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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설교 일상의 은혜 막4:1-12

샤마임 2013. 10. 12.

주일오후설교

일상의 은혜

막4:1-12

 

인간은 어떻게 해서 알게 되는가?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이 가장 힘써온 것 중의 하나는 교육에 관한 것입니다. 크게 두 가지의 방법을 추구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라는 인간론에 따라 달라집니다. 소위 말하는 성선설(性善說)과 성악설(性惡說)이 그것입니다.

 

성선설은 인간이 태어날 때 악하게 태어난 생각합니다. 즉 인간의 본성 자체는 악이며 쉽게 악을 저지른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을 악한 존재로 규정하게 되면, 인간을 교육할 때 외부로부터의 선(善)을 주입하게 되고, 내면의 악을 억제하는 쪽으로 기울어지게 됩니다. 인간을 악으로 규정하면 강제적이고 물리적인 방법을 사용합니다. 매를 때린 다거나 벌을 주는 방식으로 악을 억제하고, 강제로 선을 주입하여 착하게 교정하려 합니다. 이때 교육의 주체는 교사가 되며, 학생은 수동적으로 반응하고 ‘순종’과 ‘훈련’이 중요한 주제가 될 것입니다. 이러한 교육이론은 본질주의 교육사상(本質主義敎育思想)이나 항존주의(恒存主義) 교육사상이 이에 속합니다.

 

반면 성선설에 근거한 교육한 교육이론은 교육의 주체는 학생이 됩니다. 교사는 수동적인 입장에서 학생이 가지고 있는 선을 계발해주는 코치 역할에 머물면 됩니다. 인간은 본래 선하지만 사회생활을 하면서 악한 영향을 통해 악해 진다고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선설에 근거한 교육에서는 인간의 본성인 선에 충실하도록 배려합니다. 자기 안에 있는 선을 잘 계발하여 완전함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주장은 존 듀이가 주장한 진보주의 교육이론과 경험을 우선으로한 재건주의 교육입니다. 중국의 맹자나 영국의 루소의 자연주의 교육이론을 들 수 있습니다.

 

자,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이들을 강제적으로 주입하는 성악설이 좋습니까? 아니면 자연스럽게 배우도록 도와주는 성선설이 좋습니까? 중요한 것은 아마 성경이 아닐까요? 본문을 통해서 예수님은 어떻게 교육하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비밀을 알려 주실까요?

 

1. 자연을 통해 가르치시다.

 

먼저 예수님은 자연 속에서 가르치셨습니다. 1절에 ‘다시 바닷가에서 가르치시니’라고 합니다. 주님은 학교에서나 회당이 아닌 자연 속에서 자주 가르치셨습니다. 물론 회당에서도 설교하시고 가르치셨습니다. 집에서 역시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아주 자주는 자연입니다. 즉 우리의 일상이 교육의 장소이며 도구였습니다.

 

베드로의 배 위에서 가르치시다가 베드로에게 곧바로 그물을 내리라고 한 적도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시고 내가 진짜 하늘로서 온 떡이라고 하셨습니다. 산과 들로 다니면서 공중의 새를 가리키시며 하나님께서 돌보시는 새다 봐라. 하물며 너희들은 천부께서 돌보지 않겠느냐고 위로해 주셨습니다. 갈릴리 바다를 지나시다 폭풍을 만났을 때 제자들이 두려워하자 왜 이 때 너희가 가지고 있는 믿음을 사용하지 않느냐고 꾸짖기도 했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을 알기 위해 특별한 장소나 방법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 속에서도 하나님을 배울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자연은 하나님의 형상이 담겨 있고, 특히 사람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선명하게 새겨져있습니다. 시편 8편을 보십시오. 하늘의 달과 별을 보고 창조주의 손을 보았습니다. 시편 19편을 토라송이라고 하는데, 태양의 찬란함을 통해 하나님의 진리가 온 우주에 편만함을 말해 줍니다. 그 외도 얼마나 많은 곳에서 자연을 통해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는지를 일러 줍니다. 해, 달, 별, 나무, 곤충, 코스모스, 백합, 해바라기, 참외, 오동나무 등 모든 것이 하나님을 알려주는 우리의 선생입니다. 우리의 일상이 진리의 교육장입니다.

 

하나님을 잘 아는 사람은 자연과 우리의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2. 비유로 말씀하시다.

 

두 번째 교육 방법은 ‘비유’입니다. 사전을 찾아보았습니다.

비유1 (比喩/譬喩): [명사] 어떤 현상이나 사물을 직접 설명하지 아니하고 다른 비슷한 현상이나 사물에 빗대어서 설명하는 일.

주님께서 비유를 사용하시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쉽게 알려 주기 위해서, 다른 하나는 숨기기 위해서입니다. 비유를 통해서 드러내면서 숨깁니다. 12절 말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이 말씀은 이사야 6:9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사야 6장은 이사야의 소명장입니다. 웃시야 왕이 죽고 실의 빠진 이사야에게 하나님께서 환상 가운데 나타나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소명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무서운 사실은 보여 주지만 볼 수 없도록 그들의 눈과 귀를 막아 버리겠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무슨 말일까요?

 

자연은 하나님의 뜻을 발현(發顯)합니다. 타락이전의 인간은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라 차렸습니다. 영적인 눈이 감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탐욕이 그들의 눈을 가려 더 이상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자연을 통해 드러낸 계시를 신학적 용어로 자연계시 또는 일반계시라고 말합니다. 자연계시의 가능성은 다음 구절에서 발견합니다.

롬 1: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자연은 하나님을 완벽하게 드러냅니다.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모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연을 통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영적인 눈이 감겼기 때문입니다. 비유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말씀하시지만 들을 수 있는 귀가 없기 때문에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도 보면,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고 반복하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9절에서 역시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의 조명하심으로 마음이 열려 깨닫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비유, 즉 자연과 우리의 일상은 하나님의 분명한 음성입니다. 오늘도 일상에 뿌려 놓은 하나님의 은혜의 깨달음들을 간직하고 감사하길 소망합니다.

 

3. 열매는 순종입니다.

 

마지막 주님의 교훈을 살펴봅시다. 씨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밭은 우리의 삶입니다. 말씀이 우리의 삶에 뿌려 집니다. 대부분의 말씀은 잘 간직하지 못함으로 결국 죽고 맙니다. 그러나 마지막 좋은 밭은 말씀을 잘 듣고 받아 삼십 배와 육십 배와 백배의 결실을 맺습니다. 좋습니다. 여기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결실이 뭘까요?

한 곳만 해석해 봅시다. 24-25을 봅시다.

“24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요 또 더 받으리니 25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 말씀은 잘못하면 마태복음 7:2 비판하지 말라의 헤아림으로 오해할 수 있지만 정 반대입니다. 영어 번역을 보면 삼가라는 말은 Consider로 깊이 생각하고 숙고하다 계획을 짜다는 뜻입니다. 즉 헤아림은 묵상하고 적용하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차라리 달란트 비유와 같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자는 장사를 하지 않고 땅에 묻어 둡니다. 그러자 주님은 그것을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하십니다. 그리고 이어 있는 자는 더 받을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이런 일이 왜 벌어지는가? 시편 1편 말씀에 복 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합니다. 또한 그 뜻을 알고 싶어 읽고 또 읽습니다. 알면 알수록 더 사랑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받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잊어버리지 않고 기록하고 생각하고 삶에서 적용합니다. 그런 사람이 말씀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일상은 하나님의 교실입니다. 우리의 삶의 여정 속에서 만나는 만남과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숙고할 장소입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말씀을 심고 싹틔워야 합니다. 씨는 하늘이 아니라 땅에서 뿌리는 내리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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