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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성경묵상] 요한복음 1:9-18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샤마임 2021. 1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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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성경묵상 요한복음
매일성경 묵상 요한복음

[매일 성경 묵상] 요한복음 1:9-18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1: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9절과 10절은 요한복음의 주제이자 예수님의 생애 전반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축약적으로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참 빛으로서 세상에 왔지만 세상은 그를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가리어졌고, 감춰졌습니다. 그는 세상에 널리 증거 되고 알려졌지만 동시에 숨겨진 존재였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가르치실 때 비유로 가르침으로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리셨습니다. 하지만 바로 비유로 인해 오히려 감추어지기도 하셨습니다.

  • 마 13:35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 마 13:14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13:15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진정한 비유, 진정으로 가르치고 싶었던 것은 예수님 자신이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이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하지만 요한은 육신 속에 숨겨져 신성을 알아보지 못한 예수님을 밝히 드러냅니다.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지은 바 되었)'습니다.

 

요 1: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지 아니함과 알지 못함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무지는 악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의 죽음이 유대인들의 무지로 인한 것임을 폭로합니다.

  • 행 3:17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으며 너희 관리들도 그리한 줄 아노라

하지만 무지로 인한 죄가 죄가 아니까요? 모르고 사람을 죽이면 살인죄가 아닐까요? 아니요! 동일한 살인자이며 대가를 받아야 합니다. 사람들의 무지는 진리에 대한 사랑과 생명에 대한 갈급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영접은 단순한 손님을 맞는 행위를 너머 섭니다. 요한은 영접은 '앎'으로 정의합니다. 영접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갖는데, 그들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입니다. 하나님께로 난 자들이란 표현은 하나님을 아는 자들입니다.

 

고대 세계에서 '영접'은 곧 '환대'를 뜻합니다. 환대는 위험한 것입니다. 자비를 베풀어 나그네를 집안에 들였지만 나그네가 강도로 돌변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영접은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하는 지극히 위험한 행위로 돌변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정상적인 사람들은 영접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맞아들이는 영접은 그러한 문화적 맥락 속에서 설명합니다. 영적은 가장 위대한, 위험한 빅딜이자 치환 작용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생명을 예수님께 내어 맡긴 자들입니다.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는 요한복음 핵심이자 주제입니다. 요한복음은 하나님이 사람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헬라철학의 영향을 받은 이들(후에 영지 주의자가 됨)에 대한 반박입니다. 이러한 주장은 요한 서신에서도 다시 반복됩니다.

헬라철학의 치명적 위협은 물질과 정신의 분리이며, 물질을 열등한 것이나 악한 것으로 치부한 것입니다. 이러한 그릇된 관념은 후에 행위와 정신의 분리를 가져왔고, 지식만 있으면 몸(행위)은 타락해도 구원받는다는 극단적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이러한 잘못된 주장은 현대의 *천지나 *원파 등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이에 반해 히브리인들은 말씀이 곧 존재이기에, 지식과 행위를 하나로 보았습니다.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는 마태복음에서는 곧바로 '임마누엘'로 표현합니다. 이 표현의 직역은 '장막을 친다'는 뜻입니다.

Καὶ ὁ Λόγος σὰρξ ἐγένετο καὶ ἐσκήνωσεν ἐν ἡμῖν, καὶ ἐθεασάμεθα τὴν δόξαν αὐτοῦ, δόξαν ὡς μονογενοῦς παρὰ Πατρός, πλήρης χάριτος καὶ ἀληθείας.

'σὰρξ ἐγένετο' 육체로 오셨고, 'ἐσκήνωσεν ἐν ἡμῖν'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셨다.는 표현입니다. 아마도 이러한 표현은 '영접'이란 단어와 잘 맞아떨어집니다. 하지만 역전현상이 일어납니다. 분명 사람들이 영접을 했지만 집(텐트)은 예수님의 것이니 말입니다. 요한은 즉시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고 선언합니다.

 

1:15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1:16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1: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다시 요한이 등장합니다. 요한은 '증언자'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말합니다. 예수님의 선재성 즉 하나님 되심을 말합니다. 율법과 은혜와 진리를 비교함으로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드러냅니다. 모세는 율법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모세인 예수 그리스도는 '은혜와 진리'(ἡ χάρις καὶ ἡ ἀλήθεια)를 세상에 가져옵니다.

요한은 율법과 모세를 연결하고, 은혜와 진리를 예수님께 연결함으로 새로운 모세로서의 지위를 설명하는 동시에 이전의 모세를 능가하는 분으로 소개합니다. 율법은 공의는 있지만 생명은 없습니다. 

율법은 정죄하기는 하지만 용서하지는 못합니다. 율법은 죽은 제사지만 은혜는 산 제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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