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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기] 박완서와 문우당

샤마임 2018. 1. 27.

[독서일기] 박완서와 문우당 

2018년 1월 27일 토


중고로 산 책이다. 언제 샀는지 도무지 기억이 없다. 예전엔 책을 사면 내 사인과 함께 구입처 시간 등을 적어 놓는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하지 않는다. 구입하는 책이 너무 많기도 하거니와 그냥 하기 싫어졌다. 그래서일까 요즘에는 동일한 책을 가끔 두 번 구입하는 실수를 한다. 원래 기억력이 안 좋지만 메모까지 하지 않으니 더 기억을 못하는 게 틀림없다. 이 책도 구입한지 일 년은 넘은 것 같은 기억이 없다. 워낙 박완서 작가를 좋아해 보이는 족족 사놓고 본다. 박완서 작가의 책들은 세계사와 문학동네에서 나온다. 예전 책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가격이 싼 헌책을 구입하는 바람에 내가 소장한 책들의 대부분이 출판사가 거의 다르다. 이 책은 나남출판사의 것으로 1985년 2월 25일 발행되었고 95년에 19쇄 본이다. 그 당시의 책들은 다 그랬다. 일단 표지가 유치하다. 90년대 초반까지 출판사들은 표지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리고 글자가 작고 행간이 좁아 여간 읽기 힘든 것이 아니다. 그러나 당시는 가독성보다는 내용에 치중했고, 글자를 작게 좁게 해도 그리 불평하지 않았다. 이런 헌책의 묘미는 몇 가지가 있다. 하나는 이전 주인의 흔적이고, 다른 하나는 저자의 도장이다. 지금도 가끔 그런 사람이 있다지만 예전에는 책이 출간되면 항상 저자의 도장이 필요했다. 작은 종이에 저자의 도장을 일일 찍어 책을 내 보냈다. 지금이야 출간 부수가 많지 않았지만 80년대까지만 해도 일쇄가 적어도 2천에서 많게는 5천까지 찍었다고 한다. 지금은 천권 팔아도 다행히 되고 말았지만 말이다. 이 책에도 박완서 작가의 도장이 있다. 이 도장은 박완서 작가 자신이 찍었을까? 아니면 도장만 빌려와 출판사 직원이 찍었을까? 가끔 가족들이 같이 가서 같이 도장 찍는 일에 참여? 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들뜬 마음으로.. 도장 하나하나가 돈이 아니던가.  



누군가는 책을 읽을 때 누군가의 낙서나 밑줄에 신경이 쓰여 책을 읽지 않는다. 나는 즐기는 편이다. 이전 주인이 어떻게 책을 읽었고, 어디에 마음의 방점을 찍었는지 밑줄이나 메모를 보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의 밑줄을 더하고 메모도 더한다. 아마도 다음 주인이 있을는지 모르지만 나에게서 떠난 책은 고고학 발굴 작업을 하듯 일차 주인과 이차 주인을 구분해 낼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은 너무나 깨끗하다. 책을 읽은 느낌이 없다. 아마도 사고서 단 한 번도 읽지 않은 것 같다. 심지어 표지를 보면 한쪽이 빛에 바랬다. 책꽂이 그대로 꽂아 둔 지가 오래어서 빛을 받은 부분만 퇴색한 것이다.  

기억을 아무리 뒤져도 떠오르지 않는다. 책을 이곳저곳 살피니 문우당 도장이 찍혀 있다. 지도센터라는 단어를 보니 아마도 문우당이 망하기 적에 찍은 것 같다. 그러니까 문우당 본점이 문을 닫고 건너편으로 이사 갔을 때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그때가 아마도 2천 년 초기가 아니었던가. 그리고 완전히 폐점하고 몇 년 전에 다시 문을 열었다. 90년대 중반 다시 부산으로 돌아왔을 때 남포동은 곧 문우당이었다. 서면은 젊은이들의 거리였고, 남포동은 관광객과 외국인, 그리고 약간 나이든 사람들의 활동 무대였다. 그리고 사람들은 문우당 앞에서 만났다. 그냥 '문우당 앞'이라고 하면 된다. 이제 그것도 추억이 되었고 유물처럼 퇴색되었다. 지금의 문우당은 그때의 문우당과 너무나 다르다.  

헌책의 매력 중의 하나는 책 뒤편에 실린 다른 책들에 대한 광고다. 당시 책 광고는 대체로 신문이었다. TV에서 책 광고를 한 적이 있었던가? 기억이 없다. 그러나 신문에서는 많이 봤다. 또 하나는 자신의 출판사 안에 다른 책을 광고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자연스럽게 돈들이지 않고 광고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에 비하면 외국 작가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대부분이 국내 작가다. 책 출간이 지금이 훨씬 쉽다고는 하지만 생각해보니 그것도 아닌 것 같다. 지금은 자비출판이란 것이 생겨서 그런 것이지 훨씬 장벽이 높다. 당시는 자비 출판이란 개념이 거의 없었다.  

책을 다 읽을 시간이 없어서 제목으로 삼은 곳을 골라 읽었다. 그 가을의 사흘 동안 일어난 일을 적은 것이다. 육이오 전란 속에서 서울이 수복되자 올라가 변두리 쪽에 산부인과를 개업하고 아이들을 '적출'하는 불법 의료 행위를 일삼은 여주인공,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 이렇게 말씀하신다.  

"의술은 인술이라 했거늘. 어질게 써야 하느니라" 

그러나 그녀는 의술로 돈을 벌고 결혼도 하지 않는다. 세월이 흘러 도시는 변한다. 이제 그곳도 허물어진다. 그런 그녀에게 이상하게 아이를 받아 보고 싶다는 욕망이 생긴다. 사실 이 병원의 첫 손님도 건물 주인의 딸이었다. 전란 속에서 누군가의 아이인들도 모르지만 임심해 돌아온 딸을 아무도 모르게 그녀가 받는다. 마지막 손님은 스무 살의 아가씨. 아니 학생이었다. 누군가의 아이인지도 모른다. 그녀의 아이를 떼 내려 하지만 거의 만삭이 된 아이는 엄마의 배에서 나오고 죽지 않는다. 방치하면 죽어야 하는데 죽지 않는다. 그리고 그녀는 그 아이를 살리기 위해 큰 병원으로 미친 여자처럼 달려간다. 도착했을 때 그 아이는 이미 죽어있었다. 그리고 그 병원은 헐리고 아버지가 앉았던 그 의자, 도무지 어울리지 않고 사진을 찍기 위해 이전 사진관이 가지고 있던 그 의자는 자신의 집으로 가지고 들어온다.


그 의자는 문우당처럼 회상의 매개이고, 문우당처럼 어색하다. 내 기억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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