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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23편 묵상] 3. 지도하시는 여호와

샤마임 2018. 3. 29.

[시편 23편 묵상] 3. 지도하시는 여호와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부흥케하시는 여호와


여호와는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십니다. ‘소생시키다는 히브리어 슈브는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리다는 뜻입니다. 처음의 자리, 처음의 삶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죄에 빠진 사람들에게 처음의 자리는 어디일까요? 성경은 처음 사람을 만들 때 가장 완벽하고 온전하게 만들었습니다. 죄는 이 모든 것을 앗아갔습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올 때 용서하시고 회복시키십니다.


되돌아가는 것은 처음의 모습으로 회복되는 것 이상입니다. 우리의 모습은 약간 수정하고 개선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지은 모든 죄를 간과하시고 없었던 것처럼 대하신다는 말입니다. 동일한 단어와 용법으로 사용된 이사야 58:12을 봅시다.


58:12 네게서 날 자들이 오래 황폐된 곳들을 다시 세울 것이며 너는 역대의 파괴된 기초를 쌓으리니 너를 일컬어 무너진 데를 보수하는 자라 할 것이며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라 하리라


길을 수축한다는 말이 슈브라는 단어입니다. 길을 수축하여 원래 가진 길의 기능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적용시키면 하나님을 찬양하기에 합당한 존재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악인들은 하나님을 찬양하지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따르는 자들만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스스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부흥은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것입니다. 공의와 정의가 하수처럼 흐르고, 온 땅에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한 상태를 말합니다. 왜곡이나 오해 없이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천국은 어린아이들과 같은 사람들이 들어갑니다. 있는 그대로는 믿는 사람들입니다. 죄의 시작이 하나님에 대한 의심에서 시작되었다면 생명은 믿음과 순종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영혼네페쉬로 마음과 지성을 포함한 영혼을 뜻합니다. 때로는 죽음존재’ ‘갈망을 번역하기도 합니다. 네페쉬를 한 마디로 정의하기는 힘들지만 그 사람의 모든 것을 포함하는 어떤 것입니다. 3절 전반부를 의역해 본다면 내가 태어난 존재의 목적에 합당하게 다시 세우 주시고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원래의 나로 회복시키고, 영혼의 깊은 갈망을 따라 움직이는 영적 갈망을 채워 주십니다.


우리는 부흥시키다라는 말 안에 전 존재적 회복의 의미가 있음을 압니다. 다윗은 이 단어를 통해 처음 자신의 자리로 돌이키고 있습니다. 다윗의 원래 자리는 왕이 아닙니다. 그는 아들 취급도 받지 못한 목동에 불과했습니다. 사무엘이 이새의 집에 찾아왔을 때 하나님은 이새의 아들 중 아무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그때야 사무엘은 다른 아들이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이새는 다윗을 누군가에게 내세울 만한 아들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무에게도 인정받지 못한 천한 존재, 그가 바로 다윗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을 그곳에서 일으켜 주셔서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죄를 범했고, 원수들에게 쫓겼습니다. 심지어 아들에게 쫓겨 죽을 뻔하기도 합니다. 죄를 범하기 전에도 다윗은 언제나 도망자였습니다. 아버지에게 버림받았을 뿐 아니라 형들에게도 무시당했습니다.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골리앗을 보았을 때 형은 다윗에게 어린 것이 왜 여기에 왔느냐며 화를 냅니다. 골리앗을 죽이고 사울의 사위가 되어서도 언제나 쫓겨 다녔습니다. 고백한 대로 죽음과 생명은 한 발자국 차이였습니다. 다윗은 지금 외롭습니다. 성전에 다시 돌아갈 것을 기대하면 사망과 죽음의 골짜기를 지납니다. 그럼에도 그는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혼을 소생시키실 것을 믿습니다.


넘어지면 일어나지 못하는 양들이 있습니다. 벌렁 나자빠져 허공을 향해 발버둥 치지만 일어나지 못합니다. 내버려 둔다면 그 양은 죽고 맙니다. 목자는 양들이 스스로 일어날 수 있는 상태인지 아닌지를 세밀히 살펴야 합니다. 그래서 홀로 일어나지 못하는 양들은 자주 들여다 보아야 합니다.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인도한다는 말을 NIV 성경은 ‘guide’로 번역했습니다. 가이드 하는 것은 길을 알지 못하는 이들을 이끈다는 뜻도 있지만 가르치다’ ‘설명하다는 뜻도 포함합니다. 창세기 24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종이 이삭의 아내를 찾기 위해 하란으로 보냅니다. 하란에 도착한 종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24:27 이르되 나의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나이다 나의 주인에게 주의 사랑과 성실을 그치지 아니하셨사오며 여호와께서 길에서 나를 인도하사 내 주인의 동생 집에 이르게 하셨나이다 하니라


하나님은 어떻게 가르치실까요? 무엇이 죄이고 무엇이 악인 지를 가르칩니다. 무한한 자유를 주는 것이 결코 자신을 죽이는 것임을 알게 합니다. 필립 켈러는 이 구절을 해석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양들이 정성어린 보살핌과 세심한 관리를 받는 대신에 제멋대로 행동하도록 방임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방임된 양들은 어떤 행동을 했을까요? 저들은 서로 싸우고 목초지를 무질서하게 배회하면서 저들의 파괴적인 습성을 최대한도로 발휘하였습니다.”


그렇게 하여 목초지는 완전히 파괴되었고, 흙이 노출되어 비에 휩쓸리고 먼지가 일어납니다. 땅이 오염되어 양들은 기생충과 병에 걸립니다. 인도하는 것은 훈련시키는 것입니다. 양이 건강하고 튼튼한 것은 목자의 영광입니다. 목자는 양을 잘 길렀다고 칭찬과 존경을 한 몸에 받을 것입니다. 양을 바르게 먹이고 키우는 것이 바로 목자 자신을 위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14:6) 말씀하십니다. 또한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10:10)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을 따는 것이 곧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께 가기를 원치 않습니다. 지금 자신이 있는 그곳이 편하고 좋기 때문입니다. 악의 삶은 지금 당장 큰 손해를 끼치지 않습니다. 미미하지만 언제나 마이너스 인생입니다. 오늘 많은 쾌락을 얻었지만 더 많은 마음과 영혼의 손해를 입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마치 카드 돌려 막기 하는 것처럼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 같지만 마지막 순간에 더 이상 막을 수 없는 때가옵니다. 그때야 자신이 가진 빚이 얼마나 많은지를 알게 됩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미미하지만 플러스 인생입니다. 조금씩 조금씩 나아지고 평강의 길을 걷게 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을 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필요한 건 순종입니다. 순종은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있어야 합니다. 전적인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없다면 결코 따라갈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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