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의 성령론 / 로이드 R. 니브 / 차준희.한사무엘 옮김 / 새물결플러스
구약의 성령론
로이드 R. 니브 / 차준희.한사무엘 옮김 / 새물결플러스
성령, 아마도 20세기 교회사를 이끈 가장 중요한 주제일 것이다. 성령은 성경의 시작만큼 오래된 주제이며, 구약의 역사와 더불어 신약의 교회를 태동시킨 가장 중요한 주제이다. 종교개혁 시대가 도래하자 잠잠하던 성령론은 다시 하나님을 앎과 회심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존재로 떠오른다. 그리고 다시 교리에 함몰된 시기에 접어들다 18세기 부흥운동과 더불어 폭풍처럼 교회사 전면에 떠오른다. 그러나 비평학이 등장하면서 성령론은 다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다. 사람들의 관심에서 벗어난듯하더니 20세기 중반 실존주의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포스트모더니즘 시대가 도래하면서 교회는 다시 성령에 휩쓸리게 된다. 성령론은 교리와 경쟁하듯 밀당해 왔다. 그러나 단 한 번도 교회사에서 사라진 적이 없다. 좋다. 그럼 이제 성령론이 무엇인지 한 번쯤 조직신학적으로 접근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현재 우리나라에 번역된 ‘구약 성령론’에 대한 자료는 미미하기 그지없다. 고작해야 석사 학위 논문을 증보한 윌프 힐데브란트의 <구약의 성령 신학 입문>(이레서원)과 멜리딧 G. 클라인의 <구약에 나타난 성령의 형상>(줄과 추), 레온 J. 우드의 <구약성경의 성령론>(CLC)가 고작이다. 위 책들은 비록 좋은 책들이기는 하지만 높은 수준의 학자적 소양이 부족하기 때문에 아쉬움을 남긴다. 그야말로 구약의 성령론은 주제도 어렵지만 자료도 빈약하다. 바로 이런 이유만으로도 로이드 R. 니브의 책은 충분히 환영할만하다.
오늘 살필 책은 몇 가지 점에서 매우 탁월하다. 먼저 충분히 신학적 소양을 갖추고 있다. 저자인 로이드 니브는 뉴욕 유니온 신학대학원에서 신학박사학위를 받았으며, 40년간 아내와 함게 루터교 소속으로 일본에서 선교사로 섬겨왔다. 선교사는 성령에 민감하다. 성령은 회심과 성화에 관여할 뿐 아니라 치유와 부흥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18세기 부흥 운동사와 관련된 흔적들을 찾아본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대부분의 기하급수적 성장 직전에 성령운동이 일어났다는 점을 기억한다면 선교와 성령론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18세기 최고의 신학자요 부흥사였던 조나단 에드워드의 책들 속에 ‘성령’에 대한 이야기 적지 않음을 안다면 교회 성장과 성령은 불가분의 관계가 분명하다.
또한 이 책은 탄탄한 성경 신학에 근거한다는 점이다. 김근주 목사는 추천서에서 ‘1972년에 초판이 나왔을 때는 이 주제를 다룬 최초의 책에 속했고, 이후로 여러 책들이 등장했지만, 본서는 지금도 여전히 기본적이면서도 충실한 생각을 담고 있는 책’이라고 평한다. 그렇다. 이 책은 제목대로 구약에 나타난 성령을 이해하는 중요한 책이면서 ‘하나님의 영’에 대한 명료한 이해를 주는 책이다. ‘구약의 성령론 연구자들은 결코 이 책을 지나쳐가지 못할 것’이라는 류호준 교수의 충고는 꼭 새겨들어야 한다. 구약의 성령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원한다면 가장 먼저 이 책을 읽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이 책은 ‘루아흐’라는 히브리 단어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루아흐’는 대개 성령, 바람, 하나님의 영등으로 번역된다. 저자는 바람이라는 자연적 의미를 가능한 배제하고 ‘하나님의 영’ 즉 성령으로 번역될만한 본문들을 추려내고, 그것을 역사와 시대별로 정리한다. 서론에서는 ‘루아흐’의 의미와 기원 등을 개론적으로 다룬다. 2장부터 6장까지는 시대별로 ‘하나님의 영’이 어떤 의미를 가지며, 어떻게 시대 속에서 나타났는지를 탐색한다. 마지막 7장에서는 ‘영과 야웨와의 관계’를 연구한다.
일단 저자의 의도와 목적, 그리고 책의 결론부터 내려보면 이렇다. 이 책은 성령에 대한 포괄적인 주제를 다루지 않는다. 즉 창조와 성령 충만, 지혜의 말씀 등 다양한 측면에서 성령을 다루지 않는다. 오직 ‘루아흐’라는 단어와 연관된 구절과 배경, 그리고 ‘하나님의 영’으로 번역되는 성령의 역할을 논한다. 저자는 1962년 출간된 다니엘 리스의 <루아흐: 구약의 숨결>에 빚을 졌다고 말한다. 심지어 연구가 거의 완성 단계에서 이 책을 발견하고 읽었을 때 자신의 주장과 목차까지 비슷하다고 밝힌다. 아마도 ‘루아흐’라는 단일한 단어를 연구함에 있어서 다양성보다는 일관성이 더 부여된 것이 분명하다. 자, 이제 책의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보자. 이 책은 어떤 비평적 관찰보다는 저자의 주장을 차분히 따라갈 때 많은 이해를 얻을 수 있다.
서론에서는 ‘루아흐’가 가지는 의미와 발전 등을 찾아낸다. ‘루아흐’는 대체로 ‘영’ ‘바람’이라는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한다. 그러나 의미는 다르지만 바람과 영은 전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통제할 수 없는 무형의 존재로서 그 의미가 강한다. 저자는 ‘바람의 움직임이 사람의 통제권 너머에 있듯이 그 영의 강림도 오직 기다려질 뿐이지 결코 강요될 수 있는 것이 아니’(25쪽)라고 말한다. 루아흐가 하나님과 연관될 때 ‘하나님의 영’으로 해석되고, 그렇지 않을 경우 그냥 자연적인 ‘바람’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많은 곳에서 자연적인 바람과 하나님의 영이 모호하게 섞여 있다는 것은 성경의 저자들이 의도적으로 구분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많다. 루아흐는 ‘생명’을 부여할 때, ‘생명 자체’일 때, 때로는 ‘하나님의 분노’(26쪽)을 나타낼 때도 사용한다. 저자는 이러한 루아흐의 의미를 ‘능력, 생명, 분노’(27쪽)라는 세 가지 의미로 정리한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본론에 속하는 2장부터 6장까지는 성경 역사 속에 나타난 ‘루아흐’를 탐색한다. 2장은 ‘가장 오래된 본문’이란 제목을 달고 성경에서 원시적이라 할만한 구절을 찾아 분석한다. 저자는 이곳에서 루아흐가 가지는 초기의 의미를 찾고 분석하면서 이후의 뜻과 적지 않은 차이가 있음을 지적한다. 초기의 뜻은 대체로 루아흐가 ‘언약을 섬기기 위한 카리스마적인 영’(64쪽)이었음을 밝힌다. 이 시기에 임한 영은 ‘과격한 요소들을 전혀 나타나지 않’으며, ‘일시적이거나 간헐적이지 않’고, ‘영속적이며 지속적’(71쪽)이다. 또한 저자는 구약의 ‘루아흐’는 다양하게 사용되기는 하지만 ‘바람을 내뿜는 야웨에 대하여 이야기하지 않’(40쪽)으며, 그 ‘바람을 하나님의 호흡’으로 묘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즉 창조된 바람으로서의 ‘루아흐’와 하나님의 영으로서의 ‘루아흐’는 엄격하게 구분된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현대의 성령론과는 약간 다른 의미를 갖는다.
3장은 급격한 변화가 일어난다. 3장의 제목은 ‘영의 사람은 미쳤다:엘리야로부터 바빌론 유배까지’인데 현대의 오순절 운동과 가장 밀접하게 연관된 부분이다.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히면 미친 상태, 즉 황홀경의 상태에 빠지는 시기가 바로 이 시기다. 이 시기는 대체로 사사 시대와 왕국 시대를 일컫는다. 저자는 ‘엘리야가 갑작스럽게 사마리아에 있는 궁정에 나타남으로써 하나님의 영과 관련하여 새로운, 그리고 이전과는 다른 단계가 시작된다.’(77쪽) 단언한다. 하나님의 영을 구분할 때 엘리야 이전과 이후의 시대로 구분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시기는 안정된 시기를 넘어 멸망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가는 고삐 풀린 망아지와 같은 시대다. 이 시기는 선지자들이 독보적으로 많이 출현한다. 놀라운 것은 멸망 직전인 ‘예레미야의 시대에는 영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78쪽)는 것이다. 저자의 말대로라면 이 시기의 ‘영의 출현은 예언자들에 의해 시내 산 언약이 재확인됨을 의미하고, 야웨는 유일한 분으로서 자신의 백성을 통치하시는 주님이라는 사실이 재천명됨을 의미’(79쪽)한다. 반어적으로 이 시기는 야웨의 신앙이 무너지고 우상숭배가 가장 극심한 시기라 할 만한다. 그렇다면 영에 사로잡힌 선지자들은 분명 우상들과 대항하는 것이 맞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영은 ‘야웨의 백성을 겨냥하여 징벌하시고 파괴하는 능력이 되었다는 점에서 있어서 중요한 변화’(115쪽)가 일어난 시기다.
4장은 바빌론 유배 시기와 재건 초기의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영의 역할을 다룬다. 이 시기는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이제 하나님의 영은 수많은 신들 중의 하나이다. 당시 지역 신의 개념이 강하게 작용한 시기에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였던 예루살렘으로부터 떨어진 타국에서 그들은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다니엘과 에스겔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힌 선지자들은 지금까지의 다른 모습으로 하나님을 소개할 필요가 생긴 것이다. 저자는 이 시기의 영의 활동을 네 가지로 정리한다. 개인의 부각(123쪽), 내적인 삶(125쪽), 미래를 향한 전환(127쪽), 영의 우주적인 활동(128쪽)이 그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영은 갑작스럽게 ‘창조의 영’(129쪽)이라는 초기의 의미로 소환된다. 이러한 소환은 포로가 죽음이며, 바빌론은 무덤이며, 하나님은 영이 임하여 그들을 새롭게 창조해야 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에스겔 37장을 통해 ‘포로기에 이스라엘의 몸이 완전히 죽었을 때, 예언자들은 자신의 백성에게 새로운 생명을 부여하는 야웨의 창조적 능력을 보았다.’(146쪽)고 평한다. 이제 ‘루아흐’는 창조 때에 그들에게 생명이 되었던 것처럼 ‘동일한 영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의 공동체를 다시 살아나게’(147쪽)한다. 창조와 부활의 의미를 다른 한 가지의 의미를 다 부여하는데, 그것은 ‘임재’이다. 저자는 ‘그의 존재의 충만함 즉 그의 현존을 의미한다. 하나님 자신은 그 영을 통하여 그의 백성과 함께 한다.’(152쪽)고 정확하게 짚어 낸다. 5장은 4장의 연장이며, 예언의 영으로서 포로 이후 재건 운동 속에서 하나님의 영이 어떻게 활동했는지 탐색한다.
6장은 시대 속의 ‘루아흐’를 살펴보지만, 율법 시대의 도래로 소멸해 가는 과정을 다룬다. 저자의 주장을 어느 정도까지 수용할지 조금 난감하기는 하지만 대체로 재건시대에는 ‘루아흐’의 활동은 미미하고, 거의 감지되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저자는 ‘지도자로서 율법 교사가 재건된 공동체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자들의 자리를 대체’(227쪽) 했다고 보며, ‘주요 흐름에서 활동하지 않으며’ 오히려 ‘보조적인 역할’만 하는 쪽으로 변화되었다고 말한다. 심지어 시간이 갈수록 ‘영은 그나마 감당하던 주변적인 역할에서조차 밀려나 거의 완전히 배제’(228쪽) 당했다고 말한다. 결론에 해당하는 7장에서 저자는 ‘야웨와 영’의 관계를 다루면서 ‘영의 인격화’의 가능성을 타진한다. 하지만 저자는 용감하게 ‘최종 결론은 압도적으로 부정적’이며, ‘구약의 경계 내에서 영의 인격화는 나타나지 않는다.’(242쪽) 결론 맺는다.
석사 과정 밖에 밟지 않는 필자에게 저자를 논박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몇 가지 점에서 저자는 좀 더 고민하며 연구할 필요가 있다. 부록에서 한사무엘과 차준희 교수가 논문이 각각 한 편씩 실려 있다. 이곳에서 한세대 차준희 교수는 ‘구약에 나타난 창조의 영’이라는 논문에서 ‘루아흐’(영)가 ‘창조적인 말씀의 동역자’(330쪽)이라고 예리하게 지적한다. 필자의 불만도 이 부분이다. 비록 저자가 포로기의 루아흐를 살펴보면서 회복과 부활의 문제를 언급하기는 했지만, 창조하는 영과 창조하는 말씀과의 연관성은 거의 언급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루아흐’가 지혜의 영으로서 존재한다는 점은 간략하게 언급하며, ‘오래된 지혜는 인간 지혜의 근원을 신적인 자료에 대한 언급이 아니라 경험이나 교육을 통해 추척한다.’(206쪽)고 축소시킨 점은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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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된 책이긴 하지만 윌프 힐데브란트의 책도 구입해 읽으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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