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원의 탄생
수도원의 탄생
크리스토퍼 브룩 / 청년사
1. 들어가면서
이제 수도원의 역사를 살펴볼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초대교회는 수도원이 없지는 않았지만 중요하지 않았고, 그다지 영향력을 갖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중세의 신앙은 수도원과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수도원 운동은 종교개혁을 일으킨 루터로 인해 거의 종말을 고하게 되지만, 중세에서는 선하든 악하든 수도원 없이는 이야기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한 단체가 됩니다. 지난번에 저는 중세를 알리는 중요한 교황인 그레고리가 저술한<베네딕도의 전기>를 나누었습니다. 베네딕도는 중세 수도원의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미친 <베네딕도 규칙>을 기록한 수도사입니다. 다음에 <베네딕도 수도 규칙>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이번에는 수도원의 큰 흐름을 잡고 중세가 어디로 흘러가는지, 수도원이 어떤 영향을 마치고 확장되어 갔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수도원의 역사를 한 권에 담는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한 수도원의 역사만 다루어도 수십 권의 책이 될 만한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의 저자인 크리스토퍼 브룩은 자신도 한 권의 책에 천년이 넘는 수도원 역사를 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더욱이 고르고 선별하여 수도원의 역사를 집약해 놓은 이 책을 또 요약한다는 것은 크나큰 도전이요 부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방대한 수도원의 역사를 다루기 보다 필요한 부분만을 요약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책은 모두 3부로 나누었습니다. 1부에서는 전통적인 수도생활의 성립과 본질을 다룹니다. 2부에서는 새도 등장한 수도회들의 본질적인 특징과 정신을 다룹니다. 3부에서는 수도원 세 곳을 답사합니다. 그러므로 이 책의 가장 중요한 핵심과 수도원의 역사는 1.2부에 담겨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1.2부에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들 정리하면서 수도원이 중세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 수도원의 역사와 특징들
1부 수도원의 생활과 전통
수도원은 왜 생겨났을까요? 그것은 세속을 떠나 거룩한 삶을 살아가려는 의도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생각 속에는 세상 속에서 ‘소금과 빛’으로 부름받은 삶을 영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수도원은 왜 만들어지고 탄생하게 될까요? 그것은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을 수도적 삶으로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수도사는 그리스어로 ‘홀로 살아가는 사람’이며, 수도원을 라틴어로 Coenobia로 불렀습니다. 이 말은 ‘공동의’라는 그리스어 코이노스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이것은 수도자들의 생활이 비록 은수자들이나 독수자들처럼 홀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시작되었지만 가장 초기부터 공동생활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문헌 속에는 이미 예수님 당시에도 그 후에도 고독을 즐기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가장 초기의 수도원 형성은 4세기 초에 이루어집니다. 주교였던 아타나시우스, 은수자인 안토니우스, 공주 수도사였던 파코미우스가 그들입니다. 그들을 통해 공식적인 수도원이 시작되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수도원은 로마 제국의 박해와도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박해를 피해 사막 깊숙이 피신했고, 세속적인 세상을 떠나 고독을 즐기려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박해가 심했던 시기에는 수도원이 결코 활성화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밀라노칙령과 더불어 박해가 끝나고 교회가 점점 세력을 얻어 가며 정치적인 권세까지 획득하게 되면서 수도원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됩니다. 교회가 직접 세우기도 하고, 은수자들에 의해 생겨나기도 합니다. 성 바실리우스와 아우구스티누스, 그리고 요하네스 카시아누스는 수도원 운동의 터를 닦는 중요한 인물입니다. 특히 카시아누스는 수도원 규칙을 만들어 공동생활의 기본적인 틀을 잡아 줍니다.
수도사의 생활은 노동과 예배란 두 기둥을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예배는 찬양과 기도뿐 아니라 독서와 금욕적 생활까지 포함합니다. 수도사들에게 독서는 영적 생활을 증진시키는 중요한 수단입니다. <교부전>의 경우는 예배전에 한 장식 읽는 것은 통상적인 관례가 되었습니다.
“<교부전>은 명상적 기도와 완전성의 정점에 이르는 사다리는 올라가는 방법들은 다룬 설득력 있는 해설서에 해당한다.”(46쪽)
수도원에서의 독서는 현대인이 추구하는 지식을 습득하려는 실용적 측면보다는 영적인 깊이를 더하려는 의도에서 시도되었습니다. 이것은 후에 영적 독서(렉티오 디비나)의 형태로 발전하게 됩니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 나오는 수도원 속의 도서관 이야기는 이러한 의도에서 만들어진 것들입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독서는 필사와 더불어 수도원의 중요한 수입원이 되어 중세에는 거대한 부를 축적하기에 이릅니다. 독서와 더불어 수도사들에게 중요한 것은 규칙입니다. 초기의 카시아누스의 <제도집>은 베네딕도에 의해 다시 규정되어 사용됩니다. 복잡하고 난해한 카시아누스의 제도집보다 베네딕도 <규칙>은 훨씬 명확하고 단순합니다. 지금까지도 수도원의 규칙은 <베네딕도 규칙>을 사용합니다.
중세의 문을 연 그레고리우스 교황(590-604년)은 베네딕도를 무척이나 존경하여 그의 대담집이 일부를 베네딕도 생애를 넣기까지 합니다. 그는 수도원을 선교 목적으로 적극적으로 활용합니다. 저자는 7장에서 1부를 마무리하면서 12세기 르네상스에 미친 기여를 살펴봅니다. 건축과 공예, 예술, 필사와 독서, 전기와 역사 기술 방법 등을 전해 줍니다. 즉 르네상스는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라 그들이 비판하고 조롱했던 수도원의 영향력 ‘안에서’, 그리고 ‘통해서’ 생겨난 것들입니다.
수도의 일상은 매우 단조롭습니다. 모든 수도원이 동일하지는 않지만 이른 아침에 찬미기도, 새벽 기도, 오전기도, 정오기도, 저녁기도, 마감기도, 한밤중의 기도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수도원의 일과는 대개 오전 2시부터 해가 질 무렵인 6시 30분 정도에 마무리되었습니다. 오후 낮잠 시간이 있었고, 식사와 노동, 독서 등으로 채워집니다. 독서는 지금 같은 묵독이 아니라 낭독입니다. 양피지의 책들은 가격도 엄청났고, 책이 드물었습니다. 그래서 같이 읽기 위해서는 한 사람이 낭독하고 나머지는 듣는 형태를 취했습니다. 이전에 살폈던 무명의 교무가 쓴 <디오그네투스에게>나, 에바그리우스의 폰티쿠스가 저술한 <안티레티코스> 등을 낭송했습니다. 클뤼니 수도원의 경우는 강림절 낭독회는 모두가 이야서를 동시에 읽도록 정하고 있습니다.
수도원의 간략한 역사를 정리해보면, 먼저 수도원은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즉 누군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대 바실리우스와 같은 사람들에 의해 규칙과 형태를 갖추게 됩니다. 가장 초기의 역사에 속합니다. 그러다 기독교가 공인되면서 경건을 상실한 교회를 멀리하기 위해 은둔자들과 수도원이 크게 일어나게 됩니다. 특이한 점은 개인적인 은둔자가 아닌 이상 수도원의 경우는 교회나 부유한 귀족과 왕에 의해 시작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수도원은 북아프리카와 지중해 북동 지역인 이탈리아와 소시아 지역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다 그레고리 교황이 등극하면서 수도원은 본격적으로 규모와 체계를 갖추면서 교회와 손을 잡고 선교적 목적으로 지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도원이 비록 금욕적이고 세속을 떠난 형태를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세속의 영향 아래 있었다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11세기가 지나면서 수도원들은 왕과 귀족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진정한 부흥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10세기 수도원의 개혁과 성장을 이룬 클뤼니 수도원도 프랑스 윌리엄 1세가 910년에 지은 것입니다. 수도원의 성장과 역사는 가톨릭의 역사와 깊이 맞물려 있습니다.
2부 새로운 수도회들
수도원에서 가장 큰 난제는 그들이 가지는 삶이 과연 성경적이며 필요한가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질문들은 수도원이 개인구원과 완전에 몰입한 나머지 세속을 잃어버린 것에 있습니다. 이러한 난제는 수도원과 교회가 때로는 전혀 상관없는 존재가 되거나 11세기 말쯤에 다시 시작된 교회와의 연합을 이루기도 합니다. 저자는 이것을 ‘사도적 삶’과 ‘구도자적 삶’이라고 표현합니다.(199쪽) 사도적 삶은 세상 속에서 섬김과 봉사의 역할을 하는 것이고, 구도자적 삶은 홀로 독립되어 은둔과 명상을 추구합니다. 11세기 이후 갑자기 생겨난 ‘아우구스티누스 규칙’은 명성을 이용한 가짜 문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수도 규칙의 중요한 한 틀로 자리 잡았고, 사도적 삶을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수많은 수도원에서 채용하기에 이릅니다. 이들은 독서와 기도, 고행에 집중했던 것이 아니라 ‘예수가 제자들에게 지침을 내릴 때 특히 청빈, 검소, 선행을 강조’(202쪽)했던 것으로 되돌아갑니다. 이것은 일종의 수도원의 개혁이었고, 새로운 형태의 수도원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이 시대의 수도원의 변혁이 교회의 변혁과 맞물립니다. 10세기가 넘어가면서 교회는 극도로 타락의 길을 걷습니다. 사제들은 온갖 부패와 음락과 악행에 절어 있었고, 교회는 ‘강도의 소굴’이 되고 말았습니다. 교회 개혁을 부르짖었던 이들은 결국 수도원으로 눈을 돌렸고, 정체된 수도원들도 새롭게 개혁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개혁 운동은 교회와 수도원이 함께 손을 잡게 됩니다. 1039년에 창설된 아비뇽 교외의 ‘생 루프 수도원’이 가장 주도적 역할을 하게 됩니다. 톨레도, 오스마, 다른 대성당들이 수도 참사회로 바뀌면서 서서히 개혁의 운동이 일기 시작합니다. 프랑스에서 시작된 개혁은 독일, 오스트리아, 영국에까지 번져갑니다. 특이한 것은 기존의 수도원이 세속을 피해 깊은 산이나 사막 속에 있었다면, 개혁의 바람을 타고 시작된 수도원들은 ‘다수는 도시 안에 자리’(207쪽)를 잡게 됩니다.
수도원이 사막에서 다시 사람들이 사는 도시로 되돌아가면서 몇 가지 단어가 생겨난다. 하나는 참사 회원, 또 하나는 앞으로 중세의 중요한 획을 그을 ‘탁발 수도사’들입니다. 어쨌든 제프리 초서(1342-1400년)의 유명한 <캔터베리 이야기>에서 이런 말이 나옵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아우구스티누스의 명령대로
책이나 읽고 노동이나 해야 하는가?
어떻게 그런 세계가 섬김을 받을 수 있겠는가?
아우구스티누스에게나 그런 일을 열심히 하라고 하면 되는 것 아닌가!(214쪽)
아마도 초서가 살았던 14세기는 개혁의 바람이 사그라들고 아우구스티누스 규칙을 따르는 수도원들도 이전의 구도적 삶을 추구하는 수도원으로 변질되어 버린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은수자 중 한 명이었던 성 로베르에 의해 1097년 경에 시토 수도원이 생겨납니다. 이곳에서 그 유명한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가 동참하여 큰 획을 긋게 됩니다. 베르나르두스는 언변력이 탁월하고 사람들을 감화하는 능력이 있어 일군의 무리들을 이끌고 시토 수도원에 들어오게 됩니다. 결국 3년이 지난 다음 해 그는 시토 수도원의 자수도원이던 클레르보 수도원의 원장이 됩니다. 그는 1153년 죽을 때가지 그곳에 기거하며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베르나르두스의 가장 큰 업적은 그가 아우구스티누스와 그레고리우스 1세에 유래된 ‘신비신학’(223쪽)을 접목시킨 것입니다. 그들은 소수였지만 강력한 영적 열망으로 살아갔고, 베네딕도 규칙을 문자대로 지키려는 이들이었습니다. 브룩은 이들을 향해 ‘12세기 가톨릭교회의 청교도’(223쪽)으로 명명합니다. 베르나르두스는 라틴어에 능숙했고, 명설교가였습니다. 그의 설교로 인해 2차 십자군 전쟁이 일어날 정도입니다.
수녀원은 아마도 그 어떤 수도원 역사보다 독특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여자는 침묵하고 남자에게 배우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전통이 되어 여자들은 교회 안에서 위축되고 축소됩니다. 수도원도 크게 다르지 않았으나 엄격한 금욕생활을 추구한 나이 든 과부들의 청원으로 수녀원이 생기게 됩니다. 11세기 영국의 경우는 남자 수도원 네 개에 한 개의 수녀원이 존재했습니다. 수녀원은 독일에서 번영을 누립니다. 오토대제의 딸이었던 마틸데는 크베들린부르크의 수도원장까지 지낼 만큼 독일에서는 수녀원에 대한 호의적 정서가 자리 잡았습니다.(265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에 대한 편견은 결코 축소되지 않았습니다.
“중세에 가장 심했던 편견들 가운데 하나는 여성들은 자신의 일을 스스로 처리할 능력이 없고, 세상의 위험과 유혹으로부터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견해, 그렇지 않으면 여성들은 쉽게 위험에 처하고 유혹을 일삼는 존재가 되어 버린다는 견해였다.”(279-80쪽)
크산텐의 노르베르트와 아시시의 프란체스코는 중세 수도원 역사에서 빠뜨릴 수 없는 인물입니다. 크산텐의 노르베르트는 12세기 수도사들 중에서 가장 사도적 삶을 실천했던 인물입니다. 성 프란체스코 역시 한 세기 후인 13세기에 가난과 청빈으로 강력한 영향을 끼친 인물입니다. 크산텐의 노르베르트는 떠돌면서 전도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수도적 생활보다는 사도적 삶을 추구했기 때문에 베네딕도 규칙보다는 아우구스티누스 규칙을 따랐습니다. 그는 의전수도회인 프레몽트레회의 창설자이기도 합니다. 프레몽트레회는 수도적 삶을 추구하고 관상을 추구했던 이전의 수도생활과 탁발수도회의 활동적 생활을 접목시킨 수도회입니다. 1126년 교회의 정식 인가를 받았고, 서부 유럽, 특히 헝가리 지방의 선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한 세기가 지난 다음 부유한 상인의 아들이었던 프란체스코는 모험을 즐겼습니다. 전쟁에 휘말려 감옥에서 1년을 지내기도 합니다. 20대를 지내면서 그는 영적 모험이 소명임을 알고 새로운 규칙을 만들어 내어 자신만의 영적 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의 규칙은 매우 급진적이었습니다. 소위 탁발수도사로 알려진 이들의 규칙은 ‘동정, 복종, 청빈’(292쪽)를 서약했고, 다른 부유한 수도원과 다르게 검소하고 초라한 수도원에서 생활합니다. 그들은 가난은 가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가난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3. 나가면서
수도원의 부흥기는 9-12세기로 보입니다. 그 이전에는 수도원이 그리 많지 않았고 큰 역할을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1346년–1353년에 절정에 달했던 흑사병과 16세기 종교개혁은 수도원의 치명적인 위협이었습니다. 개신교가 정착한 독일과 영국의 경우는 대부분의 수도원은 해체되고 재산은 몰수되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이 책은 수도원의 전통과 역사에 치중하고 있기 때문에 수도원이 전해준 영성과 독서, 노동과 필사의 이야기들은 극히 제한되어 서술하고 있습니다.
7장에서도 언급했지만 만약 수도원이 없었다면 르네상스는 미미했거나 불가능했을지도 모릅니다. 이 책에서 자세히 언급하지 못한 인문학적 기능을 수도원이 행해왔기 때문입니다. 사도적 삶을 통해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임무를 감당해야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일상을 벗어나 하나님을 추구하는 경건의 삶도 필요합니다. 수도원은 신앙이 가지는 한 극단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또한 종교개혁이 추구했던 노동에 대한 신성의 부여는 일반 가톨릭교회가 아니라 수도원에서 나온 것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수도원의 전통과 역사를 살피면서 현대교회가 잃어버린 거룩과 단아한 생활을 발견하게 됩니다. 칼빈의 소명론은 극도로 타락한 가톨릭교회에 대한 반동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재정의한 것입니다. 세상과 너무나 닮아 버린 현대교회는 어디로 가야 할까요? 우리가 수도원을 설립한 필요는 없겠지만 일상 속에서 수도적 삶은 추구해야 하지 않을까요? 삶을 다시 점검하고 난잡하게 벌려진 삶은 단조롭게 정리하고, 방만한 생각과 일들을 내려놓고 가난과 청빈(淸貧) 함으로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Book > [서평과 기고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작은 서신에 담긴 위대한 복음 / 이상웅 / 솔로몬 (0) | 2018.08.26 |
---|---|
단단한 교회 / 임종구 / 국제제자훈련원 (0) | 2018.08.15 |
그레고리오 대종 <베네딕도 전기> (0) | 2018.05.09 |
모세의 생애 De vita Moysis (0) | 2018.04.10 |
사역과 제자도 앤드류 머리 / 임은묵 / 샘솟는기쁨 (0) | 2018.03.1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