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팡세32

중용, 도는 가까이 있다. 중용(中庸), 도는 가까이 있다. 이 부분은 도를 실천하려 할 때,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부분이다. 주희는 도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이론 적으로도 남아서는 안 되고 삶 속에서 실천되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도라고 말한다. 주희에 의해서 편집된 [중용]의 13장과 15장의 내용을 통해 '도란 무엇인가'를 살펴보자. 13장 1. 공자가 말했다. “도는 사람에게서 멀리 있지 않는데 사람들이 도를 행하면서 사람에게서 멀어지니 이렇다면 도라고 할 수 없다.” 2. [시경]에 “도끼자루로 쓸 나무를 베는구나! 도끼자루로 쓸 나무를 베는구나! 도끼자루의 모형은 멀리 있지 않다”고 하였다. 도끼자루를 쥐고서 도끼자루로 쓸 나무를 베면서 힐끔 쳐다보고는 오히려 멀리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군자는 사람의 도.. BIble Note 2011. 10. 11.
팡세 257 세 부류의 사람들 이 세상에는 다만 세 부류의 사람들이 있을 따름이다. 첫 번째는 신을 발견하여 이를 섬기는 사람들, 두 번째는 신을 발견하지 못하고 그를 애써 구하는 사람들, 그리고 세 번째는 신을 발견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추구하려 하지도 않는 사람들이다. 첫 번째 사람들은 도리에 합당하고 행복하며, 세 번째 사람은 도리에 어긋나기 때문에 불행하며, 중간의 사람들은 도리에 합당하지만 불행하다. Pensées 2011. 9. 30.
팡세 200, 감옥에서 화투치기 파스칼은 내기의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남겨진 한 시간의 문제를 다른다. 나에게 한 시간의 시간이 주어진다면 어떻게 사용하겠느냐는 것이다. 팡세 200 한 남자가 감옥에 갇혀 있는데 자기에게 선고가 내려졌는지도 모르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알 수 있는 여유는 한 시간밖에 없다. 만약 선고가 내려진 것을 알게 된다면 그 한 시간 안에 충분히 선고를 취소 받을 수 있는 경우, 그 시간을 선고가 내려졌는지의 여부를 확인하는 데 쓰지 않고 피케놀이(카드놀이의 일종)에 허비한다면 그것은 자연에 어긋나는 일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 자연에 어긋난 일이다. 이것이야 말로 신의 손(신의 벌)을 무겁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신을 구하는 사람들의 열정만이 신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신을 구하지 않는 사람들의 .. Pensées 2011. 9. 29.
팡세, 실물과 그림 실물과 그림 실물을 보고는 아무도 감탄하지 않는데, 그것을 묘사한 그림을 보며 흡사하다고 감탄하게 되니, 그림이란 이처럼 공허한 것이다. -파스칼, 팡세에서... 우리 일상에서 자주 일어나는 현상이다. 아무도 흉내 내지 못하는 피조물은 놀라지 않으면서 그것을 흉내 낸 조잡한 그림에는 놀라워하는 것이 인간이다. 왜 놀라는 것일까? 사람이 신을 흉내 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림을 보면서 이렇게 말한다. "와! 정말 똑같다." 사람도 신처럼 그 어떤 것을 비슷하게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능력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대해서 아무런 반응도 느낌도 갖지 않는 것이 사람이다. 그러니 인간이 가진 놀라움이란 터지기 직전의 풍선과 같은 것이다. 파스칼에 인간의 본성에 이렇게 쐐기를 박는다. "인간의 .. Pensées 2011. 9. 28.
팡세 263 기적의 무용성 보호되어 있는 글 입니다. 2011. 7. 13.
팡세 358 인간의 불행 Blaise Pascal 팡세 358 인간의 불행 끊임없이 자신을 천사이고 싶어하는 인간을 고발하는 파스칼의 독설은 그의 팡세 358번에서 정점을 이룬다. 인간은 천사도 아니거니와 짐승도 아니다. 그런데 인간의 불행은 천사를 닮고 싶어하면서도 짐승을 닮아가고 있는 데서부터 비롯된다. 인간들의 가지는 이중적인 고립은 철저한 자기고집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하나님을 버리고 자신을 하나님으로 자리로 올리고 싶었던 욕망을 소외를 만들고 말았다.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만의 존재의미를 찾고 싶어하지만 삶을 짐승의 삶이다. 천사와 짐승은 양 극단으로 서로 완벽하게 닮아있다. 천사가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적 순종으로 살아간다면 짐슴은 철저히 동물적 본성에 충실하게 살아간다. 이것은 마치 북극과 남극이 완전히 다른 세상이지만 .. Pensées 2011. 7. 12.
팡세 585 숨어 계시는 하나님 팡세 585 숨어 계시는 하나님 585 신이 자신을 숨기려 하셨던 일 만일 종교가 오직 하나밖에 없다면, 신은 그 속에 뚜렷하게 나타나실 것이다. 만일 우리 종교에만 순교자가 있었다 해도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신은 이처럼 숨어 계시므로, 신이 숨어 계심을 설교하지 않는 종교는 어떤 것이든 모두 진리가 아니다. 또한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 모든 종교도 인간을 이롭게 하지는 못한다. 그런데 우리가 믿는 종교는 그 모든 것들을 할 수 있다.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사45:15)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에 대하여 숨어계시는 분이라고 표현했다. 이사야 선지자는 어떻게 해서 이런 표현을 썻을까? 앞뒤 본문을 살피면 이사야선지자의 이 표현은 역사를 운행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정의다. 이.. Pensées 2011. 6. 22.
자판기와 하나님 자판기와 하나님 모든 것이 작은 것에서 시작된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이란 말씀처럼 말이다. 부활절 주일에 메모한 것이지만 자판기와 하나님이란 주제는 두어 달 전부터 고심했던 부분이다. 그러다 부활 주일 수요일 설교를 준비하면서 구체적으로 메모한 해 본 것이다. 자판기와 하나님이란 주제는 오래된 주제이며 우상과 관련될 때, 자판기=우상 이란 공식으로 만들어진다. 하나님은 인간의 계획과 의도되로 되지 않는 무정성의 하나님이다. 출애굽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구름 속에서 말씀하셨다는 것은 숨겨져있다는 뜻이다. 신비로움과 경이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자판기는 어떤가? 철저한 인간의 세속을 상징하며 계획하고, 의도한 대로 되는 것이다. 바벨탑 사건은 하나님 없는 완벽한 인간만의 파라다이스를 만드는.. 일상이야기/팡......세 2011. 4. 29.
팡세 498 신앙, 분열된 자아의 싸움에서 승리하기 팡세 498 신앙은 고통이다. 신앙을 가지는 데에는 고통이 따르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 고통은 우리 속에서 싹트기 시작한 신앙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아직도 거기에 남아있는 불신앙에서 비롯된 것이다. 만일 우리가 감정이 회개하기를 거부하지 않고, 우리의 부패가 신의 성경을 반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신앙을 가지는 데 아무런 고통도 겪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인간이 가지고 태어난 악덕이 초자연적인 신의 은총을 거역하는 데 따라서만 괴로움을 당하게 될 것이다. 인간의 고통은 불신앙와 신앙이 싸운데 내분 때문에 일어난다. 우리의 마음은 상반되는 두 개의 노력에 의해서 분열되는 것을 느낀다. 그런데 이런 괴로움의 원인을 우리를 붙자아 두고 있는 이 세상에 돌리지 않고, 우리를 인도하는 신 때문에 빚어진 것이라.. Pensées 2011. 1. 22.
절망하는 인간 안에 잠재된 죄의 적극성과 신앙 절망하는 인간 안에 잠재된 죄의 적극성과 신앙 키에르케고르는 일찌기 이렇게 말한바 있다. 기독교적인 것은 믿지 않으면 안된다.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영역 안의 것들뿐이다. 신적인 것에 대한 인간의 관계는 신앙뿐이다. 기독교적으로 이해하면 죄는 인식 안에 있지 않고 의지 안에 있다. 그리고 의지의 이러한 타락은 개체의 의식을 초월한다. 이렇게 해서 여기에 또 좌절의 표지가 나타난다. 죄가 무엇이며, 죄가 얼마만큼 깊이 박혔는가 하는 것을 인간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는 신의 계시가 필요하다는 점에, 좌절의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죽음에 이르는 병 계시는 근본적으로 자연인을 절망시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의 계시는 자연인의 죽음을 초래하며, 다시 살아남 없이는 결코 계시를 수납하지 못한다.. 일상이야기/팡......세 2011. 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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