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도서 개론

샤마임 2010. 10. 26.
반응형

전도서 개론

<전도서의 저자>

일반적으로 솔로몬으로 알려져 있다. 전도서의 내용은 근거로 하여 솔로몬이 지은 것으로 보이지만 여러 정황을 참고하다면 솔로몬의 이름을 빌어 누군가의 수정과 첨가를 통해 재편집 되었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

<전도자> 

코할렛이란 단어는 회집을 틋하는 '카할'이라는 어근에서 왔다. 저자는 종교적인 회집을 명할 수 있는 권위있는 교사나 왕일 가능성이 많다. 

전12:9에서 전도자가 지혜로움으로 백성들에게 가르쳤다는 표현을 통해 신빙성이 있는 해석으로 받아 들인다. 우리는 전도자를 전도자, 설교자, 강연자, 의장, 회장, 지혜자, 지도자 또는 스승으로 번역할 수 있다.

<전도서의 내용>

첫번째 중요한 주제는 해 아래서

전도자는 탐구자이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경험하고 누려본 사람이다. 심지어 그는 미친 것과 어리석은 것(1:17; 2:3까지 알려고 시도한 자이다. 그럼에도 그는 모든 것이 헛되다는 상투적 실망감을 반복적으로 고백한다. 그가 말하는 헛됨은 무엇일까? '해 아래서'라는 단어를 유심히 보아야 한다. 전도서 기자가 말하는 모든 일들은 '해 아래서' 일어나는 일들이다. 12장 밖에 되지 않는 짧은 전도서에서 '해 아래서'라는 단어가 무려 30번이나 사용되었다. 그렇다고 한다면 전도서 기자가 본 것은 해 아래 세상이다. 해 아래서 일어나는 것들 보며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생들에 대한 통찰이다. 그렇기 때문에 해 아래서 모순을 보고, 악을 보고, 굽은 것을 보고, 절망을 본 것이다. 이 모든 것에 대해 전도서 기자는 '헛되다'라고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해 아래의 모든 것들은 제 자리에서 맴돌 뿐이다. 결코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한다. 사람들은 저마다 많은 것을 꿈꾸며 욕심내며 살아가지만 그것은 다람쥐가 우리 속에서 쳇바퀴를 돌리며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는 것과 다름 없다. 사람들은 그것들로 결코 만족하지 못할 것이며, 참된 소망을 얻지 못할 것이다. 또한 그러한 삶은 종국에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할 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없는 인생은 헛된 것이다. 다만 좀더 편하고, 좀더 부유하고, 좀더 영향력있는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두번째 전도서의 중요한 주제는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것이다.

해 아래서의 삶이 모순이요, 폭력이요, 악과 같은 바람을 잡으려는 헛된 것들이라면 그에 대한 대안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세상의 굴레를 벗어나는 길이요, 이 땅에서 진정한 헛되지 않는 것을 추구하는 삶이다. 이 세상의 모순을 어떻게 풀어야 할까? 그 답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길 뿐이다. 허무와 죽음의 그림자가 깊게 그리고 길게 드리워진 해 아래서 영원을 누리는 비결은 역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 본시 사람은 영원을 사모하도록 지음을 받은 존재이다.(3:11) 그러나 사람들이 꾀를 내어 하나님을 떠나 자신의 욕망 즉 사망의 굴레를 선택한 것이다.

 세번째 전도서에 나타난 하나님은?

전도서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는 하나님에 관한 부분이다. 전도서는 전체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가 부록처럼 엮어져있으며 멀리서 관망하는 듯한 분으로 묘사된다. 전도서에서 '그럼 하나님은 누구신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한다.

전도서에서 하나님은 창조자, 주권자, 지혜자로 나타난다.

창조자로서 하나님은 역사의 전 무대를 세우신다. 하나님은 인생 속에서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이다.

전도서 안에서 하나님은 역사라는 무대를 만드시고, 감독하시고, 연출하시는 분이다. 사람들은 철저하게 수동적인 존재로 그려지면서 오로지 일부의 자유 속에서 살아간다. 인간의 욕망은 이러한 수동적인 존재임을 부정하면서 탐욕스럽게 살아간다. 모든 것을 취하고, 빼앗고, 폭력을 행사하며, 부당하게 살아간다. 그러나 그들의 능력은 마치 줄에 묶인 강아지처럼 몇 발자욱의 거리 밖에 되지 않는 한정된 시공일 뿐이다. 전도서의 헛됨은 이러한 시각 속에서 인간의 모든 수고 자체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보여 주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란 곧 인간 자신이 누구인지를 바로 알고-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인생- 아버지의 주신 시간들을 충분히 누리며 사는 것이다.

주권자로서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운명을 결정짓는 분이시다.

운명이란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모든 때는 하나님의 정하신다. 날 때, 죽을 때, 심을 때, 헐 때, 울 때, 웃을 때...... 이 모든 때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다"(3:11) 궁극적으로 인간들은 제한된 시공 속에서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다. 아니다 이미 내재된 본성이다. 인간의 삶은 이미 결정된 '필연의 역사'인 것이다. 

지혜자로서 하나님은 인간의 지혜가 아니다. 인간의 도달할 수 없는 절대타자로서의 지혜자이시다.

전도서 안에서 하나님은 절대타자로서 존재한다. 인간의 삶에 조금도 간섭하지 않은 듯하다. 멀리 계시고, 관심이 없는 듯하다. 이러한 느낌이 드는 것은 전도서 기자는 하나님을 표현할 때 역사의 전면에 나타나 인도하시는 분이 아니라 숨어 계시는 하나님으로 묘사하기 때문이다. 재판장에 악이 있지만 하나님은 간섭하지 않고, 악인의 형통에도 관심이 없는 듯하다.

"악한 일에 관한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아니하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는 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8:11)

그러다 갑자기 하나님께서 다 보고 계시며, 마지막 날에 심판하실 것을 말씀하신다.

"악인은 잘 되지 못하며 장수하지 못하고 그 날이 그림자와 같으리니 이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아니함이니라"(3:13)

그러므로 인간의 지혜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 지체되는 하나님의 심판은 곧 죄인들에게 회개할 기회요, 시험의 시간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지혜이다. 모든 것을 알고 계시지만 아무엇도 모르시는 것처럼 침묵하고 계신 것이다. 사람들은 분명히 알아야 한다. 반드시 하나님은 보고 계시며, 시험하고 계시며, 심판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12:14)

 

※  전도서에서 다루어야 할 더 많은 주제들....

전도서에서 더 많이 다루어져야 할 주제들이 있다.

그 중의 하나가 전도서에 나타난 인간론으로서 '자유의지'에 관한 부분이다. 이것은 나중에 다룰 것이다. 또한 전도서 속에 나타난 창세기와의 관계, 그리고 전도서가 말하는 구속는 무엇인가라는 주제들이다. 이미 이곳 저곳에서 조금씩 다루어지기는 했지만 전도서 전체에 포함시킨 적은 없다. 아무래도 그렇게 하기에는 너무 방대한 분량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앞으로 이러한 주제들이 충분히 다루어져야 전도서를 제대로 다를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이 글은 스프링노트에서 작성되었습니다.

반응형
그리드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