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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23편(Psalm 23)

샤마임 2011. 6. 24.

시편 23편(Psalm 23)

시편 23편은 다윗의 지은시로 성경의 어떤 구절보다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시편이다. 다윗에서 이곳에서 여호와를 자신의 목자, 보호자, 인도자, 상을 베푸시는 자로 고백한다. 다윗의 노년에 지었다고 생각하지만 최근의 학자들은 다윗이 적들에게 쫓겨 도망다닐 때 지은으로 본다. 

 1. 본문 읽기

①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②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 도다
③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도다
④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⑤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⑥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2. 시편 23편 주해 및 묵상


피터 크레이기는 본장을 출애굽과 연결시키기를 원한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한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가신다는 것이다.


6절은 2-5까지의 결론이요, 1절의 또다른 표현이며, 결론이다. 

2-5절은 여호와의 목자됨으로 인해 생겨나는 것들을 열거하고 있다. 즉 모든 것이 풍족하다는 의미다. 왜냐하면 여호와가 나의 목자가 되시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여호와를 얻으면 모든 것을 얻는 것이고, 여호와를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전부됨은 바로 여기서 찾아야 한다.
 
목자는 양을 어떻게 아는가? 그들을 알고 그들의 이름을 안다. 처음 접하는 사람은 양들이 모두 똑같이 생겼다. 그러나 양과 가까이 지내고 양을 자주 접하는 사람은 양의 얼굴이 다를 뿐 아니라 양의 성경과 습성까지 다르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러므로 그들을 분별하지 못해 당황해 하지 않는다. 그들의 이름을 알고 정확히 불러낸다.
 
그럼 양은 목자를 어떻게 아는가?
양은 시력이 현저히 좋지 않다. 그래서 5m앞을 보지 못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들을 어떻게 자신의 목자를 알아보고 따라갈수 있을까? 간단하다. 목자의 음성을 안다. 양은 청각이 발달되어 있고, 목자의 음성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낯선 사람이 와서 자신의 이름을 부른다고 해서 그를 따라가지 않는다. 오히려 도망가고 만다.

 

1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여호와는 '나의 목자'로 고백된다. 구약 성경에는 종종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목자와 양으로 은유된다.( 시 28:9, 사 40:11, 겔 34:15 등) 고대 근동에서는 종종 한 나라의 왕과 백성을 목자와 양으로 불렀다. 목축업을 하는 이들에게는 상싱적인 표현이었을 것이다. 다윗은 여호와를 목자로 소개하며, 자신의 갈망을 완전히 해소 시켜주는 분으로 고백한다. 목자가 양의 필요를 충족시키듯, 왕은 백성들의 필요를 해소 시켜줘야 한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다.

 

2-3절 채우시는 목자 여호와

2-3절은 네 개의 콜론으로 처리된다. 이것은 1절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2절에서는 양들이 먹는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목자가 인도한다. 독자들은 2절에서 목자로 인해 평화롭고 느긋하고 풍요로운 분위기를 읽을 것이다.

 

3절은 잠시 목자와 양의 은유를 이탈하여 영혼의 문제로 빠진다. 그러나 다시 목자와 양의 관계로 돌아간다. 하나님은 다윗을 '의의 길'로 인도한다. 길은 여정이고 삶의 방식이다. 의의 길은 생명의 길이다. 하나님은 생명의 길로 백성들을 인도한다. 목자가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듯.

 

4절 죽음의 골짜기

 

4절은 지금까지의 모든 고백을 전복시킨다. 하나님은 분명 '의의 길'로 인도하시지만 눈을 떠보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였다. 어둠(원어적으로 깊은 어둠). 원어는 '쨀 마베트'인데 뜻은 '사망의 그림자'이다. 너무 어두워 빛이 전혀 없다. 그런데 바로 이곳에서 새로운 하나님의 인도법이 등장한다. 그것은 지팡이와 막대기다.

 

지팡이와 막대기는 목자들이 사용하는 것으로 양을 지키기 위한 것이다. 지팡은 길고 구부러져 있어 양의 목을 지팡이 끝으로 잡아 당겨 일으켜 세운다. 양들은 종종 쓰러져 일어나지 못할 때가 있다. 막대기는 몽둥이로 이리나 늑대 등을 물리치기 위함이다.

 

5-6절 나의 주인 여호와

 

이제 다윗은 여호와를 목자에서 주인으로 부른다.  물론 주인은 목자이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상을 베푸신다. 즉 먹을 것을 풍족하게 주신다. 그런데 상은 원수들 바로 앞에 펼쳐진다. 이것은 원수들을 결박한 이후라는 것을 상상해 볼 수 있다. 김정우는 '보란 듯이'를 추가한다. 일종의 축하 파티 또는 잔치상인 것이다. 

 

여호와의 집은 성전이다. 그러나 성전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다. 그럼에도 왜 다윗은 여호와의 집에 산다고 말할까? 그것은 일종의 비유로, 성전은 여호와의 임재를 말한다. 선하심(토브)과 인자(헤세드)하심이 자신이 따를 것이라 확신한다. 토브는 일종의 완벽한 조화를 말한다. 창세기 1장에서 '보기 좋다'라는 단어가 '토브'이다. 헤세드는 이미 잘 알려진 것으로 하나님으로 사랑과 긍휼, 자비, 인애 등으로 번역된다. 


 
※여호와는 왜 나(우리)의 목자인가?

 

다윗은 여호와를 목자라고 고백합니다. 왜 여호와를 ‘나의 목자’라고 고백하는 걸까요? 여호와께서 모든 것을 채워 주시기 때문입니다. 목자는 양을 위하여, 푸른초장으로 인도하여 양들을 먹이고, 물가으로 인도하여 목을 축이게 합니다. 염소나 양들은 흐르는 냇가에서는 물을 잘 먹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주 조용히 흐르는 곳이나 고여있는 물을 마십니다.(양과 염소는 흐르는 물을 마시지 못한다) 목자는 이들의 연약함을 잘 알기에 아무 곳이나 인도하지 않습니다. 양들을 돌보기 위해서는 세심한 배려가 필요합니다. 양들은 약하기 때문입니다.
목자는 양들을 먹이고 나면 모든 책임을 다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목자에게는 또 다른 의무가 따르는데 그것은 들짐승으로부터 힘없는 양들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리와 늑대가 양을 잡아먹기 위해 시시탐탐 노리고 있기에 목자는 한시도 경계를 늦추지 못합니다.
 
다윗은 이것들을 너무 잘 알기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 옛날 자신이 아버지의 양들을 칠 때에 이 모든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이 삯군목자처럼 위험이 닥치면 도망가는 분이 아니라, 목숨을 걸고 양들을 지키는 참된 목자임을 분명히 보았습니다. 그의 과거의 삶이 이것을 증명합니다. 그렇기에 이후의 삶도 여호와께 맡기고 감사하 수 있습니다.
 
다윗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듯한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 때에 여호와는 지팡이와 막대기로 보호하셨고, 심지어는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풀어 주심을 몸소 체험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여호와는 ‘나의 목자’가 되십니까? 여호와가 ‘나의 목자’이시기에 늘 감사할수 있습니까? 바로 이것이 여러분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늠하는 시금석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선한 목자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인도하고 계십니까?

 

시편 23편

시편 23편은 집을 떠나 유리(流離)하는 다윗의 상황을 담고 있습니다. 시편은 포로 귀한 이후 완성된 성경입니다. 우리가 시편을 읽을 때는 항상 포로적 상황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다윗은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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