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그레고리오 대종 <베네딕도 전기>

샤마임 2018. 5. 9.
반응형

그레고리오 대종 <베네딕도 전기>

 

1. 시대적 배경과 역사적 의의

 

교회사를 구분할 때 고레고리 1세가 교황이 된 590년을 중세의 시작으로 봅니다. 예수님의 부활 직후부터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시작된 초대교회는 다층적 면모를 지내고 있습니다. 초대교회사를 접할 때 먼저는 고난핍박의 문제는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초대교회는 로마의 핍박 이전부터 유대사회로부터 이미 핍박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후 네로 황제의 로마 기독교인의 박해를 시작으로 공식적인 핍박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대부분 교부 문헌은 기독교가 공인된 313년 밀라노칙령이 있기까지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핍박과 더불어 교회 안에 이단들에 의해 교리 논쟁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사도행전과 서선시 안에는 교회 안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이단들이 미미하지만 적지 않게 활동하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는 이러한 결과로 인해 교리 논쟁과 더불어 신경의 확립이 또 하나의 기둥을 이루고 있습니다. 마지막 하나는 기독교 공인과 그에 따른 교회의 변화된 양상들입니다. 즉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 교회는 급격하게 불어나지만 삶은 그와 비례하여 퇴보하기 시작합니다. 교리는 한 층 정교해지고 깊어지지만 삶과 격리된 형이상학적 형태를 가져옵니다. 특히 초대교회 후기로 넘어가면서 교회가 타락하자 사막 은거 생활과 수도원 운동이 본격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수도원 운동은 세상이 교회 안으로 너무 깊이 밀려 들어와 더 이상 교회로서 가치를 인정하지 못한 반동으로 생겨난 것입니다. 수도원은 이미 존재했지만 교회의 타락과 더불어 더욱 크게 성장하기에 이릅니다. 특히 수도원 운동과 더불어 교회는 거대한 권력집단처럼 조직되기 시작합니다. 로마의 멸망으로 인해 교회는 세속적인 권력까지 쥐게 되고 교회가 세속 나라의 황제들을 세우는 것까지 간섭하기에 이릅니다. 이러한 교회의 급작스러운 변화는 중세 이후 서양사를 통틀어 집요하게 확장되고 강화됩니다. 그러나 중세는 타락과 더불어 종교개혁의 틀을 마련하게 되고 인문주의 운동을 통해 이전에 일어나지 않았던 세속적 이해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베네딕도 전기를 쓴 그레고리(540-604)는 중세 교회의 시작을 알리는 최초의 교황으로 불립니다. 종교개혁은 그레고리 이전의 교회로 되돌아가는 것이고, 가톨릭은 그레고리 이후 진정한 교회가 시작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살필 <베네딕도 수도 규칙>은 중세가 가지는 수도원의 개념과 신비주의 등을 미리 맛볼 수 있는 과도기(過渡期)적 교분 문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레고리가 쓴 <베네딕도 전기>와 다음에 다룰 베네딕도의 <수도 교칙>은 타락한 시대 속에서 어떻게 그리스도를 닮아갈 것인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입니다. 한 편으로는 교회가 어떻게 성경에서 조금씩 멀어지고 있는가를 보여 줍니다. 오늘은 그레고리가 저술한 <베네딕도 전기>를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꼭 교정해야 할 부분이 아니면 이형우 신부가 기록한 인명이나 지명을 그대로 채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서는 그레고리의 입장에서 저술되었습니다. 해설이 필요한 부분은 제가 수정하거나 가필하여 보완하도록 하겠습니다.

 

2. 베네딕도의 생애와 책의 내용

 

<베네닉도 전기>는 천오 백 년이 넘도록 고전으로 읽혀왔습니다. 베네딕도가 저술한 <수도 규칙>은 서방교회의 수도원 영성의 뿌리와 같으며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교회에서는 그를 서방교회 수도생활의 아버지또는 서구의 주보(主保)’ ‘기술자와 건축가와 개간자들의 주보로 모시고 있을 만큼 적지 않은 영향을 가진 존재입니다. <베네딕도 전기>고대 성인전형태를 가집니다. 고대 성인전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기술된 것이 아니고 주인공의 덕행이나 이야기를 신화적으로 표현하여 교훈하려는 목적을 띤 형태입니다. 또한 고레고리가 이 전기를 썼을 때는 랑고바르드족의 침입으로 로마는 극심한 어려운에 처해 있었고, 교회는 윤리적으로 심각한 타락 양상을 보였습니다. 그레고리는 이러한 문제를 타개(打開) 하기 위해 적지 않은 저술을 펴냅니다. 저자인 그레고리의 관점을 따라 우리는 베네딕도를 거룩한 삶을 추구하고, 하나님을 믿는 것이 무엇인지 배우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베네딕도 전기>는 단 권이 아니라 그가 펴낸 방대한 <대화집> 2권에 들어가 있는 일부의 이야기입니다. 그레고리는 베네딕도 수도사를 통해 게르만 민족을 선교하려는 중대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책은 교회 교인들뿐 아니라 새로 입교하게 될 게르만 민족들을 향한 모델로서 베네딕도의 삶을 조명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대화체로 이루어진 글로 모두 38장의 짧은 글로 엮어져 있습니다. 출생과 성장, 죽음까지의 연대기적 서술이 아닌 여러 가지 신화적 이야기들로 만들어진 고대성인전입니다. 이 책을 요약하기는 상당히 어렵습니다. 필자는 책에 기록된 베네딕도의 중요한 사건들을 정리하여 그레고리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이야기를 끌어가는지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권 머리말

 

내가 여러 일로 괴로워 기도하기 위해 은밀한 곳을 찾았다.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시간을 보낼 때 베드로(사도가 아닌 사제)가 찾아왔다. 그는 왜 나에게 슬퍼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매일 겪는 일로 괴롭다고 말했다. 옛적 수도원에 있을 때가 그립다. 내가 짊어지고 있는 짐이 무겁다. 하나님은 내가 이 세상에 일에 몰두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베드로, 저에게 우리 앞서간 모범이 될만할 사람들의 이야기를 저에게 들려주십시오. 우리는 그분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 겸손해질 것입니다.

 

그레고리, 그렇게 하마. 성경을 기록한 마태와 누가 등이 있다. 그러나 이분들보다 내가 매우 존경하는 한 분이 계신다. 그분은 베네딕도 교부시다.

 

2권 베네딕도의 일화

 

베네닉도라는 분이 계시다. 그분은 존경받을 만한 분이다. 그는 누리시아 지방의 자유민으로 태어나셨다. 공부를 위해 로마로 가셨지만 많은 사람들이 악행에 빠져 있는 것을 보시고 즉시 발을 빼셨다. 그는 공부를 그만두었다. 아버지의 집과 재산도 버리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 수도생활을 찾아 나셨다.

 

유모만 자신을 따라오게 하고 홀로 집을 나섰다. 성 베드로 성당에 거처를 잡고 사셨다. 유모가 밀을 치기 위해 이웃에게 체를 빌렸는 잘못 다루어 깨지고 말았다. 유모는 통곡했다. 베네닉도는 이것을 보고 마음이 아파 두서진 체를 붙잡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다. 기도를 마치니 부서진 체가 멀쩡하게 되어 유모에게 돌려주며 위로했다. 도시에 소문이 나서 사람들이 그 체를 성당 입구에 걸어 두었다. 사람들은 베네닉도가 하나님께 얼마나 큰 은총을 입게 되었는지 알게 되었다. “그분은 처음부터 이런 완덕에 이르는 (길을) 시작하셨던 것이다.”(95)

 

베네닉도는 칭찬받기보다 고통을 원했다. 그는 유모 몰래 도망쳐 나와 홀로 수비아꼬라는 곳에서 홀로 생활했다. 그곳에서 로마누스라는 수도승을 만난다. 로마누스는 그를 이끌고 협소한 동굴로 인도한다. 베네닉도는 그곳에서 삼 년 동안 머문다. 사단이 시기하여 빵을 제공하는 로마누스의 신호용 방울을 깨뜨렸지만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파스카의 축제 때에는 한 사제에게 환상을 보여 베네닉도를 먹이는 일도 있었다. 어느 날은 목자도 찾아와 베네닉도를 보고 짐승인 줄 알았다고 회심하게 된다. “사람들은 그분에게 육신의 음식을 가지고 왔고, 그분이 입에서 나오는 생명의 양식을 마음속에 받아 가지고 갔다.”(101)

 

홀로 계실 때 유혹자가 찾아왔다. 그때 성호 십자가를 긋자 유혹자가 사라졌다. 어느 날은 여인이 마음에 떠올랐다. 욕정이 타올랐지만 하나님께서 그에게 은총을 주시어 바른 정신을 갖게 되었다. 그는 쐐기풀과 가시덤불의 관목을 모으고 자신의 몸을 던져 고통을 받았다. 그러자 내적 욕망의 불은 내쫓기고 죄를 극복하게 된다. 그 후 많은 사람들이 그분께 가르침을 받기 위해 몰려들기 시작한다. 25세 이상의 레위인은 성전에서 봉사하지만 50세 이후는 성전의 도구들을 관리한다.

 

젊어서는 육신의 유혹이 강렬하지만 50세부터는 육신의 열기가 식게 마련이다. 거룩한 도구들이란 신자들의 영혼을 뜻한다. 그러므로 간택된 이들은 아직 유혹을 당할 나이에는 복종하고 봉사하며, 순종과 노고로 수고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정신적으로 안정된 나이에 이르러 유혹이 열기가 물러가면 (거룩한) 도구들의 관리자들이 될 수 있으니 영혼의 스승들이 되었기 때문이다.”(105)

 

유혹이 물러간 다음 가시나무 덤불을 경작해 밭을 만들고 수행을 함으로 풍성한 결실을 맺었다. 그 곁에 수도원이 있었는데 수도 원장이 죽자 수도사들이 찾아와 자신들을 맡아 달라고 부탁한다. 베네닉도는 규칙에 따른 수도생활을 지시하고 정도에서 벗어난 행위를 용납하지 않으셨다. 그러자 수도들은 후회하면서 맹렬히 비난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있는 악행을 버리고 너무나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의하여 포도주에 독을 섞어 먹이기로 했다. 하지만 십자 성호를 긋자 그릇이 깨져 버렸다. 베네닉도는 하나님께 그들을 용서해 달라고 자비를 구한 다음 그곳에서 벗어나 호젓한 곳으로 갔다.

 

생각을 타락시켜 우리 자신 이하로 추락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명상의 은총을 통해 우리 자신 위로 고양되는 경우가 있다. ... 열렬한 명상이 그분을 높은 경지로 끌어올릴 때에는 언제나 그분께서 자신을 당신 내면에 두고 계셨던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113)

 

외딴곳에서 나가시고 기적들과 표징들을 행하시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특히 귀족들이 자녀들을 가르쳐 달라고 데리고 왔다. 한 날은 헛된 망상에 빠진 수도승을 고치기도 했다. 성인(베네닉도를 말한다)의 눈에 새까만 녀석(사단)이 그의 옷을 잡고 밖으로 잡아끄는 것을 보았다. 그에게 새까만 놈을 볼 수 있도록 기도했다. 성인은 그를 매로 때려 정신을 바로 잡았다.

 

수도원을 세웠는데 셋은 돌산 위에 세웠다. 물을 길으러 가는 일이 보통이 아니었다. 제자들이 수도원을 옮기자고 한다. 산의 벼랑에 올라 오래 기도한 다음 돌로 표시하고 제자들에게 가보라고 했다. 그러자 그곳에 물기 있는 돌이 있고, 그곳을 파자 물이 흘러넘쳤다. 고트 사람이 나무를 벨 때 낫의 손잡이에서 쇠붙이가 빠져나가 호수에 빠졌다. 물이 너무 깊어 찾을 수 없었다. 베네닉도에게 고하자 그는 낫의 손잡이를 호수에 담갔다. 그러자 쇠붙이가 떠올라 낫에 맞추어졌다. 심지어 그의 제자가 물 위를 걷는 일도 있었다. 성인이 밭에서 일을 하시다 죽은 아들을 안고 가는 농부를 발견했다. 그는 아들의 죽음을 애통해하면서 수도원을 찾았다. 성인은 입구에 놓인 시신 위에 올라가 엎드리신 다음 하늘을 향해 기도했다. 그러자 아이의 영혼이 육신 안으로 들어갔다.

 

성인은 자신이 떠나게 될 때를 아셨다. 모두에게 죽음을 알리지 않도록 했다. 엿새 전에 무덤을 열어 놓으라고 했고, 열병에 걸리셨다. 점점 심해져 엿새가 되던 날 임종하셨다. 하늘을 향해 손을 들고 기도하는 가운데 숨을 거두신다. 이 분은 아폴로 신의 제단을 헐어 친히 건축한 세례자 성 요한의 성당에 안장되셨다.

 

베네닉도께서 사셨던 수비아꼬 동굴에는 아직도 기적들이 일어나고 있다. 근래에 한 미친 여자가 정신을 잃고 산을 돌아다녔다. 그러나 우연히 베네닉도가 계시던 동굴에 들어갔다. 아침이 되어보니 정신이 말짱하게 치유되어 있었다. “베드로야 수교 성인들의 시신이 모셔진 곳에는 성인들이 순수한 마음으로 간청하는 이들에게 수없이 많은 기적들을 실제로 행하시고 보여주실 수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239)

 

3. 나가면서

 

우리가 건너 띄기는 했지만 295년에 태어난 아타나시우스가 저술한 <사막의 안토니우스>와는 사뭇 다른 전개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사막의 안토니우스>가 좀더 사실적이고 영해적이라며 이 책은 신화적이고 신비롭기까지 합니다. 마치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생애를 읽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킵니다. 초기의 교부 문헌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강조합니다. 특히 도덕적 성결과 가난을 강조하여 교회가 세상과 완전히 다른 공동체인 것을 드러냅니다. 그러다 3세기 이후가 되면 간간히 있던 교리 논쟁의 서산들이 주를 이루게 됩니다. 이 시기는 핍박의 시기로 순교에 대한 열망과 이단들을 대적해야 하는 이중적 주제를 가지게 됩니다. 4세기에 들어서면 본격적으로 교리에 대한 책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이것은 기독교 공인과 국교화로 인해 핍박이 사라지고 이단들이 더욱 득세하지 이것을 저지하기 위한 목적이었을 것입니다. 암부로시우스와 어거스틴이 바로 이 시대의 교부입니다. 그리고 후반기에 들면 교회는 완전한 조직을 갖추게 되고, 세속적인 권력을 손에 쥠으로 보다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이 시기에 기록 된 문헌들이 바로 그레고리의 <베네딕도 전기>와 같은 문헌들입니다.

 

그레고리에 의해 서술된 베네딕도의 생애는 신화 속에 나올법한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 이전의 교부 문헌들과는 상당히 다른 양상을 보입니다. 사실의 기록에 가깝다기보다는 인물을 신화적으로 그려내고 있고, 그의 삶을 영적인 것들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앞으로 전개될 중세 수두원의 신비와 기적의 전조와 같은 것들입니다. 이러한 신비는 지역의 미신들과 교묘하게 접목되면서 더욱 신비적인 것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우리는 초대교회 문헌들을 살펴보면서 시간이 흐를수록 삶에서 교리로 무게중심이 바뀌고, 다시 신비와 신화적인 이야기가 교리를 대체해 나갑니다. 어쩌면 중세의 인문주의 운동은 비록 세속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지만 종교개혁 사상과 어느 한 면에서도 맥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근본으로 돌아가라(Ad Fontes)’는 원색적 구호와 만나기 때문입니다.

 

교부 문헌들은 우리에게 중대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날마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 원하는지를 깊이 묵상하고 실천하는 삶을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것을 말해 줍니다. 우리 삶을 말씀의 거울 앞에 날마다 비추며 그 말씀으로 되돌아가기를 쉬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반응형
그리드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