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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드슨 테일러의 편지, 사랑하는 누이에게

샤마임 2011. 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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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누이에게....

사랑이 넘치는 네 편지 매우 고맙게 받아보았다. 우리가 중국에 온 이후 네가 그러한 편지를 쓴 것은 처음이라고 생각된다. 내가 알기로 너 역시 나와 마찬가지라고 본다. 마음과 몸은 어느 정도 이상의 과로는 견디지 못할 것이며, 어느 정도 이상의 일은 할 수 없을 것이다. 일로 말한다면, 내 일이 너무 많거나, 책임이 너무 무겁거나, 너무 힘든 적은 없었다. 그러나 이제 부담과 중압감은 모두 사라졌다. 아마도 지난 달이나 그 이전에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였던 것 같다.

주님게서 나를 위해 행하신 것에 관해 조금이나마 네게 말해 주고 싶다. 나 자신에 관해 얼마나 너를 이해시킬 수 있을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새롭거나 이상하거나 놀라운 것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모든 것이 새롭다. 한 마디로 말하면 내가 눈이 멀었다가 지금은 본다는 것이다.

조금만 돌이켜 보면 나에 관해 더 잘 이해시킬 수 있을 것 같다. 사랑하는 아멜리아, 지난 6개월 동안 내 마음은 몹시 괴로웠다. 개인적으로나 사역을 위하여 내 혼에 더 많은 거룩과 생명과 권능이 필요함을 느꼈다. 그러나 개인적인 필요가 우선이었고 가장 컸다.

좀 더 하나님 가까이서 살지 못하는 것에 대해 배은망덕과 위험과 죄의식을 느끼고, 기도하고, 괴로워하고, 금식하고, 애쓰고, 결심하고, 더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더 많은 시간을 드려 은둔하고 묵상하려 애셨지만, 모든 것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매일, 거의 매 시간마다 죄의식이 나를 억눌렀다. 그리스도 안에 거할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임을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나는 기도로 하루를 시작했고, 한순간도 그분으로부터 시선을 떼지 않겠다고 결심했으나, 그렇게 하고자하는 의무감이 주는 중압감이 때로는 나를 몹시 괴롭히고, 끊임없이 나를 지치게 하여 자주 그분을 잊게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서 신경이 너무나 예민해져서 화를 잘 내거나 거친 생각과 때로는 불친절한 말을 하게 되어 더욱 통제하기 어렵게 하였다. 그 결과 나는 매일 죄와 실패와 능력의 부족을 낳았다. 참으로 내게 원함은 있었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 수 없었다.

그러자 다음과 같은 의문이 들었다. "이러한 상태에서 정녕 벗어날 수 없단 말인가? 승리 대신에 항상 끊임없는 갈등과 패배로 끝내야 하는가? 나의 체험에서는 그렇지 않은데도 어떻게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라고 진지하게 말씀을 선포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강해지는 대신에 점점 약해 졌으며, 죄에 대항하는 권능이 점점 없어지는 것 같았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믿음 뿐 아니라 소망조차 매우 약해졌기 때문이었다. 나는 자신을 미워했다. 나는 나의 죄를 미워했다. 그러나 그 죄에 대항하는 힘을 얻을 수 없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임을 느꼈다.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 안에 계신 하나님의 영께서는 '아바 아버지'라고 외치려고 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특권을 누리려 했으나 나는 전적으로 무능했다. 나는 거룩, 곧 실제적인 거룩은 은혜의 방법을 부지런히 사용하여 서서히 얻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 세상에서 내가 간절히 바라는 것이 없으며, 크게 필요로 하는 것도 없다고 느꼈다. 그러나 그 실제적인 거룩에 조금이라도 도달하기는 커녕, 추구하고 애쓸수록 더욱 붙잡을 수 없었다. 소망은 거의 사라졌다. 그래서 나는 아마도 하늘을 더 달콤하게 만들기 위해 하나님께서 그것을 이 땅에 주시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는 내 힘으로 그 거룩에 도달하고자 애썼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자신이 무능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나는 주님께 그렇게 말씀드렸으며 도움과 힘을 달라고 구했다. 때로 나는 그분께서 나를 지키시고 보호해 주실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저녁에 돌이켜보면, 슬프게도, 하나님 앞에서 고백하고 슬퍼해야 할 죄와 실패만이 있을 뿐이었다.

이것이 그 길고 지루한 날들 동안 내가 매일 체험한것이라는 인상을 주고 싶지 않구나. 내 혼은 너무나 자주 그러한 상태에 이르렀고 대부분 절망으로 끝났다. 더이상 그리스도께서 보배로운 분, 곧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실 수 있으며 구원하기를 원하시는 구주로 여겨지지 않았다. 때로 주님 안에서 화평을 누리거나 기쁨을 갖는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이었으며 고작 아무런 권능도 없었다. 오, 이러한 갈등을 끝내게 해주신 주님은 얼마나 좋으신 분인가!

나는 항상 그리스도 안에는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있다고 확신하였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그것을 어떻게 얻느냐가 문제였다. 실로 그분은 부요하시지만 나는 가난하였다. 그분은 강하셨지만 나는 약하였다. 나는 뿌리와 줄기에 풍부한 부요함이 있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보잘 것 없는 작은 가지 안으로 얻어내느냐는 것이었다. 빛이 서서히 나를 비추었다. 나는 믿음만이 그리스도의 충만을 붙들고 그 충만을 나의 것이 되게 하는데 유일하게 필요한 것임을 알았다. 그러나 나는 이 믿음을 갖지 못했다. 믿음을 구하려고 애썼지만 내게 임하지 않았다. 힘써 얻고자 시도하였지만 헛수고였다. 예수님 안에 있는 은혜의 놀라운 공급과 보배로운 구주의 충만을 보면 볼수록 나의 무능함과 죄악이 커지는 것 같았다. 범한 죄는 그 죄의 근원인 불신의 죄와 비교할 때 사소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그 분을 취할 수 없거나 하지 않는다기보다는 오히려 그 분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었다. 나는 불신을 세상에 속한 저주받을 죄라고 생각하면서, 그 불신의 죄에 빠졌다. 믿음을 구했지만 임하지 않았다. 무엇을 해야만 했던가?

내 혼의 고뇌가 최고에 도달했을 때 친애하는 맥카디로부터 온 편지에 담긴 한 문장이 내 눈에서 비늘을 제거하는데 쓰였다. 하나님의 영께서 이전에 결코 안 적이 없던 예수님과의 하나 됨의 진리를 계시하였다. 동일한 실패를 체험하였고, 나보다 먼저 빛을 보았던 맥카디는 다음과 같이 썼다.

"그러나 어떻게 믿음을 강하게 할 수 있는가? 그것은 믿음을 구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신실하신 분을 의지하는 것이다."

그 문장을 읽을 때 나는 모든 것을 보았다. "만일 우리가 믿지 아니한다 할지라도 그 분께서는 변함없이 신실하시니" 나는 예수님을 바라보았고, 그 분께서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았다. (그것을 보았을 때 오! 얼마나 기쁨이 넘쳤던가!) "오! 거기에 안식이 있구나!"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 동안 예수님 안에서 안식하기 위해 헛되이 애써 왔구나. 이제 결코 더 이상 애쓰지 않겠다. 왜냐하면 그분께서 나를 저버리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지 않으셨던가?" 사랑하는 아멜리아. 그 분은 결코 나를 떠나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분께서 보여주신 전부가 아니었다. 그것은 반도 되지 않았다. 내가 포도나무와 가지에 대해 생각했을 때 복되신 성령께서 어떠한 빛을 내 혼에 쏟으셨던가! 그 분으로부터 수액, 곧 그분의 충만을 얻고자 했던 일에서 나는 얼마나 큰 실수를 저질렀던가? 나는 예수님께서 결코 떠나지 않으실 것이라는 사실 뿐아니라 내가 그 분의 몸과 살과 뼈의 한 지체라는 사실을 보았다. 이제 내가 보는 포도나무는 단지 뿌리만이 아니라 모든 것, 곧 뿌리, 줄기, 가지, 어린 가지, 잎, 꽃, 열매이다. 예수님은 그것만이 아니시다. 그 분은 흙이요, 빛이요, 공기요, 소나기요, 우리가 꿈꾸고 원하고 필요로 했던 것보다 수만 배 더한 분이시다. 오, 이 진리를 보는 기쁨이여! 부디 너의 지각의 눈이 밝아져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값없이 주어진 부요함을 알고 누리기를 기도한다.

오, 사랑하는 누이여, 부활하시고 높여지신 구주와 진정으로 하나 되는 것, 그리스도의 한 지체가 되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그것이 포함하고 있는 바를 생각해 보기 바란다. 그리스도는 부요하신데 나는 가난할 수 있는가? 너의 오른 손은 부요한데 왼손이 가난할 수 있는가? 너의 머리는 잘 공급받는데 몸은 굶어죽을 수 있는가? 다시 한 번 기도하는 가운데 이것에 관해 생각해 보기 바란다. 은행원이 고객에게 "그 수표를 쓴 것은 당신의 손이지 당신이 아니요."라거나 "나는 이 금액을 당신 손에 지불할 수 없으며, 당신에게만 지불할 수 있소."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의 신용의 한도는 엄청나게 넓으며, 그 범주를 지키는 한, 예수님의 이름으로(우리의 이름이나 단지 예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그뿐께 속한 자요. 그 분의 지체라는 기초 위에)드리는 너의 기도나 나의 기도는 반드시 응답을 받을 것이다. 우리가 비성경적이거나 또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어떤 것을 요구할 경우, 그리스도께서는 응답하실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그 분의 뜻대로 무엇이든 구하면, 그분께서 들으시는 것이라... 우리가 그분께 구하여 청원한 것들을 가진 줄로 아느니라"

다른 어느 몫보다도 가장 달콤한 몫이 무엇인지를 말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와의 완전한 일치가 가져오는 안식이다. 이것을 알기에 나는 더 이상 염려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뜻을 성취하실 수 있으며 그 분의 뜻은 나의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분께서 나를 어느 곳에 어떻게 두시는지는 중요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뿐께서는 반드시 가장 편안한 상태에서도 내게 은혜를 주시며 가장 어려운 상태에서도 그 분의 은혜는 충분하기 때문이다. 내가 하인에게 값싼 물건을 사러 보내건, 가장 비싼 물건을 사러 보내건, 그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느 경우이든 그는 내게 돈을 요구하며, 산 물건을 내게 가져온다.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를 몹시 당혹스러운 처지에 처하게 하신다면 마땅히 내게 많은 지침을 주시지 않겠는가? 긴급한 경우를 당했을 때 그 분의 것으로 담당치 못하지는 않을까 두려워 하지 말라! 그 분의 것은 나의 것이다. 왜냐하면 그 분은 나의 것이며 나와 함께 하시며 내 안에 거하시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믿는 이와 그리스도의 하나 됨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믿음에 의해 그리스도께서 내 마음안에 거하셨기 때문에 나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이에 관해 글로 쓰는 대신 말로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이전과 다를 바 없다. (어떤 의미에서 그렇게 되기를 원하거나 그렇게 되고자 애쓴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장사되었으며, 또한 부활하였고 승천하였다. 지금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며, "내가 육체 안에서 사는 삶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이제 나는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을 믿는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그와같이 간주하시며 나에게도 그렇게 간주하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잘 알고 계신다. 과거의 나의 모든 경험은 그렇지 않음을 보여주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지금에 대해 말씀하시기에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본다. 나는 옛 것들이 지나갔음을 느끼고 안다. 나는 이전과 같이 죄를 범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에 대해 결코 이전의 그 어느 때보다 다르게 깨닫는다. 그분은 죄를 범할 수 없으시다. 그분은 내가 죄를 범하지 못하도록 지키신다. 내가 이 빛을 본 이후로 죄를 범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지만(이렇게 고백해야 하는 것이 부끄럽구나!) 죄를 범할 필요가 없었다고 느낀다. 게다가 빛 가운데로 걸을수록 나의 양심은 더욱 부드러워졌다. 죄는 끊임없이 나타났고, 고백했고, 용서를 받았다. 그리고 완전히 고백을 하지 않고 자아를 정당화하려고 시도했던 때의 몇 시간 동안 화평과 기쁨이 돌아오지 않았던 한번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화평과(겸손이 함께 한) 기쁨이 즉시 회복되었다.

이제 내가 이해하기로, 믿음은 단순히 그림자가 아니라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다. 그것은 보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니라 그 이상이다. 보는 것은 단지 사물의 외적 형태를 볼 뿐이다. 믿음은 실체를 준다. 너는 실체를 의지할 수 있으며, 실체를 양식으로 살 수 있다. 믿음(신뢰할만한 그분의 약속의 말씀)에 의해 마음 안에 거하고 계시는 그리스도께서는 실로 권능이시며, 실로 생명이시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죄는 함께 거할 수 없으며, 세상을 사랑하거나 많은 것을들 염려하면서 그분의 실제를 가질 수 없다.

이제 이만 끝맺어야겠다. 좀 더 많은 시간이 있었더라면 하고 싶은 말을 다했을 터인데 반도 하지 못한 것 같구나. 부디 하나님께서 이 복된 진리들을 붙잡을 수 있게 해 주시기를 기도한다. 요컨대 더 이상 계속해서 "누가 하늘로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이는 그리스도를 위에서 모셔내리는 것이요"라고 말하지 않도록 하자. 달리 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 분과 하나요. 바로 그의 몸의 지체로 만드셨다면, 더 이상 그 분이 멀리 떨어져 계신 분으로 생각하지 않도록 하자. 이 체험, 이 진리들을 더 이상 몇 사람만을 위한 것으로 여기지 않도록 하자. 이러한 진리들은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의 상속권이다. 이러한 진리 없이 지낼 수 있다는 것은 주님을 모욕하는 것이다. 죄로부터의 구원이나 참된 섬김을 위한 유일한 권능은 그리스도이시다.

너의 사랑하는 오빠

허드슨 테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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