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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계명 강해 01 서론

샤마임 2020. 1. 24.

[십계명 강해] 01 서론

기독교인이라면 반드시 알아야할 기본 교리를 함축하고 있는 것들이 있다. 첫 번째는 사도신경이고, 두 번째는 주기도문이다. 마지막으로 십계명이다. 사도신경과 주기도문, 그리고 십계명은 성경의 모든 교리를 표현하지는 않지만 가장 핵심적인 교리를 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은 신약적 영향 아래 있기 때문에 개신교회 안에서 자주 강해되고 해설한다. 십계명도 물론 자주 강해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십계명의 경우는 접근함에 있어서 주의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율법이란 부정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고, 유대적 배경 안에서 주어진 고대 문헌이기 때문에 자칫하면 옛 언약의 관점에서 해석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러한 부정적 관점을 제거하기 위해 다양한 관점에서 십계명을 해석하려는 시도들이 일어났다. 예를 들어 십계명을 사회적 관점에서 해석하거나, 율법의 핵심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들이다. 물론 그러한 관점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십계명은 어떻게 해석되어야 할까. 필자의 견해로는 신약적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새 언약 아래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을 적용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해석상의 주의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앞서 언급한 것처럼 십계명은 이스라엘이라는 민족들에게 주어진 것이며, 사회법의 성향이 강력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일부의 학자들은 십계명을 루터의 관점에서 과도하게 부정적으로만 평가하려한다. 이것은 매우 잘못된 방식이다. 왜냐하면 루터의 뒤를 이은 칼뱅의 경우는 십계명을 중요하게 다루었으며, 율법이 가진 긍정적 측면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칼뱅의 영향을 받은 이후의 종교개혁자들과 청교도들은 율법을 지나치게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우를 범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십계명이 갖는 긍정적 평가는 절하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칼뱅은 기독교강요에서 율법을 다루면서 도덕법의 관점으로 율법을 해석하면서 다섯 가지 주제를 발전시킨다. 첫째는 도덕법은 역사적으로 그리고 심리적으로 그것에 선행하는 자연법과의 관계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둘째는 그리스도는 율법의 목적이다. 셋째는 도덕법은 약속과 절망을 모두 포함한다. 넷째는 율법의 세가지 기능이 있는다. 하나는 율법은 불의를 드러낸다. 둘은 율법은 구원의 날이 이르기까지 악인들을 억누르고 중생하지 못한 자들을 제어한다. 셋은 율법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거룩한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가르친다. 다섯째, 율법은 더 이상 저주에 대한 위협을 통해 인간의 양심을 구속하는 힘을 갖고 있지 않다.

이러한 칼뱅의 율법에 대한 이해는 종교개혁자들의 생각과 많은 부분을 공유하고 있으며, 후대의 개혁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필자는 칼뱅의 율법에 대한 이해를 완전히 수용하지 않으며, 당시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바라본 율법 이해라고 생각한다. 특히 의식법과 도덕법의 구분은 현대 신학에서 이미 폐기된 것이며, 잘못된 성경 이해를 갖게 할 수도 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스탠리 하우어워스는 십계명을 강해하면서 십계명을 도덕법으로 보려는 시도에 의혹을 제기하며 ‘참되신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고서는 계명들, 곧 십계명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즉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하지 않고 십계명을 지키고 언급하는 것 자체가 오해인 것이다. 하우어워스는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킨 이유를 광야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하시기 위함’(출 3:18)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 십계명은 신약적 의미에서 본다면 구원 받은 백성들이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주어진 계명들인 셈이다.

김용규는 그의 책 『데칼로그』에서 십계명이 갖는 본질적인 속성인 ‘계약’을 언급하며, 십계명이 단지 인간이 따라야할 윤리로만 존재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인간과 맺으신 계약(언약)이라는 사실에 주목한다. 윤리가 철저히 인간의 편에서 지켜야할 것이라면, 계약은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들의 저변에는 ‘윤리’와 ‘계약’의 차이를 간과한 데서 비롯된 심각한 오류가 깔여 있습니다. 십계명을 포함한 신구약성서에 윤리적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계약에는 윤리에는 전혀 엇는 것, 즉 신이 부담하는 그 어떤 몫이 따로 있기 때문이지요. 다시 말해 계약에는 신이 인간에게 스스로 맹세한 약속이 들어있고, 그가 스스로 부단히 이 약속의 구현에 참여한다는 점에서, 계약은 윤리와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윤리는 어떤 법적 제제가 주어지지 않는다. 또한 잘 지켰다고 해서 보상이 주어지는 것 역시 아니다. 윤리는 인간이 마땅히 행해야할 도리일 뿐이다. 그에 비해 계약은 하나님의 약속이 있으며, 인간이 지켰을 때 그에 대한 보상이 주어진다. 이런 점에서 십계명은 도덕이나 윤리의 차원에 종속시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착상이다. 그렇다고 십계명을 그리스도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나 후견인 정도로만 인식하는 것도 심각한 오해를 낳는다. 비록 궁극적인 목적이 그렇다하더라도 십계명이 주어진 당시의 시대적인 맥락을 간과하는 것은 좋은 관점이 아니다. 그런 맥락에서 본다면 십계명을 ‘존재론적 해석’을 시도한 김용규의 시도는 신선하고 바르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비록 십계명이 ‘예배’와 ‘자유를 향한 존재론적 이해’가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아직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신약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에 과연 십계명이 어떤 의미인가를 살피는 것이다.

필자는 십계명을 신약 또는 새 언약을 전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된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해석하려고 한다. 비록 십계명이 아브라함의 언약이 완전히 성취되지 않는 과정 속에 있다고 하지만, 하나님은 십계명을 통해 이스라엘과 다시 언약하고 정체성을 부여한다. 다른 많은 율법을 해석함에 있어서 십계명은 해석의 원리가 되며, 전제이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라는 첫 번째 계명에 나머지 계명이 종속되어 있다. 1-4계명은 하나님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수직적 계명이며, 5-10은 타인과의 관계속 속에서 성취되어야할 수평적 계명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엄밀하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는 없으며, 모든 계명은 하나님만을 경배해야 한다는 제1계명에 종속된다.

[참고도서 목록]

필자가 참고한 도서는 아래와 같다.

-한국저자

김용규 『데칼로그』(서울: 포이에마, 2015)
김지찬 『데칼로그』(서울: 생명의말씀사, 2016)
강영안 강영안교수의 십계명 강의 (서울:IVP, 2017)
최갑종 『갈라디아서』(서울: 이레서원)
-번역서

케빈 드영 『십계명』 조계광 옮김,(서울: 생명의말씀사, 2019)
존 칼빈 『칼빈의 십계명 강해』 김광남 옮김, (서울: 비전북, 2011)
.................『기독교 강요』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제임스 패커 김진웅 옮김 (서울:아바서원, 2012)
스탠리 하우어워스, 윌리엄 윌리몬 십계명 강봉재 옮김 (서울:복있는사람, 2007)
마이클 호튼 『십계명의 렌즈를 통해 보는 삶의 목적과 의미』 윤석인 옮김 (서울:부흥과개혁사, 2005)

-논문

류연석 『그리스도인 성화의 지침으로서 십계명 이해 :윌리엄 에임스, 사무엘 러더포드, 토마스 왓슨의 십계명 이해를 중심으로』 백석대학교 기독교전문대학원, 2016
변정식 『십계명에 나타난 복음신학적 연구』 Institute of Evangelical Theology, 2001
김종길 『출애굽기에 나타난 복음과 율법』 호서대학교,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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