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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무엘상 1:1-11

샤마임 2010. 1. 2.

기도로 새 역사를 창조하라

본문 사무엘상 1:1-11

 

엘가나의 실로 순례
사무엘상 1:1 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에 에브라임 사람 엘가나라 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여로함의 아들이요 엘리후의 손자요 도후의 증손이요 숩의 현손이더라
사무엘상 1:2 그에게 두 아내가 있었으니 한 사람의 이름은 한나요 한 사람의 이름은 브닌나라 브닌나에게는 자식이 있고 한나에게는 자식이 없었더라
사무엘상 1:3 이 사람이 매년 자기 성읍에서 나와서 실로에 올라가서 만군의 여호와께 예배하며 제사를 드렸는데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여호와의 제사장으로 거기에 있었더라
사무엘상 1:4 엘가나가 제사를 드리는 날에는 제물의 분깃을 그의 아내 브닌나와 그의 모든 자녀에게 주고
사무엘상 1:5 한나에게는 갑절을 주니 이는 그를 사랑함이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니 사무엘상 1:6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므로 그의 적수인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분하게 하여 괴롭게 하더라
사무엘상 1:7 매년 한나가 여호와의 집에 올라갈 때마다 남편이 그같이 하매 브닌나가 그를 격분시키므로 그가 울고 먹지 아니하니
사무엘상 1:8 그의 남편 엘가나가 그에게 이르되 한나여 어찌하여 울며 어찌하여 먹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슬프냐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냐 하니라
한나와 엘리
사무엘상 1:9 그들이 실로에서 먹고 마신 후에 한나가 일어나니 그 때에 제사장 엘리는 여호와의 전 문설주 곁 의자에 앉아 있었더라
사무엘상 1:10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사무엘상 1:11 서원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서론

수많은 학자들과 정치가들과 철학자들과 거리를 오가는 보통사람들은 이야기합니다. 이 새대는 ‘어둠의 시대이다’라고 말입니다.

빛이 없는 시대, 희망이 없는 시대

어둠의 시대, 절망의 시대

이 시대가 바로 그런 시대라는 것입니다. 그 옛날 헬라의 철학자였던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시내를 한낮에 등부를 들고 다녔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소크라테스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왜 한 낮에 그렇게 등불을 가지고 다니십니까?”

“이 시대가 너무 어두워서 보이질 않아 너무 어두워”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을 우리는 자연철학이라고 부릅니다. 인간은 없고 오직 자연에 대한 이야기만을 가지고 토론하고 논쟁했습니다. 인간의 모든 근원은 자연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철학자는 우주의 가장 근본은 불이라고 주장하고, 어떤 철학자는 공기라고 주장하고, 어떤 철학자는 물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사회가 왜 이렇게 타락하고 부패하는지에 대한 관심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이 사회의 “모든 문제는 바로 인간 자신에게 있다”라고 선언하며 인간을 아는 것이 진정한 철학이라고 부르짖으며 인간 철학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한 주장은 아테네의 어느 신전의 돌비에 기록된 바로 이 문구를 인용함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네 자신을 알라”

 

현재 우리 가운데 일어나고 있는 수많은 외부적인 문제들을 넘어 신앙의 문제로 되돌아가더라도 낙심의 시기요, 퇴보의 시기요, 정체성의 부재가 횡횡하는 혼돈의 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수많은 교회들이

말씀의 능력을 의심하고 있습니다.

기도의 응답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불신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위기의 시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어느 교회를 가나 ‘성도수가 줄어들지 않으면 부흥된 것이라고 자위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많은 교회들이 마이너스 성장이라는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느 교회를 가나 영적 무력감과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낙심하고 있습니다. 천로역정에 나오는 크리스찬처럼 절망의 성에 갇혀 도무지 일어설 생각도 못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참으로 신실한 믿음의 사람에게서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목사님! 하나님은 정말 살아계시는 겁니까? 하나님께서 정말 살아계신다면 우리 교회가 이렇께 까지 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넉두리는 3000년도 더 지난 믿음의 용장이었던 기드온의 심정을 그대로 닮아 있습니다. 미디안에 의해 이스라엘이 철저하게 유린되고 있을 때, 적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포도주 틀 속에서 밀타작을 하고 있는 기드온에게 하나님의 사자가 찾아왔습니다. 하나님의 사자는 기드온에게 너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기드온은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 알지 못하고 넉두리를 늘어놓습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다면 어떻게 이스라엘이 이렇게 큰 어려움을 당할 수 있단 말입니까?”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어디 있단 말입니가?”

기드온의 넋두리는 이 시대의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에게서 자주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습니까?

여러분은 기도의 능력을 믿습니까?

여러분은 교회성장의 절대적 필요성을 믿습니까?

여러분은 부흥을 진심으로 갈망하고 있습니까?

 

본문 속으로

오늘 본문은 정확하게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출애굽 한 지 벌써 300 년이 더 지났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스라엘 그 어디에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온 팔레스틴을 다 뒤져도 홍해를 가르고, 하늘을 열어 만나를 내리며, 요단을 갈랐던 하나님의 역사와 기적은 들을 수가 없습니다.

어둠의 시기요, 절망의 시기요, 불신앙의 시대입니다.

아무도 여호와 하나님을 찾지 않는 절체절명의 위기입니다.

예배는 습관적이며,

기도는 한탄의 중얼거림이며,

찬양은 능력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무서운 것은 어느 누구도 여호와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정말 무서운 것은 더 이상 아무도 여호와 하나님을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이후(以後) 이스라엘은 철저하게 하나님을 소외(疏外) 시켰습니다. 사사기 기자는 “그들이 각자 자기 옳은 소견대로 행했다”라고 사사시대의 사람들을 평가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에게 왕이 없었기”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물어봅시다. 과연 그들에게 왕이 없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왕은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탁월하고 존귀하고 위대하고 긍휼(矜恤)하신 왕이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삼상 8장에 가면 이스라엘 장로들이 사무엘에게 와서 우리에게도 이방인과 같은 왕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바로 이때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삼상 8: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누가 이스라엘의 왕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왕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왕을 버린 것입니다.

사사시대의 사람들은 왕을 의도적으로 버렸습니다.

사사시대의 사람들은 진정한 왕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추방시켜버렸습니다.

 

한나는 바로 이러한 왕의 부재(不在)의 시대,

여호와 하나님이 떠난 시대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온갖 인간적 권모(權謀)와 술수(術數)가 난무한 어둠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는 하나님은 추방한 인간들의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것입니다. 역사의 주인은 지혜자도 아니요, 권력자도 아니요, 부자도 아닙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삼상 2장의 한나의 찬양은 이러한 역사의 주관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한나는 자식을 낳지 못했습니다. 불행한 여자입니다.

그는 분명 믿음의 여성입니다. 기도의 용사였습니다. 그러나 불행한 여자였습니다.

놀라운 역설이요,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믿음의 사람이요, 기도의 용사가 불행하다니요. 이건 말이 안 되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현실 속에 실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 이상한 것은 이 불행이 우연이 아니라 1:5,6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있는 하나는 자녀가 없고,

믿음이 없는 브닌나는 자녀가 많고,

자녀들은 눈에 보이지만,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브닌나는 눈에 보이지만, 여호와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한나의 고통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시대의 수많은 신실한 성도들의 고통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분명 하나님은 살아계시지만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역사하심은 찾을 수 없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향하여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고 질문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안티 크리스천들이 기독교를 개독교라고 조롱하고 있습니다.

절망의 시기요, 위기의 시대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고독한 믿음의 사람들의 고뇌는 이미 수천 년 전에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 시 42:3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시편 73편에도 시편 기자는 악인들이 형통함을 보고 거의 넘어질뻔했고, 미끄러질뻔했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부재의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증명해 내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을 보이는 실체로 드러내야 합니다.

이것이야 말로 mission impassable입니다. 미션 임파서블

한나의 임무는 미션 임파서블입니다. 실행 불가능한 것을 수행하는 사명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자칫 한나를 단순한 기도의 용사로 한정시키고 있는지 모릅니다. 강력한 기도로 아들을 받은 기도의 용장이다라고요, 물론 맞습니다. 하나님은 기도의 용장입니다. 그러나 그 이상입니다. 한나의 기도는 그러한 단순한 기도에 머물고 있지 않습니다. 이 시대와 역사를 꿰뚫는 영적인 통찰력을 가지고 기도하는 위대한 기도자였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 ..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다시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우리는 한나가 사용하는 단어가 비범한 단어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단어들이 출애굽기 1장에서 이미 사용되었다는 것일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나는 이 어둠의 시대를 온 가슴으로 끌어안고 그 옛날 출애굽의 역사가 다시 한번 재현되기를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애굽의 압제 속에서 고통받으며 토로했던 신음소리는 한나의 한 맺힌 기도에 통하고 있습니다. 불신앙 속에서의 축복받은 브닌나는 정확하게 나일강의 축복을 손에 쥐고 있는 애굽의 바로와 클로즈업되고 있습니다.

브닌나는 한나를 향하여

  • “네가 그렇게 믿음이 좋다면 너의 믿음을 네게 보여라, 자 자식을 낳아보라 그러면 네가 믿음이 좋다는 것을 믿겠다”

바로가 모세에게 말합니다.

  • “내가 신인데 나 외에 다른 신이 어디 있단 말이냐? 네가 풍요로운 애굽을 건설했고, 이곳을 낙원으로 만들었느니라, 너의 신을 네게 보이라”

 

창조 이후 지금까지 가장 위대하고 강력한 신은 다름 아닌 물질만능이라는 신이었습니다. 물질은 하나님의 피조물의 한계를 훨씬 뛰어넘어 타락한 죄인들에게서 신으로 굴림했습니다. 보이는 신, 만져지는 신, 권력과 건강과 지식과 물질의 신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외쳤습니다. NO! 아니다.

그러나 한나는 외쳤습니다. NO! 아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살아계시며 지금 여기에서도 역사하신다. 하나님은 오늘도 여전히 창조하시며, 새롭게 하시며, 능력을 베푸신다.

 

한나의 기도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창조적 기도였습니다.

한나의 기도는 하나님의 부재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선포하는 능력의 기도였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할 때,

하나님은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했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을 버리고 물질을 선택할 때,

한나는 하나님은 선택하고 물질은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한나를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그녀에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그녀에게 새 창조의 사역을 행하셨습니다.

닫혔던 태가 열렸고, 죽었던 몸이 되살아 났으며, 없던 자녀들이 태어났습니다.

살고 있지만 죽어있던 사람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못했던 사람

기억하지만 망각되었던 바로 그 한나에게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자신의 모든 것이요, 약속의 자녀였던 이삭에게 칼을 들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러한 아브라함의 신앙에 대하여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로마서 4:17-22

  • 4:17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 4: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 4:19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 4: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 4: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 4:22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여호와 하나님은 아무것도 아닌 한 여인을 통해

없는 것과 다름없는 한나를 통해

잠자는 이스라엘을 깨웠으며, 절망하고 있던 수많은 신앙의 사람들을 일으켰습니다.

한나라는 불임의 여자를 통해서 절망과 위기의 시대를 마감하고, 장엄한 부흥의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찬양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합니다.

오늘도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한나처럼 하나님을 믿고 전적으로 그를 의지하는 이들의 기도를 통해 새 역사를 창조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새역사를 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새로운 부흥의 시대를 열어야 하지 않을까요?

하나님은 오늘도 한나처럼 믿음으로 기도하는 창조적 기도자를 찾고 계십니다.

여러분들은 그 주인공이 되어 보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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