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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장사의 비유(마태복음 13:45-46)

샤마임 2011. 6. 15.


진주장사의 비유

밭에 감추인 비유가 천국을 발견한 사람들의 이야기라면, 진주장사의 비유는 전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능동성에 관한 것입니다. 앞의 비유가 ‘우연히 찾게 된 천국’이라면, 이번의 비유는 진주장사가 값진 진주를 찾아 헤매였다는 것입니다. ‘구하는’이라는 동사로 쓰인 ‘제토운티’라는 단어는 ‘제테오’라는 단어의 ‘현재 능동태 동사’로 ‘계속하여 찾고 있다’, 갈망하다 추구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진주 장사는 값진 진주를 찾기 위해 열정적으로 노력한다는 뜻이다. 길을 갈 때도 아무렇게나 지나치지 않고 주의 깊게 보고, 진주를 파는 상점에 들어가면 면밀히 검토해 본 다음 정말 값진 진주가 있는가를 살폈다는 말이다. 그리고 나서 그는 그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진주장사는 발견하고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고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습니다.

극히 값진 진주 하나는 무엇인가?

여기서 딜레마는 천국이이라는 진주장사가 발겨한 ‘극히 값진 진주 하나’는 무엇일까요? 천국이 그토록 찾아 헤매였던 ‘극히 값진 진주 하나’는 무엇일까요?

저는 이 진주를 하나님께서 발견한 ‘잃어버린 영혼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여기에는 많은 난제들이 있습니다. 먼저 진주는 ‘단 하나’라는 강조된 단수형이라는 것이며, 죄인들이 어떻게 ‘극히 값진 진주’가 될 수 있는가입니다. 저는 본문을 해석하면서 수십 편의 설교와 몇 권의 주석을 참고했습니다. 그런데 단 한분 말고는 저의 해석을 응원해 주지 않았습니다. 청교도 설교가인 찰스 스펄전과 존 라일뿐 아니라, 현대의 주석들 역시 이 문제를 단순히 밭에 감추어진 보화와 함께 엮어가면서 진주를 ‘천국’으로 규정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이 좋은 해석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먼저 그것은 문법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본문을 읽어보면 ‘천국은 진주 장사’이지, 진주가 천국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단순하게 사람들이 천국을 사야한다는 것은 왠지 어색합니다.

두 번째 증거는 교리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부유한 장사는 진주를 찾아 헤매였습니다. 그러나 
죄인들은 하나님을 찾아 헤매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천국을 사모하는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중생하지 않는 영혼은 결코 하나님을 자진하여 찾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돌트회의에서 칼빈주의자들은 5가지 칼빈주의 교리를 확정지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바로 ‘불가항력적 은혜’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구원하시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요한사도의 말처럼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요일 4:10)

저는 이 본문을 잃어 버린 영혼을 향해 이 땅에 내려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으로 말하고 싶습니다.

세 번째의 증거는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마태복음의 전체신학과 그것이 잘 맞아 떨어지며, 본문의 위치를 보아도 그것이 분명합니다.
마태복음 13장 바로 앞장과 마지막 부분은 예수님께서 고향에 오셔서 행하신 사역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배척 당하셨습니다. 
영국의 저명한 신학자인 알리스터 맥그라스 [목마른 내영혼]이란 책에서 이렇게 기독교를 설명합니다.

“기독교의 근본 가르침은, 이렇듯 하나님이 친히 우리 있는 곳까지 오셨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 나서도록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우리를 찾아 오셨다. 사람들은 흔히 하나님을 만나러 인간이 사닥다리를 타고 위로 올라가는 것을 종교로 생각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반대다. 우리를 만나러 하나님께서 친히 그 사닥다리를 타고 아래로 내려오셨고, 기쁨의 노래를 부르시며 우리를 집으로 데려가신다고 선언한다.”

 

네 번째로 부유한 장사를 하나님으로 바꾸고, 자기의 모든 소유를 예수님으로 바꾸어도 본문과 너무 잘 들어 맞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잃어버린 영혼들을 위해 자신의 전부이신 독생자 그리스도 예수를 기꺼이 희생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분은 오늘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험학한 산을 넘으셨고, 자신의 파도치는 강을 건너셨습니다.

 
 다섯 번째 이유는 마태복음 13장의 비유의 법칙과 잘 어울립니다.

씨 뿌리는 비유는 뒤에 나오는 가라지의 비유를 통해 좀더 세밀하고 실제적으로 설명되고 보강됩니다.

겨자씨의 비유 역시 뒤에 나오는 누룩의 비유와 쌍을 이루면서 확장되는 천국의 비유를 더욱 강하게 만들어 줍니다. 겨자씨가 생명의 역동성을 강조했다고 한다면, 누룩의 비유는 작은 누룩이 전부를 바꾸어 버리는 놀라운 능력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과 마찬가지로 오늘의 비유는 밭에 감추인 비유에서 완전하게 말하지 못한 또 다른 측면의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밭에 감추인 보화가 마치 우연하게 발견된 것처럼 나오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그들앞에 나타나 스스로 나타나심으로 천국은 스스로 드러나고 발견되어지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주님께서 잃어버린 영혼들을 찾아 여리고로 들어갈 때 삭개오가 예수님을 뽕나무 위에서 예수님을 발견한 것처럼 말입니다.

 중세의 경건한 신학자요 철학자였던 캔터베리 안셀름은 프로슬로기온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나로 당신을 구하도록 가르치시고 구하는 자에게 당신을 허락하소서. 왜냐하면 나는 당신이 가르치시지 않으면 당신을 구할 수 없고, 당신이 주시지 않으면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구하게 하시고 열망하게 하소서. 사모하며 발견케 하시고 발견하면서 사모하게 하소서. 나는 믿기 위해 알려하지 않고 알기 위해서 믿나이다. 내가 믿지 않으면 알수 없다는 것도 믿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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