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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원 『십일조가 알고 싶다』에 대한 비평적 사담

샤마임 2020. 4. 29.

 

 

   
저자 : 윤상원  | 출판사 : 넥서스CROSS
판매가 : 7,800원7,020원 (10.0%, 780↓)
구약시대의 십일조를 신약시대 그리스도인도 드려야 하는가?십일조는 축복의 통로인가 다른 복음인가?십일조를 드리는 것도, 드리지 않는 것도왠지 찜찜한 그리스도인을 위한 책!이 책 『십일조가 알고 싶다』는 “구약시대의 십일조를 신약시대 그리스도인도 드려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답을 찾아가는 책이다. 모세율법의 십일조를 성경신학적으로 파악한 뒤 ‘신약교회의 헌금과는 어떠한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있는지’를 논하고 있다. 온전한 십일조(?)를 축복의 통로로 주장하는 ‘십일조 엄수주의’를 비판하나 십일조는 다른 복음이라는 ‘십일조 폐지론’과도 다른 주장이다. 저자는 신약교회의 십일조 헌금을 존중하는데, 그…[더보기▶]

 

 

윤상원 『십일조가 알고 싶다』에 대한 비평적 사담

 

학문적 논의를 하고자 함은 아니지만 이 책에 대한 몇 가지 부분을 지적하려고 합니다. 지적이나 비평이라는 말은 적의가 아닌 중의적 의미임을 먼저 말씀드립니다. 

 

이 책은 2017년 10월에 출간된 책입니다. 지금이 2020년 4월 29일이니 참으로 많은 시간이 지난 듯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십일조 논쟁'은 교회 안의 뜨거운 화제입니다. 제가 보기에 십일조가 화두인 이유는 저자가 말하는 십일조 엄숙주의자들로 인해 반감 또는 비성경적 근거에 의한 우격다짐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십일조 논쟁은 논쟁이 되어서는 안 되는 어쩌면 그리스도인으로서 부끄러운 수치입니다. 십일조 논쟁은 마치 부모의 재산을 뜯어 가려는 자식들의 엇나간 탐욕가 비슷합니다. 왜냐하면 십일조를 비롯하여 신앙의 모든 것은 자신의 자의적 선택과 헌신의 몫이지 누군가의 강제될 부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교회가 십일조를 강조해도 안 내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내지 말라고 해도 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십일조가 신앙과 직결되는 되는 것도 아니니 논쟁이 자체가 무의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십일조는 논쟁이 되었고, 현재도 여전해 논쟁중입니다. 비록 이전에 비해 많이 사그러 들기를 했지만 말입니다.

 

필자의 개인적 기억에 의하면 십일조 논쟁은 이 책이 나올 때가 아니라 90년대 후반에서 2010년 정도까지 적지 않은 사람들의 화제였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십일조 폐지를 주장하며 교회를 비판하는 것에 몰입되어 그것이 마치 성경적인 것이냥 떠들어 댔습니다. 제가 그들을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전제와 목적 자체가 순수한 성경적 토의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이델올로기를 변증하려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저의 개인적인 결론부터 말하자면 십일조는 폐지 되지 않았으며, 또한 십일조를 내야할 이유도 근거도 없습니다. 말에 어패가 있다고 생각하지 모르지만, 성경적 근거를 찾아 보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구약에서 근거를 찾는데 그건 매우 잘못되고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십일조 자체가 구약적이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구약에서 '근거'를 찾으려 하지만 구약은 정신을 이해하는 전제는 될 수 있는 주장의 근거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안식일도, 희년도 지켜야 합니다. 돼지고기는 어떻습니까? 이러한 논쟁은 사도행전 15장에서 이미 끝났고, 무의미한 것으로 초대교회가 결정한 사안입니다. 그럼에도 십일조를 위해 구약적 근거를 가지고 온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것입니다. 다만 구약은 십일조의 정신을 일깨울 때 충분히 살펴볼 필요가 있을 뿐입니다. 

 

제가 이 책을 읽기전 가장 먼저 생각한 것은 '교회사적 측면에서 살펴 보았는가'였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은 근거가 될 수 없고, 신약은 십일조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십일조가 언제, 어떻게 한국교회 앞에 깊숙이 뿌리를 내렸는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역시 없었습니다. 정말 중요하고, 가장 중요한 부분인 교회사 속에서 십일조는 없었습니다. 바로 이 책이 전반적으로 훌륭하고 매우 좋은 책임에도 불구하고 반쪽짜리도 되지 못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윤상원 목사님을 비평하려는 의도는 아닙니다. 다만 가장 중요한 핵심은 없는 책을 출간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책의 전반적인 주장과 논제에 100% 동의합니다. 저와 동일한 결론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윤상원 목사님의 주장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이 책이 말하고 싶어하는 '십일조'의 핵심을 빗나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책은 평가절하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면 저와 생각이 너무나 똑같이 이렇게 생각하는 분도 있구나 싶어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아쉬움이 너무나 너무나 컷던 책입니다. 책을 쓰려고 자료는 준비해 놓고 이제 책을 써야하지 했는데... 끊긴 것입니다. 목회 때문에 바쁜지는 알겠지만 십일조에 대한 완성도를 높이려면 교회사 속의 십일조 문제를 집필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 책은 아마 두고두고 미완성의 책이요, 비평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쟁점1. 신약교회에서 헌금은 구약의 십일조의 연속인가?

저자는 구약의 십일조와 구약의 헌금의 본질이 동일하다고 봅니다.(136쪽) 저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동의하지만 핵심을 놓친 것은 분명한다. 개인적인 소견일 수 있으나 '신약 시대에도 헌금(연보)가 있었는가?'입니다. 물론 바울은 연보에 대해 언급합니다. 하지만 바울이 언급한 연보는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지 지금의 하나님께 바친다는 의미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십일조가 신약의 헌금과 '본질이 동일하다'라고 말하기는 힘듭니다. 저자는 분명하게 '십일조의 본질은 계속해 남아 있'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율법의 시행적 차이 때문에 새 언약의 시대에 '제도로서의 십일조'는 폐기되었지만, 주님께 나의 전적 헌신을 고백하는 '십일조의 본질'은 계속해 남아 있습니다."(136쪽)

 

저자가 말하는 '새 언약 시대에는 십일조를 드리는 규례가 새 백성의 마음에 새겨져 있어서 그 마음을 따라서 자발적으로 자원해 드리도록 변경했다'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구약의 십일조의 연속선상에 놓는 것은 치명적인 오류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십일조의 정신은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므로 십의 일조를 드림으로 나머지 9도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하는 것이라 말합니다.(147쪽) 저자는 이것을 '본질의 불변'(137쪽)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구약의 십일조가 과연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고백하는 행위일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자는 6장에서 신약교회가 구약의 절기를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신약교회가 자유의 권한을 행사해 결정한 것’(103쪽)이라고 말합니다. 이 또한 심각한 오류를 낳은 서술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저자는 ‘자유’라는 표현을 통해서 비록 신약의 헌금의 구약과 닮았지만 ‘같은 것으로 여길 수 없’(103쪽)다고 못 박습니다.

 

그러니까 저자는 본질은 통하지만 구약과 신약의 헌금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드려야 한다고 말하는 모순을 범하고 있습니다. 구약에는 율법에 정했지만 신약에서는 마음에 새겨져 있으며(137쪽), 율법이 아닌 ‘원리에 의해서’(138쪽) 결정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즉 이유야 어떻든 ‘드려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논리입니다. 이러한 저자의 주장은 모순일까요? 핵심은 이것입니다. 신약은 구약의 십일조가 폐지되었다는 점에서 동의합니다. 또한 드리고 말고의 문제는 ‘자유’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드리고 말고를 ‘결정’한다는 저자의 주장이 틀렸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유의 문제가 아니고 소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약교회는 십일조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해야 옳습니다.

 

쟁점2. 신약의 교회는 헌금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쟁점1의 답은 쟁점2에서 답하는 것이 옳습니다. 바로 이 부분에서 저는 저자의 주장에 대해 높은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하지만 아직 저자는 새언약의 의미는 명확하게 파악하지는 않는 듯합니다. 저가 보기에 이 책은 매우 실용적이며 목회적입니다. 하지만 학문적 성향은 다소 부족한 부분이 없지 않습니다. 십일조에 몰입하다보니 전반적인 흐름에서 구약과 신약이 신학적 구분이 다소 모호해진 느낌입니다. 즉 십일조가 폐지되었음에도 ‘하나님을 섬기는 예법’(155쪽)으로 십일조를 본다는 것은 약간 억지스럽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제가 보기에 구약의 십일조는 신약의 헌금의 개념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신약교회는 헌금을 드리지 않아도 될까요? 이제 이 부분에 대해 잠깐 생각해 봅시다.

 

거두절미하고 핵심부터 이야기하면 신약에서는 십일조나 헌금의 개념이 없습니다. 그럼 무엇이 있을까요? 

 

먼저, 신약은 헌금에 대해 일절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다만 바울이 고린도교회에게 예루살렘 보낼 구제에 관한 연보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 부분은 사실 많은 논쟁이 있습니다. 이것은 현대교회가 갖는 헌금의 개념과 어떻게 구분해야 할지에 관해서 말입니다. 

 

둘째, 사도행전에 나타난 헌금은 일반적인 헌금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4:32-37을 보실까요?

 

32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33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34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35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36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37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어떻습니까? 이 부분을 현대교회가 헌금의 개념으로 받을 수 있을까요? 불가능합니다. 또한 이후로 이런 식으로 자신의 전 재산을 하나님 앞에 드렸다는 이야기는 사도행전 이후에 초대교회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또한 강제한 것도 아니며, 드리지 않아도 무방합니다. 즉 초대교회는 헌금을 드리라고 한 적이 없으며, 사도들 또한 그것은 법이나 규칙으로 규정하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바울이 마케도니아교회들에게서 받은 헌금은 구제의 차원에서 강권(强勸)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의 강권은 강권이지 교회의 규칙이 아닙니다. 그 외에 그 어떤 곳에서도 헌금에 관련된 부분은 언급되지 않습니다. 

 

신약 교회의 헌금의 난제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지 않는 헌금을 어떻게 교회에서 정해야 하는가 입니다. 이 부분은 불가피하게 성경 이후의 초대교회를 살펴 볼 수밖에 없습니다. 즉 교부들의 문헌을 살피지 않으면 신약교회의 헌금의 문제는 해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이전에 신약 성경 안에서 헌금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저자는 이 부분을 6장에서 다룹니다. 저자는 ‘성취’와 ‘대치’의 개념에서 신약의 헌금을 설명합니다. 이것은 분명하고 명확하며 정확한 평가이며 해석입니다. 구약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폐기 된 것입니다. 더 이상 구약의 제사를 드리지 않는 것처럼 십일조 역시 강제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대치는 뭘 말하는 걸까요? 저자는 ‘성취 후의 일’(118쪽)로 보며, 이것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는 것’(119쪽)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새 부대에 담는 것은 뭘 말하는 걸까요? 그것은 ‘새 언약의 방식’(119쪽)입니다. 저자는 서철원 교수의 말을 인용합니다.

 

“십일조 헌금을 전교인에게 의무화해 내도록 하되, 강권하는 것을 없애는 것이 바르다. 헌금은 무슨 종목이든 자발적인 바침이어야 하고, 구약교회에서처럼 율법적 강요가 되면 안 된다. ...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가져다주는 자유를 아무도 제약하거나 빼앗을 권리가 없다.”(119쪽)

 

아마도 저자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자발적 바침’에 있는 것 같습니다. 또한 구약의 십일조를 세 가지로 분류한 다음 세 번째 ‘자선의 십일조는 폐지될 예표가 없다는 사실’(114쪽)에 초점을 두고 신약의 헌금이 그러해야한다고 말합니다.(115쪽) 바로 이 부분에서 저자는 심각한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선의 십일조는 성취 또는 대치되지 않았기 때문에 내야 한다는 의미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6장의 결론에서는 ‘신약교회의 십일조 헌금을 새 언약의 방식을 따라서 서행해야’(119쪽) 한다고 말합니다. 사실 저자가 ‘새 언약의 방식’에 대해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호합니다. 그 다음에 진행되는 논리는 이상하기까지 합니다. 십일조 이야기를 하다 갑자기 삶으로 드려지는 예물을 말합니다.(121쪽) 저자는 ‘이러한 차원에서 파악되고 해결되어야’(123쪽) 한다고 말합니다. 만약 저자의 문자적 주장에 근거한다면 신약의 십일조는 거룩한 삶으로 대치될 수 있습니다. 즉 문자적인 십일조 헌금은 내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논지 전개는 실제적 헌금의 이야기에서 너무 멀리 가는 것입니다.

 

신약의 헌금은?

그렇다면 신약의 헌금은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갖는 것일까요? 일단 신약이라고 말을 할때는 유대인들만을 범주에 넣어서는 안 됩니다. 헬라인이나 다른 이방인들도 포함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십일조라는 개념은 전혀 없습니다. 성취나 대치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구약은 신약과 아무런 연결 고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율법에 대해 죽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그 어떤 율법도 지키지 않았습니다. 다만 양심과 성경적 원리에 의한 도덕적 삶을 살았을 뿐입니다. 이 부분은 좀더 근거를 제시해야하지만 분명합니다.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의 입장에서 십일조를 생각한다면 지금의 이런 식의 논의나 논쟁은 전혀 뜻밖의 것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약의 의미는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신약에서 십일조 논쟁을 하는 것은 분명 성경적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십일조 논쟁을 이어가야 하는 이유는 그 무의미함을 깨달아야하기 때문입니다.

 

결론

 

결론이란 용어가 너무 거창하게 들립니다. 지금까지 저는 아무런 답도 없는 무의미한 비평만을 고집한 듯 합니다. 이제 결론을 내릴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새언약의 백성들은 이미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며, 그리스도에게 숨겨진 자들입니다.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은 십일조(십분의 일)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전부를 드려야 합니다. 십일조 논쟁은 마치 아버님 생신날 선물을 들고 가야 말아야 하느냐를 논쟁하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십일조 논쟁이 잘못됐다는 말이 아닙니다. 얼마든지 해도 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 하나가 빠져 있습니다. 십일조는 있으나 십일조를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없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통해 하나님은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걸까요?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율법은 완성하시고 폐기하셨습니다. 십일조를 드리고 안 드리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새 언약의 백성들은 이미 하나님께 바쳐진 존재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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