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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주간묵상] 4월 6일(월) 마태복음 21:12-17 시장에서 병원으로

샤마임 2020. 4. 5.


4월 6일(월)


마 21:12-17

시장에서 병원으로

 

 


[본문 읽기]


12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13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14 맹인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주시니
15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 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어린이들을 보고 노하여
16 예수께 말하되 그들이 하는 말을 듣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
17 그들을 떠나 성 밖으로 베다니에 가서 거기서 유하시니라


[말씀 묵상]


성전에 들어가신 예수님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셨습니다. 성전은 예루살렘에서도 가장 종교적이며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극명하게 드러내주는 곳입니다. 가장 거룩해야하고, 가장 거룩해야 할 곳입니다. 그런데 성전은 원래 성전이 감당해야할 기능을 상실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곳에는 매매하고, 돈을 바꾸고, 비둘기를 팔고 있습니다. 그들이 매매하는 것이 부당한 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합니다. 문제는 그곳이 ‘성전 안’(12절)이라는 것입니다. 주객이 전도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을 위한다는 말로 다양한 행사를 치르고, 여러 관습과 순서들을 추가합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이러한 행사 때문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방해되고, 예배를 소홀히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흠 없는 제물을 드리기 위해 제물들을 매매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멀리 감람산에 있는 가축시장까지 갈 필요가 없습니다. 성전세를 내기 위해 성전 세겔로 환전하는 일도 ‘성전 안에서’ 할 수 있습니다. 편리하기 때문에, 완벽한 제사를 드릴 수 있기 때문에, 그 일들은 옹호되었고, 합리적일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분주해졌고, 하나님을 예배하기보다 제물을 흥정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성전에 가득차기 시작했습니다. 가축들의 똥이 성전에 쌓였고, 비둘기의 소리와 털들이 성전에 날아다녔습니다. 그러나 괜찮았습니다. 비록 그런 일이 있더라도 하나님께 완전한 제사를 드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새 가장 거룩하고 순결해야할 성전은 상행위로 가득차고, 가축들의 오물로 악취가 나고 있습니다.

 



기도하는 집이 강도의 소굴로

성전은 기도하는 곳입니다. 즉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이 성전입니다. 성전이 존재 이유와 기능, 그리고 마땅해 성전에서 해야 할 일이 그 일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에 기도하러 가면서 앉은뱅이를 주님의 이름으로 고쳤습니다.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만나는 경건한 장소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거룩해야할 성전이 ‘강도의 소굴’이 되었다고 선언하십니다. ‘강도(λῃστής)’라는 단어는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강도와 동일하며, 누가복음에서는 ‘강도(λῃστής)’만난 사람(눅10:36)을 소개할 때 사용됩니다. 그들은 살인자들이며, 악당들이며, 타인의 물건을 탈취하는 강도들입니다. 

주님께서 ‘강도의 소굴’이란 표현은 삶의 우선순위가 바뀐 사람들을 두고 한 말이 아닐까요? 하나님께 돌려야할 영광을 다른 곳에 돌리고, 하나님께 집중해야할 시간과 마음을 다른 것들에 집중할 때, 우리는 주님의 것을 탈취하는 강도가 됩니다. 성전이 성전으로서의 기능이 상실할 때 성전은 존재할 필요성이 사라지게 됩니다. 성전은 ‘기도하는 곳’이라고 선언하십니다. 다시 본질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만든 편리성과 합리성, 그리고 효율성이란 갖가지 변명으로 뒤죽박죽이 된 성전을 정화해야 합니다. 최고의 예배를 드린다는 이유로 성전을 매매하는 시장을 만든 오류를 교정해야 합니다. 

장터에서 병원으로

그때 맹인과 저는 자들이 주님을 찾아옵니다.(14절) 주님은 그들은 고쳐주십니다. 마태는 성전 안이라고 하지만 흠 있는 자들은 성전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아마도 이방인의 뜰이었을 것입니다. 아니면 들어오지 못할 사람들이 들어왔을 수도 있습니다. 이유는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주님께서 그들을 고쳐 주셨다는 것입니다. 성전에 들어올 자격이 없는 자들이었지만 주님은 그들을 쫓아내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자신에게 나아오는 자들을 아무도 내어쫒지 않습니다. 두 손 들고 주님께 간구하는 자들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그 넓은 품으로 안아 주시고 사랑해 주십니다.

 마태복음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주님은 그들을 흠이 있다하여 내어쫒지 않았지만 내버려 두지도 않으십니다. 그들의 모든 질병과 장애를 고쳐주십니다. 처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그대로의 흠 없는 상태로 회복하십니다. 16-17절을 보십시오. 어린아이들이 주님을 높이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분노했습니다. 그때 주님은 시편 8편 2절 말씀을 인용하여 하나님의 의도를 드러내십니다. 어린아이라고 무시하지만 하나님은 순수한 마음으로 기대하며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들의 고백을 사용하여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마무리

우리는 왜 교회를 다닙니까? 기도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다시 본질로 돌아가야 합니다. 성전은 기도하는 곳입니다. 난해하고 복잡한 의례가 아닌 순수하고 진실한 고백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드러납니다. 우리의 신앙상태를 돌아봅시다. 주님을 위해 죽기까지 하겠다는 결심도 사라지고,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열정도 사라진 체, 세속의 방식과 욕망을 따라 영적 퇴보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고난 주간입니다. 다시 주님께서 왜 그 고난의 길을 걸으셔야 했는지 묵상하며, 우리도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갑시다.


결단과 기도
* 주님의 삶의 우선순위가 주님이게 하소서.
* 오늘도 주님께 나아갑니다. 저의 마음의 병과 육신의 질병, 사업의 장애와 관계의 부정함을 온전히 회복하여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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