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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인물 연구] 에녹(Enoch)

샤마임 2018. 4.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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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인물 연구] 에녹(Enoch)


1. 개요

에녹  :가르치다
체크라는 히브리에서 왔다. 체크는 입술, 입, 입의 뿌리란 뜻을 가지고 있다.  셋의 후손이다. 가인의 아들도 동일한 에녹이나 동명이인이다. 야렛은 162세에 에녹을 낳는다.  에녹은 65세에 므두셀라를 낳는다.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했고, 죽지 않고 하늘에 올라간다. 이 땅에서 삶은 365살이 된다.

2. 생애

족보

가인의 아벨 살해 후 아담은 가인을 버리고 셋을 통해 자신을 계승한다. 4:25에서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셋’이라고 부른다. 셋의 후손을 통해 새로운 족보가 만들어 진다. 에녹의 아들 므두셀라까지의 족보다.

아담-셋-에노스-게난-마할랄렐-야렛-에녹-므두셀라

에녹은 아담의 육대손이 된다. 그러나 대개 칠대 손으로 칭하는데 아담까지 했을 때이다. 히브리 족보 계산은 우리나라와 다른 것 같다. 성경은 대개 그를 칠대 손으로 말한다.

에녹에 대한 기록들

에녹이 기록된 창세기 5:18-24이다.

“18 야렛은 백육십이 세에 에녹을 낳았고 19 에녹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0 그는 구백육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21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22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3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24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그 외 에녹에 대한 기록은 대상 1:3, 누가복음 3:37, 히 11:5, 유 1:14이다. 많지 않으니 이곳에 그대로 인용해 보자.


대상 1:1-3
1 아담, 셋, 에노스, 2 게난, 마할랄렐, 야렛, 3 에녹, 므두셀라, 라멕,

이 부분은 1절부터 27절까지 이어지는 아브라함까지의 족보다.

누가복음 3:37
37 그 위는 므두셀라요 그 위는 에녹이요 그 위는 야렛이요 그 위는 마할랄렐이요 그 위는 가이난이요 38 그 위는 에노스요 그 위는 셋이요 그 위는 아담이요 그 위는 하나님이시니라

이곳은 예수님으로부터 하나님까지의 역으로 올라가는 족보이다.

히브리서 11:5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이것은 ‘믿음 장’으로 잘 알려진 히브리서 11장이다. 이곳에서 에녹은 믿음으로 죽음을 당하지 않고 곧바로 하나님께서 옮기셨다고 말한다. 믿음은 죽음을 이긴다.

유다서 1:14-15
14 아담의 칠대 손 에녹이 이 사람들에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15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하지 않은 자가 경건하지 않게 행한 모든 경건하지 않은 일과 또 경건하지 않은 죄인들이 주를 거슬러 한 모든 완악한 말로 말미암아 그들을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이 부분은 영지주의자들을 반박하고 공격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유다가 인용하는 것은 일반 구약 성경이 아니다. 외경에 속하는 에녹서의 일부이다.  에녹서라는 이름가진 외경은 모두 3개다. 《에녹 1서》·《에녹 2서》·《에녹 3서》
에녹서(The Book of Enoch) 또는 《에녹 1서》를 말한다.

에녹1서는 위경에 속하며 가톨릭 성경에 들어가 있다. 에녹1서는 에티오피아어로 존재하며, 에녹2서는 고대 슬라브어, 에녹 3서는 히브리어로 존재한다. 에티오피아 정교회는 에녹1서를 정경으로 받는다. 현재 전해지는 에녹서는 마카오시대인 기원전 160년경에 기록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보라, 그분은 일만 명의 성자를 이끌고 오셨다. 그들은 심판을 행하기 위해서이다. 그들은 불경건한 자들을 멸하고 모든 육적인 자 즉, 죄인과 불경건한 자들이 그분에 대하여 행한 모든 불의를 심판할 것이다.”(에녹1서의 일부, 유다서에서 인용한 부분)

에녹의 시대는 극도로 타락하신 시대다. 성경에 의하면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했고, 일상에서 하나님을 추구했다. 하나님과 동행함을 무엇인지 다음 주제에서 다룰 것이다.

동행 : 에녹은 어떻게 승천했는가?

에녹의 삶은 특별한 것이 없지만 신학적으로 너무나 중요한 문제에 봉착한다.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했기 때문이다. 죽음을 이길 수 있는 신앙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신학적 문제를 토론하는 곳은 아니지만 몇 가지만 정리해 보자.

동행이란 무엇인가?

사용된 단어는 히브리어 ‘할라크  ’이다. 창 5:22에서 할라크는 피엘 동사, 즉 능동 강조형이다.(BDB 사전) 고든 웬함은 니팔형이 아니라 단순형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어느 말이 옳은지 히브리어 전문가가 아닌 필자로서는 판단하기 쉽지 않다. 6:9에서 노아에게 사용된 동행도 동일한 단어 동일한 용법이다. 창 3:8에서는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에서는 히필형이 사용되었다. 동일한 형태로 스가랴 10:12에서도 사용된다.

스가랴 10:12
내가 그들로 나 여호와를 의지하여 견고하게 하리니 그들이 내 이름으로 행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할라크 동사가 가지는 의미는 일반적인 ‘산책하다’ ‘함께 걷다’ ‘어떤 일을 행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게 된다. 만약 할라크가 사람과 함께하면 ‘동행’이 될터이지만 어떤 행위 자체만 드러낼 때는 ‘행한다’는 뜻을 갖는다. 그럼에도 할라크 자체만으로 동행의 다른 뜻을 찾기는 쉽지 않다. 즉 동행으로 죽음을 이길 수 있다는 신학적 의미는 찾을 수 없다는 말이다. 우리는 일반적인 ‘동행’이 ‘할라크’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가정에서 풀어내야 할 것 같다.


지금까지 살펴본 할라크의 기본적인 의미인 ‘걷다’와 ‘행하다’에 근거를 두고 생각해보자. 동행은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함께 걷다’이다. 그런데 보이지도 않고 느낄 수도 없는 사람이 아닌 하나님과 어떻게 동행할 수 있을까? 성경에서 동행은 ‘함께 걷다’의 의미에서 확장된 ‘순종’을 말한다. 계명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길이다. 하나님의 길을 걷다.


성경에서 ‘길’은 성향이나 행함의 방향을 뜻한다. 누군가의 발자취를 따라 걷는(행하는) 것을 ~~의 길이라 표현한다. 예를 들어 가인처럼 행동하면 가인의 길(유 1:11)이라 하고, 여로보암을 따르면 여로보암의 길(왕상 15:34, 16:2,9 22:26), 다윗을 따라 행하면 다윗의 길(대하 34:2)이라고 말한다.

유다서 1:11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 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따라 멸망을 받았도다

 

열왕기상 15:34

바아사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며 그가 이스라엘에게 범하게 한 그 죄 중에 행하였더라

역대하 34:2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그의 조상 다윗의 길로 걸으며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고

하나님과 동행한다고 말할 때는 여호와의 길을 걷는 것이며, 그것은 여호와의 계명을 행한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할 때는 하나님이 계명을 따라 걸었다는 말이며, 삶으로 주님을 따라 살아갔다는 말이 된다. 여기까지는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문제는 여기서 부터다.

먼저는 계명이 있었는가라는 난제가 있고, 다른 하나는 행함으로 죄를 사함 받을 수 있는가라는 신학적 난제가 생긴다. 우리는 이 문제를 풀수 있는 유일한 단서는 히브리서 11:5 밖에서는 찾을 수 없다.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는 ‘믿음’이 무엇인지 증명하지 않고서는 두 번째 난제가 풀리지 않는다. 첫 번째는 난제는 모세가 십계명을 받기 전에 안식을 어긴 사건을 언급하는 것을 계명이 이미 존재하나고 본다.


출애굽기 16:23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일은 휴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안식일이라 너희가 구울 것은 굽고 삶을 것은 삶고 그 나머지는 다 너희를 위하여 아침까지 간수하라

출애굽기 16:29
볼지어다 여호와가 너희에게 안식일을 줌으로 여섯째 날에는 이틀 양식을 너희에게 주는 것이니 너희는 각기 처소에 있고 일곱째 날에는 아무도 그의 처소에서 나오지 말지니라

또한 죽음이란 계명에 대한 불순종의 결과이기 때문에 십계명 이전에 이미 계명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에녹은 죄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을까? 우리는 신약의 유일한 에녹의 해석구절인 히 11:5절 넘어가야 한다.

히브리서 11:5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히브리서의 기자의 해석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에 방점이 찍힌다. 여기서 히브리서 전체를 살펴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일단 히브리서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표현은 ‘더 나은’이다. 천사보다 ‘더 나은 그리스도’, 모세보다 ‘더 나은 그리스도’, ‘여호수아 보다 더 나은 그리스도’, 율법 보다 ‘더 나은 그리스도’가 히브리서가 강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히브리서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믿음은 구약의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말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에녹을 설명한 다음 구절에서 히브리서 기자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을 ‘믿음’으로 결론 내린다. 그 믿음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을’ 믿어야하고, ‘자기(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는 것이다. 계심과 상주심은 믿는 믿음이 곧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다. 이 상을 바라보았던 구약의 사람들은 자신의 생명보다 본향가기를 소망하고 그렇게 살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에녹의 ‘하나님과의 동행’의 의미에서 다음 몇 가지를 묵상의 주제로 고민할 수 있다.

[묵상할 주제]

1. 에녹은 악한 시대에 살았다.
가인의 족보를 통해 우리는 에녹이 살았던 시대가 얼마나 악했는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녹은 오롯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선택했다. 악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자기가 옳다고 생가각하는 바를 행한다.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악은 각자를 신으로 만들었고, 하나님을 상대화 시켰다.

2. 에녹은 희미한 계명에도 순종했다.
수많은 율법과 계명이 분명히 드러나 구약도 신약의 복음에 비하면 희미하고, 그림자에 불과하다. 에녹이 살았던 시대는 정해진 율법이 있던 시대도 아니다. 그럼에도 그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았다. 그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뜻을 구했고, 무엇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인가를 고민하며 살았다.

3. 믿음의 삶은 예언하는 삶이다.
믿음은 결국 본향을 향하는 삶이다. 유다서의 에녹에 대한 예언은 외경에 기록된 것이 아니라 원래 에녹의 삶이었다. 빛은 존재만을 어둠을 물리친다. 예수님은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존재하도록 제자들을 부르셨다. 영원한 본향이 있음을 알리고, 이 땅의 삶은 심판이 있다는 것을 전하는 삶이 믿음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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