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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별설교] 골로새서 1장 화평케 하시는 그리스도

샤마임 2020. 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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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별설교] 골로새서 1장 화평케 하시는 그리스도

1장은 인사와 기도로 시작합니다. 바울은 곧바로 하나님의 형상이시며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합니다. 세 번째 부분에서 교회를 향한 바울의 사역을 소개합니다.

1. 1-8절 인사와 감사

2. 9-23절 하나님의 형상이시며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3. 24-29절 교회를 위한 바울의 수고

 

1. 1-8절 인사와 감사

바울은 다른 서신서와 동일하게 하나님의 뜻으로 사도가 된 것을 소개하고 디모데와 함께 골로새 교회에 안부를 전합니다. 다른 서신서에서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이 보입니다. 뒷 부분은 동일하게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바울은 골로새 교회를 생각하며 감사했음을 고백하며 그 이유를 밝힙니다. 4절에서는 감사의 이유를 밝힙니다. 골로새 교회는 고린도 전서 13장 후반부에 소개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반복됩니다.

ㄱ.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

(τὴν πίστιν ὑμῶν ἐν Χριστῷ Ἰησοῦ)

골로새 교회를 집적 설립하지 않음에도 바울에게 있어서 골로새 교회를 향한 바울의 마음은 각별해 보입니다. 에베소에 두란노 서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할 때 골로새 사람들이 찾아와 복음을 듣고 말씀을 배운 것이 분명합니다. 바울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고 주님의 몸된 교회가 설립된 것을 보며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예수 안’에 있다는 것도 유의해 봅시다. 바울은 에베소서 2:8에서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엡 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우리가 믿는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주님의 은혜로 우리가 믿음을 얻은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한다면 믿음은 굉장히 불안해지고 불완전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언제 변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믿게 하실 때 든든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골로새교회의 믿음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ἐν Χριστῷ Ἰησοῦ)’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ㄴ.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

(τὴν ἀγάπην ἣν ἔχετε εἰς πάντας τοὺς ἁγίους)

골로새 교회는 사랑의 헌신이 무척 많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모든 성도’는 골로새 교회 뿐 아니라 근처에 있는 라오디게아와 히에라폴리스 교회 성도들을 포함한 것으로 보입니다. 믿음은 어떤 지성적 작용이나 지식의 확신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반드시 믿음의 열매, 곧 사랑의 실천이 뒤따라야 합니다. 이 점에서 골로새교회의 성도는 믿는 것과 사는 것이 일치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사랑과 헌신의 소식을 듣고 적지 않게 기뻤던 것이 분명합니다.

ㄷ. 하늘에 쌓아둔 소망

(τὴν ἐλπίδα τὴν ἀποκειμένην ὑμῖν ἐν τοῖς οὐρανοῖς)

세 번째는 소망에 관한 것입니다. 소망 즉 기대하고 바라는 것은 이 땅의 것이 아니라 하늘에 쌓아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은 문법상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주어를 하나님으로 한다면 하나님께서 골로새교회 성도들을 위해 쌓아둔 소망의 상급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다른 의미로는 성도들이 장차 누리게 될 천상의 영역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엄격하게 분리되기 보다는 소망 자체가 하나님으로 인해 일어난 것이고, 믿음과 사랑을 통해 소망을 실천한다는 점에서 두 해석은 불가분의관계로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5절 후반부부터 6절의 말씀들을 통해 더 명확해 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고 우리는 사랑을 실천함을 통해 하늘에 상급을 쌓아가는 것입니다.

마 6:19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바울은 세 가지가 서로 조화를 이루며 열매를 맺어 자라고 있다고 말합니다.(6절) 7절에서 에바브라를 소개하는 것을 보니, 그가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골로새교회를 설립한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과 소통하면서 소식을 전했던 것입니다.(8절)

 

2. 9-23절 하나님의 형상이시며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바울은 감사를 마치고 곧바로 예수님이 누구신가 소개합니다. 아마도 전에 들었겠지만 사도 바울의 입술을 통해 다시 듣게 된다면 더 큰 확신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13-22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13절)습니다. 바울은 천국이나 하나님의 나라가 아닌 ‘아들의 나라’라는 독특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아들의 나라’는 13절과 조화를 이뤄 해석해 본다면 미래에 들어갈 천국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말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 부분은 바울이 출애굽 사건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를 믿고 교회에 출석하는 것은 새출애굽 사건이며,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받는 아들로의 입양과 비교될 수 있습니다.

  • “이러한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바울은 이스라엘의 출애굽 및 약속의 땅으로의 입성과 관련된 이미지를 불러일으킨다. ‘유산’이란 단어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암시하고, ‘성도’란 말은 흔히 하나님의 백성을 의미하는 용어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이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사람들을 가리킨다.”

14절을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는 확실히 유월절 어린양이십니다.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 즉 보이는 하나님이십니다. 요한복음 14장부터 17장까지는 예수님께서 붙들리기 직전 대화를 나눈 내용이며 유언에 속합니다. 이 때 빌립이 예수님께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말합니다. 주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대답하십니다.

  • 요한복음 14:8-10] 8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10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두 번째,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입니다. 여기서 주의할 단어는 ‘나셨다’는 표현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피조물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나신 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 표현을 이해하기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낳는 것은 피조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시]2:7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행]13:33 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히]1:5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느냐

위의 구절들에 의하면 ‘낳다’는 뜻은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보이는 하나님으로서의 논증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만물이 그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선언합니다. 이 부분은 분명히 후대에 기록된 요한복음 1장의 내용과도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모든 만물이 다 그로 말이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16절 하)다고 선언합니다.

그런데 17절을 보십시오. 바로 그가 ‘교회의 머리’라고 소개합니다. 주님의 십자가 사건은 화평을 이루었고, 하나님과 만물이 화목화게 하셨습니다.(20절)

  • [에베소서 2:13-16]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참으로 예수님은 화목케하시는 분입니다.

[마]5: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3. 24-29절 교회를 위한 바울의 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바울은 이 부분에서 바울만의 매우 독특한 논리를 전개시킵니다. 24절에서 바울은 ‘너희를 위하여’ 즉 교회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며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의 육체에 채운다고 말합니다. 교회를 위한 수고를 어떻게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는 것’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먼저 성도를 위한 수고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위한 수고가 됩니다. 하지만 어떻게 그리스도의 고난이 남겨진 것인지 이해하기는 힘듭니다. 이 부분에 대해 NT Wright는 이렇게 말합니다.

  • “역사상 한 시대에서 다른 시대로 넘어가는 위대한 순간이 도래할 때 하나님의 백성은 엄청난 고난을 당할 것이라고 믿어졌다. 그러한 고난은 새 시대를 위한 해산의 고통으로 이해되었다.(롬 8:22) 그러한 고통은 메시아의 도래와 함께 수반되는 것으로 아마도 메시아 도래의 전조(예시)일 것이다. 유대의 자료들을 사용할 때는 늘 그러하듯이 바울은 이러한 유대사상을 예수의 죽음과 부활 사건을 통해 수정한다. 말하자면 옛 시대와 새 시대가 연속적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서로 겹치는 것으로 이해했다. 예수의 부활 과 함께 새 시대가 이미 시작되었지만, 옛 시대는 예수의 재림 때까지 새 나라와 나란히 지속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님의 부활과 그 분의 재림 사이의 기간은 시대의 전환기였다. 그러므로 이 기간을 ‘메시아적 탄생’의 시기로 특징지을 수 있다. 실제로 그러한 고난은 고난을 당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새 백성이라는 증거로 간주된다. ... 메시아가 자발적으로 선택한 고난의 길을 통해 세상에 알려전 것처럼(그리고 그의 부활한 몸이 못 자국에 의해 인정된 것처럼), 그의 백성들도 그들이 견디는 고난에 의해 인정 받을 수 있다.”

즉 고난은 새 시대의 사람들이 시 시대에 속해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는 필수적인 또는 불가피한 요소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라이트의 주장을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지만, 새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고난은 불가피한 것임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육신의 아들이 약속의 아들을 핍박하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새 시대에 새 언약의 공동체를 위해 ‘해산의 수고(갈 4:19)’를 하는 것을 기뻐합니다.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

이제 바울은 자신의 고난의 이유를 밝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비밀 때문인데, 그 비밀은 ‘그리스도’(27절)십니다. 2:2에서도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라고 표현합니다. 그렇다면 왜 그리스도는 비밀이 되었을까요? 아마 그리스도를 통해 인류의 구원이 도무지 인간의 힘으로는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위한 메시아만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새 민족, 새 나라, 새 공동체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운 시대를 도래하게 하심으로 이전의 것들은 허무시고 새롭게 하셨습니다. 이제는 십자가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한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구속 경륜을 통해 유대인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곧 죄사함을 얻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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