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소리치고 싶을 때
고난의 의미를 묻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 소리치고 싶을 때 : 욥기]를 읽고
크레이그 바르톨로뮤 / 송동민 옮김 / 이레서원
“불교는 인과론입니다.”
1991년 뉴욕에서 있었던 달라이 라마의 강연의 한 부분이다. 한 시간 넘게 이어진 그의 강연에서 기억나는 단 하나의 문장이다. 그는 인과론을 통해 환생과 전생의 업 등을 설명해 나갔다. 그의 주장은 과학적으로 밝힐 수 없으나 종교적 상상력으로는 논리적 타당성을 갖는다. 불교도들이 이야기하는 ‘전생’은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아닌 것이다. 인과론에 근거한 불교는 철저하게 전생(과거)에 종속된 종교이다. 현재의 삶은 전쟁에 어떤 삶을 살았느냐에 따라 필연적 운명이 결정된다. 즉 전생에 어떠한 삶을 살았느냐에 따라 현생이 결정되고, 현생에서 어떠한 삶을 사느냐는 곧 후생이 결정된다. 초기 불경 중의 하나인 ‘능엄경’에 윤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부루나여, 생각과 사랑이 함께 맺어져서 애욕을 여읠 수 없어서, 모든 세간의 부모와 자손이 서로 낳아 끊이지 않나니, 이러한 탐욕으로 인해 살생, 도둑질, 음욕 등이 생겨 윤회의 근본이 되느니라.”
현재의 고난과 고통이 전생이나 과거의 일로 인해 결정된다고 보는 것은 불교뿐만은 아니다. 성경에서도 제자들이 날 때부터 소경인 자를 보고 예수님께 묻는 장면이 나온다.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요 9:2)
예수님은 지혜롭게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며 전혀 다른 답을 한다. 제자들의 생각, 아니 모든 사람들의 생각 속에는 고난에는 뜻이 있는데, 그것은 ‘죄 때문’이라는 암묵적 공식을 가지고 있다. 죄는 반드시 값을 치러야 한다는 ‘공의’에 입각한 추론이다. 삶을 해석하는 ‘편견’이나 ‘정죄’의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고난을 죄의 응보, 즉 죄의 값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성경이 이미 지지하고 있으며, 마지막 죽음으로 모든 죄의 값이 지불된다는 공식과도 그리 달라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모든 죄는 인과론, 즉 죄를 지으면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보편적 공식을 수용해야만 한다. 욥기는 여기에 당당히 반론을 제기한다. 고난이 반드시 죄의 대가는 아니며, 인과론에 의한 필연적 결과가 아니라고 답한다. 그럼 욥은 고난은 왜 당했을까? 우리는 이 질문을 가지고 책 속으로 들어가 보자.
이 책은 얇다. 첫 장이 9쪽에서 시작해 마지막인 128쪽, 그리니까 전부 합해도 119쪽에 불과한 아주 얇은 책이다. 42장이나 되는 욥기에 이 짧은 분량으로 주해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이 책의 정체는 무엇일까? 저자인 크레이크 바르톨로뮤는 브리스톨 대학교에서 전도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또한 베이커 주석의 전도서 집필자이기도 하다. 잠언과 전도서, 욥기는 성경에서 매우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면서 지혜서로 구분한다. 유대인들은 욥기를 시편과 잠언과 더불어 시가서로 분류하며 성문서인 케투빔 안에 넣었다.
알다시피 욥기의 결론은 모호하다. 고난이 무엇인지? 왜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답을 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욥기는 분명 지혜서이고, 삶이 무엇인지 실존적 질문을 던지며, 답을 얻는다. 그 답은 결론이 아닌 여정에 있다. 어떠한 답을 얻기 전에 욥의 고뇌에 찬 성토(聲討)는 이유 없는 고난 당하는 자들에게 위로가 된다. 죽은 자식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잃은 돈은 다시 찾을 수 없다. 고난은 필연적으로 ‘소외’ 되고 소외 시킨다. 고난은 관계에 치명적 독이다. 대개 고난 당하는 자들에게 접근하는 것은 쉽지 않으며, 고난 당하는 자가 일반인들에게 접근하는 것도 상당한 부담을 준다. 이 책은 욥기를 순서적으로 해설한 것은 아니다. 주제별로 글을 엮었다. 고난을 통해 변화해 가는 여정에 맞추어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저자는 서론에서 욥기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성경의 욥기는 그 주된 등장인물이 더 깊이 있는 사람이 되어 가는 과정에 관한 이야기인 동시에, 이 책을 읽는 이들 역시 하나님이 그 성품을 빚어 가시게끔 그분께 자신의 삶을 내어 맡기도록 초청하는 이야기다.”(9쪽)
7장에 '욥과 예수님'에서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를 신자들의 고난에 잇댄다. 8장 '독자가 겪는 변화의 여정'에서는 '고난도 제자도의 일부일 수 있음을 배워야 한다'(93쪽)고 조언한다. 점진적 변화의 여정을 따라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저자는 다음과 같이 욥기를 구분한다.
1. 1-2장 서론: 욥, 하나님, 고발자
2. 3-26장 욥과 친구들 사이의 대화
3. 27-41장 욥, 엘리후, 하나님의 독백
4. 42장 결론
욥기를 한 번이라도 읽어본 경험이 있는 독자라면 마지막 42장을 제외한 모든 장은 대화로 이루어져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서론도, 본론과 결론에 해당하는 3부까지도. 유일하게 42장은 간략한 설명으로 마무리한다. 욥은 회개하고, 세 친구들도 역시 번제를 드리고, 욥은 처음보다 더 많은 복을 받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저자는 서론에서 욥기의 목적을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욥기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 가르침이다. 욥기는 바로 그 용광로 같은 연단 과정에서 정련될 때 경건한 인격이 형성됨을 가르쳐 준다.”(14쪽)
욥기는 논쟁이다. 욥기는 삶에 대한 해석의 충돌이다. 욥기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보다는 왜 살고 있는가를 묻는다. 그 답은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안 것이다. 욥기에서 답을 얻으려는 이들는 마지막 장을 덮을 때 실망하고 만다.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욥 42;2-3)
욥기의 시작은 경건한 사람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의인이 처참하게 무너지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불행이 그를 압도해 버린다. 성경은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라고 알려준다. 다만 욥만 모른다. 그렇다. 인간은 하나님의 계획을 모른다. 그래서 마지막 장에서 욥은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다고 고백한다. 그 직전 하나님은 욥에게 인간의 인지의 한계와 힘의 한계를 깨닫게 한다. 아무리 힘쓰고 노력한다 할지라도 할 수 없는 것이 있는 것을 아는 것, 그것이 인생이고 사람이라는 것. 욥기의 마지막은 그렇게 끝이 난다. 어쩌면 인간은 연약하기 한이 없고, 무능하고, 운명에 종속된 삶을 살아가는 존재다. 삶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고 고난은 소리친다. 저자는 이 부분에서 명확하게 ‘고난의 본질은 그것을 통제할 수 없다는 데 있다’(99쪽)고 선언한다. 하나님은 통제 가능한 삶을 살수 있다고 생각하는 욥을 고난의 용광로 속에 던져 버린다. 그렇다. 삶은 나의 것이 아니다. 주인은 따로 있다.
3-41장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그것은 지혜를 얻는 여정이다. 지혜는 자신의 연약함을 알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 뿐임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 그 여정은 피할 수 없으며, ‘험난’(13쪽)한 길이다. 하나님은 자판기가 아니다. 하나님은 통제할 수 없으며, 인간의 인식이나 힘이 닿지 않는 절대타자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욥을 단련하신다.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8-10)
만날 수 없고, 뵐 수 없고, 통제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욥을 단련하신다. 그 단련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한 개인의 존재 가장 깊은 곳까지 영향을 끼치는 영적, 도덕적 형성 과정’(14쪽)이다. 과정은 지름길이 없으며, ‘절망, 신체적이고 정신적인 고통, 다른 이들의 조언, 분노, 하나님을 향한 필사적인 호소, 결코 수동적이지 않은 기다림이 포함’(23쪽) 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욥의 고난, 그러니까 욥이 가장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육체적인 것이 아닌 정신적인 것이다. 친구들의 욥에 대한 선입견, 바로 그것이다.
빌닷, 엘리바스, 소발이 생각한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천지를 창조하시고, 삶에 개입하시고, 기도에 응답하시고, 공의로 심판하신다. 그들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그러나 한 가지를 놓쳤다. 그것은 ‘곧 하나님은 종종 예기치 못한 방식,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방식으로 일을 행하신다는 점’이다. 그들의 생각하는 하나님은 ‘자신들의 기계적인 신학에 맞게 축소된 존재’(29쪽)였던 것이다. 그들은 욥의 고난을 인과론적으로 해석했다. 고난은 죄 때문이라는 이유 있는 근거를 제시했다. 그들은 욥의 항변에 분개했고, 하나님을 모욕한다고 느꼈다.
4장에서 욥의 견해를 제시한다. 욥은 자신이 결백하다고 생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렇게 큰 고난을 당해야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것은 보편적 징계로 보기에는 풀 수 없는 난제다. 지혜는 감추어져 있으며, ‘지혜의 원천에 이르는 길을 알지 못’(39쪽)한다. 마침내 드러내 하나님의 음성은 모순 그 자체다. 하나님은 욥에게 질문하지 답을 주지 않는다. 인간의 인식과 인지의 한계를 초월하는 수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하나님의 질문은 욥으로 하여금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피조물인 자신 사이의 거대한 격차, 그리고 하나님의 전지하심과 자신의 지식의 한계에 직면’(41-42쪽) 한다.
기독교는 인과론이 아니다. 불가해한 수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다 이해할 수 없고, 해석할 수 없다. 아니 인지할 수도 없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은 하신다. 욥의 고난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단순한 기계적인 인과론으로 해석할 수 없다. 그럼에도 욥의 삶이 방치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일하신다. 욥의 고난은 뭔가를 이해하기보다 불가해한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직면함으로 사유의 방식이 바뀌게 한다.
“지혜는 그저 하나님을 머리로만 아는 지식이 아니라, 그분을 실존적으로 아는 지식이다.”(83쪽)
삶이 아프다. 화재로 인해 재판이 진행 중이다. 쉽게 해결될 것 같았던 합의가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갔다. 오늘도 얻고 싶은 사무실 앞에 차를 세우고 기도했다. 하루하루가 미궁이고 늪처럼 답답하다. 그러나 비록 불가해한 사건이 삶을 무겁게 할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의 삶을 인도하고 계신다. 욥은 마지막에 엎드려 회개한다. 나도 미궁에 빠진 삶 속에서 하나님께 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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