. 그들에게 선을 행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들의 자유의지는 정욕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악합니다. 그들은 형벌의 두려움 때문에 자기의 의를 세우려고 애를 쓸 뿐..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185)합니다. 그들은 종이기에 행함은 있으나 두려움이 지배하고, 절대 기뻐할 수 없습니다. 그에 비해 성령의 사람은 아들이기에 자신의 공로가 아닌 그리스도의 의를 신뢰하여 자유와 기쁨이 가득합니다. 자신의 힘으로 의로워질 수 없음을 알기에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을 사랑합니다. 이것이 곧 사랑함으로 역사하는 믿음’(189)입니다.

그 사랑은 성령을 통해서 우리 마음에 부어 주시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일’(191)입니다. 또한 하나님께 왔으니 자랑할 것이 못됩니다. 더 나아가 성령 안에서의 행위는 육체적으로는 죽음의 부패로부터 구원되며, ... 면류관을 받으며 이 땅의 선한 것뿐 아니라 영원에 속한 선한 것으로 배불리게 될 것’(197)입니다.

율법(문자)를 더 세우게 됩니다.

결국 다시 율법의 문제로 돌아가면 성령의 도움으로 율법을 완성하고, 더욱 힘써 율법을 행하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도우심은 하나님 앞에 완전한 자로 만들어 줍니다. 왜냐하면 이웃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영혼은 불의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으며 믿음으로 부터, 곧 아름다움으로 인도되는 동안,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으로 삽니다. 이 사랑은 우리 자신의 충만한 원함이나 율법의 의문을 통해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주신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우리 마음에 부어지는 것입니다.”(201)

인간의 삶은 부족함으로 꽉 차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율법의 목적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라는 의미 속에는 타인의 부족함과 연약함이 담겨 있습니다. 물론 사랑은 서로 사랑이기에 자신의 허물도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책을 마무리 지으면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6:12)를 언급하며 용서받기 위해서 용서해야만 합니다’(219)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할 때 그들에게 은총의 영이 개입하여 훗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영원히 사는 데 필요한 의로움도 완성시킬 것입니다.(221)


3. 나가면서

펠라기우스는 어린아이를 경멸했습니다. 그들은 어른들인 부모에게 종속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아담의 죄로 인해 훼손되지 않았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총이 필요하지만 그것은 부가적인 것이지 본질적인 변화를 주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아직도 아담처럼 선을 행할 능력과 악을 행할 능력이 타락한 인간에게 남겨져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교묘하게 인간 스스로 선을 택하고, 그 선으로 완전함에 도달할 수 있었다고 믿었습니다. 펠라기우스의 주장에는 치명적인 교리적 독이 숨겨져 있습니다.

아담이 원래 죽을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죽음이 죄의 결과가 아님을 의미합니다. 또한 유전되지 않는 아담의 죄는 아담의 대표성을 부정할 뿐 아니라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의미를 부정하게 됩니다. 모든 선택을 인간 스스로 할 수 있다는 그의 주장은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를 부정하며, 구원조차 인간의 자력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결국 인간은 스스로 노력하여 자신의 선행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가 말하고 싶은 것은 바로 하나님과 상관없는 인간의 자유였습니다. 인간이 주인이 되어 스스로 모든 것을 선택하고 배제하며 결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확하게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기로 결심했을 때의 궤략입니다.

비록 펠라기우스를 반박하기 위하여 쓴 글은 아니지만, 이 책은 펠라기우스의 주장을 가장 효과적으로 반박할 수 있는 내용을 실었습니다. 어거스틴은 이 책을 재고하면서 스스로 펠라기우스주의를 가장 근본적으로 파괴한 책으로 생각했습니다. 루터는 이 책을 통해 오직 은혜라는 구호를 만들어 낼 만큼 사랑했습니다. 잘 알려진 <자유의지론>보다 이 책이 펠라기우스의 주장을 정확하게 반박하고 있는데, 그 무기는 바로 하나님의 선물또는 하나님의 은총이나 선물로 표현되는 것들입니다. 어거스틴은 이곳에서 인간에게 있는 자유의지는 아담으로 인해 회복할 수 없을 만큼 타락했으며,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으로만 의롭게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하나님 의존적으로 창조되었습니다. 모든 만물 역시 홀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피조물은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얻고 이어갑니다. 인간은 연약하고 허물 많은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우심(은총) 없이는 사랑할 수 없고 악을 행하게 됩니다. 필연적으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으며, 구제불능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사람들을 사랑하시어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은혜(성령)를 부어 주십니다. 성령은 영혼을 거듭나게 하여 지성과 마음을 새롭게 하며, 의지에 힘을 주어 선을 행할 수 있도록 합니다. 이후 사람들은 사랑의 존재이며, 사랑하며 살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한 어거스틴의 주장은 인간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펠라기우스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살아감 자체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솔리데오 글로리아!(Soli Deo Gloria)


은총론 1
국내도서
저자 : 필립 샤프 / 차종순역
출판 : 기독교문사 1996.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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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총론 2
국내도서
저자 : 필립 샤프 / 차종순역
출판 : 기독교문사 1997.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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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총론 3
국내도서
저자 : 필립 샤프 / 차종순역
출판 : 기독교문사 1997.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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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거스틴의 은총론 4
국내도서
저자 : 필립 샤프(Philip Schaff) / 차종순역
출판 : 기독교문사 1998.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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