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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은 원죄를 믿었는가?

샤마임 2018. 2. 4.

유대인은 원죄를 믿었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믿지 않았다. 유대인들은 성경, 즉 구약에(특히 모세오경) 원죄의 개념이 없다고 생각한다. 랍비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들은 개신교가 알고 있는 원죄의 개념을 거의 알고 있으나 일부러 반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렇게 믿는 것은 일종의 종교적 자유의 개념으로 받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원죄를 부인하는 가장 중요한 구절 중의 하나는 신명기 30:11-14까지의 말씀이다. 일단 읽어보자.

11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12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이 아니요

13 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도 아니라

14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가장 중요한 구절은 14절로, 하반부에 행할 수 있다는 말씀에 주목한다.

개신교 원죄의 역사

기독교에서 원죄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교리다. 어거스틴의 자유의 개념에서 시작된 원죄는 루터에 의해 노예의 의지와 도르트 신조에서 전적 타락으로 만든다. 어거스틴은 자유의지에서 타락하기 전에는 죄와 선을 동시에 선택할 수 있었다. 그러나 타락 이후는 죄만 선택할 자유가 있고, 거듭난 이후는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상태가 된 것이다. 영화의 상태가 되면 죄를 지을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개신교 안에 중요한 신학적 내용이다. 주요 저서로는 어거스틴의 <자유의지론>, 루터의 <노예 의지론>, 조나단 에드워즈의 <노예 의지>가 있다.

실제로 원죄 이론은 바울에게서 시작되었다. 바울 신학은 기존의 유대인들의 생각과 아주 달랐다. 야고보나 베드로전후서에는 잘 드러나지 않는 원죄 교리가 왜 바울 서신에 두드러지는 것일까? 여기서 초대교회의 정통이 기존의 사도들이 아닌 바울이라고 주장하는 현대 신학자들의 생각을 들어보아야 한다. 벨하우젠이나 슈바이처, 하르낙 등의 이야기는 현대 교회가 주창하는 정통 교회는 사도들로부터 이탈하여 바울을 추종하는 새로운 기독교가 만든 것이라고 주장한다.


원죄의 중요성

원죄 교리는 왜 중요할까? 바울이 왜 그렇게 원죄를 강조한 것일까? 가장 간단하게 말하면 십자가의 대속 이론 때문이다. 기독교는 예수님의 죽음이 대속의 죽음으로 이해한다. 바울은 이것을 분명히 한다. 예수를 믿기 전에는 허물과 죄로 죽은 상태다.(2:1)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대속의 사건으로 예수님의 피가 모든 인류의 죗값을 대신한다.

사도행전 20:28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로마서 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로마서 5: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이 외도 성경에는 수도 없이 많은 곳에서 예수의 피가 대속의 제물로 비유된다. 심지어 행 20:28에는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고 말한다. 이것은 파격적인 선언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이 되신 것이다. 그 어떤 선언보다 가장 명확한 선언이다. 이것을 이방인의 교회가 받았고, 지금의 정통 교회들이 가장 중요한 핵심 교리로 받은 것이다.

원죄는 어디서 시작했는가? 알다시피 아담과 하와의 타락이 원죄다. 원죄로 인해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된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손상을 입는데, 치명적인 손상이기 때문에 복구가 불가능하며, 자력으로 구원 얻을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다. 오히려 죄의 노예가 되어 죄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운명적인 존재가 된다. 이것이 도르트 신조가 선택하여 공포한 전적 타락의 개념이다. 실제로 존 칼빈은 직접적으로 이 말을 사용한 적은 없다. 그러나 칼빈은 전적 타락의 개념을 수용하고 있음이 그의 주석과 기독교강요에 충분히 드러난다.

전적 타락의 개념의 중요한 이유는 예수님의 대속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단지 정치적인 죽음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뭔가가 필요하다. 그것이 첫 사람들의 원죄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원죄를 없애는, 씻는 작업이며 새 창조이다. 전혀의 새로운 존재의 출현인 것이다. 그래서 바울을 기독교의 창시자로 주장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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