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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와 복의 역설 / 창세기 4:8-15

샤마임 2010. 1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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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와 복의 역설

창세기 4:8-15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많은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봅니다. 특별히 악인들이 형통을 볼 때마다 세상에 정의는 사라졌다고 말하고 싶어합니다. 하박국 선지자도 악인들의 형통함을 보고 하나님께 답답하여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더욱 우리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왜 하나님은 그들을 당장 벌하지 아니하시고 내버려 둔다는 것입니다. 처음 우리가 하나님께 발견되었을 때, 우리는 말할 수 없는 설레임으로 가득찼습니다. 그 분을 너무 사랑했기에 모든 것을 아낌이 드리고 싶었습니다. 이제 앞으로 멋진 일과 주의 나라를 향한 원대한 꿈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무엇이든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을 것 같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리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곧 알게 됩니다. 미국의 흑인 인권운동을 주도했던 마틴 루터킹 목사는 ‘이루지 못한 꿈들’이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에서 갖가지 건물을 짓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 일을 마치지 못한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우리의 꿈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에 직면해야 하는 경우가 많이 있음을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마하트마 간디는 인도를 위대한 통일국가로 만들고 싶었지만 그는 낙심했고, 암살 당했으며, 힌두교와 모슬렘의 분쟁으로 인도는 인디아와 파키스탄으로 나누어졌습니다. 수많은 우리 조상들이 자유를 노래했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이 꿈을 이루지 못하고 힘없이 죽어가야 했습니다.”

‘산산히 부서진 꿈’ 이것이 우리의 실존이요 현재의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혹시 하나님께서 간절히 기도하는 여러분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고 오히려 여러분을 괴롭히는 사람들을 더욱 사랑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아본 적은 없습니까?

그러나 성실하시고 진실하신 하나님은 기쁘신 뜻을 따라 인류의 역사를 새롭게 하시며 인생의 모든 생사화복을 주관하고 계십니다.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부조리한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알려줍니다.

우리는 창세기 4장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무엇을 도전하시고 계시며 말씀하시는가를 듣기를 소망합니다.

첫째, 가인의 표는 저주의 표이다.

하나님 앞에 믿음의 제사를 드렸던 아벨은 불의한 형인 가인에 의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믿음의 사람이 더 잘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여전히 부당한 사건들이 일어납니다. 이러한 사건은 태초부터 이미 존재했던 것임을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찾아가셔서 동생을 죽인 피 값을 치르게 했습니다. 그것은 땅에서 피하여 유리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영원히 떠돌아 다녀야하는 저주입니다. 가인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이제 자신을 보호해줄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두려움으로 인해 하나님께 자신의 두려운 마음을 고합니다.(14)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표를 주시고 약속하십니다. 그 표로 인하여 가인은 죽임을 면하게 됩니다.

첫 번째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가인이 받은 표는 무엇인가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표가 먼저 저주받은 가인에게 주어지는 저주의 상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표가 정확하게 어떤 의미로 다른 사람들에게 다가왔는지는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이 표로 인하여 가인이라는 존재가 확실히 부각되었으며, 함부로 건드리면 안되다는 두려움 내지, 어떤 거부감이 생겼습니다. 이 표가 가지는 확실한 한 가지 사실은 이 표가 가인이 살인자를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며, 하나님과의 모종의 어떤 비밀이 들어가 있다는 것입니다. 표를 주심으로 가인은 더 이상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손을 피하여 달아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는 어디를 가든지 그 표로 인하여 정체가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누구나 가인을 볼 때 마다 ‘동생을 죽인 살인자’라는 말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가인의 표는 저주의 상징입니다.

둘째, 가인의 표는 은혜의 상징이다.

가인의 표는 분명 하나님의 저주의 징표이기는 했지만,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다는 점에서 은혜의 상징입니다. 이것은 사실 이해하고 싶지 않는 역설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어떨까요? 너무 가난하여 먹을 것이 없는 사람이 죄를 지어서 교도소에 들어간다면 그는 비록 교도소에 들어가기는 했지만 밥 세끼는 해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살인자의 표를 주심으로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심으로 가인을 보호해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살인자인 가인을 보호해주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공의를 행하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실망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가인을 보호하심으로 궁극적으로 또 다른 가인인 우리들을 구원하기 원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범죄한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실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가죽옷을 힙혀 주셨습니다. 이뿐 아니라 노아의 홍수 때 방주 안에는 영원히 저주받을 함도 함께있었으며, 부정한 짐승도 함께 있었습니다. 바벨탑 사건 역시 하나님을 거역하는 인간들을 하나님께서 주주하셨는데 그것은 그들을 온 땅에 흩으심으로 번성케 하셨습니다.

우리는 일방적인 죄인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보면서, 이 세상이 더욱 혼탁해지는 것 같고 부조리와 모순을 더욱 채워가는 듯합니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모순된 행위를 하시는가? 아담은 가인은 낳고나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이 표현은 가인을 낳는 것이 자신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택하신 12제자 안에는 간사한 배신자도 들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를 당장에 뽑지 않고 가라지도 마지막 때까지 내버려 두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적 능력으로 인해 살인자 가인도 탄생한 것입니다. 이것은 죄인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안으시는 끝까지 그가 돌아오기를 참고 기다리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말해줍니다. 

우리는 누가복음 15장에서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아버지를 버리고 모든 소유를 탕진하고 돌아온 막내 아들을 아버지는 꼭 안아주십니다. 그리고 그에게 다시 옷과 가락지와 신을 줍니다. 다시 아들로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배역한 이스라엘 민족에게도 여전히 나타내주십니다. 이뿐 아니라 이곳에 앉아있는 바로 우리 자신에게도 그렇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였으며, 그 죽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부조리한 세상이라고 말하지만 하나님은 부조리한 역사 속에서 인류를 구원할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 세상은 살육의 위협으로 가득 찬 각박하기 짝이 없는 약육강식(弱肉强食)과 적자생존(適者生存)의 투쟁장입니다. 기회만 있으면 우리의 생명을 빼앗아 가려는 살기(殺氣)가 가득한 원수들로 가득한 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 발붙여 살고 있는 이 세상입니다. 누가 우리의 이 가련한 생명을 이 살기(殺氣) 가득한 세상의 위협으로부터 지켜 줄 것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거나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천지의 창조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를 낳으신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우리의 어머니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들에게 우리의 생명을 지켜 줄 표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진실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이 생명이 감히 이 살육의 현장 속에서도 아직도 여전히 이렇게 감히 살아있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입니까?

셋째, 가인의 표는 예수의 흔적이다.

가인의 표는 궁극적으로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저주의 표입니다. 바울은 주님께서 나무에 달려 저주 받은 바 되셨다고 고백합니다. 그 저주는 인류에게 내려진 하나님 아버지의 공의였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가인에게 표를 주심으로 저주로 나타났지만 궁극적으로 저주가 복이되게 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인가 얻을 것이 있으며 그 사람을 칭송하고 격려해주고, 힘을 실어 줍니다. 그러나 아무런 사용가치가 없으면 관심도 가지지 않습니다. 가인이 표는 가인이 가지고 있는 모든 힘을 송두리째 빼앗아 버렸습니다. 아무도 그에게 가까이 가지 않았고, 가고 싶어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인해 하나님의 은혜가 그에게 임한 것입니다. 그러나 가인은 하나님의 숨겨진 표를 온전히 실천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놋 땅에 가서 하나님의 지켜주심에 대한 약속을 믿지 못하고 성을 만들어 스스로를 지키려 했습니다.

구원역사는 하나님의 저주 속에 숨겨진 믿음의 눈으로 통찰했던 믿음의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철저하게 세상을 버리고, 세상에서 버려짐으로 하나님을 얻으려 한 것입니다. 안락한 바벨공동체를 떠나 오직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땅에서 유리하는 저주를 기꺼이 감당했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통해 이스라엘을 탄생시켰으며, 사울의 미친 추격 속에서도 그것을 제하거나 부정하지 않고 온 몸으로 사랑하고 떠 안았던 다윗을 통해 이스라엘을 부흥시켰습니다.

미국의 청교도 작가로 알려진 나다니엘 호돈의 작품인 ‘주홍글씨’에서 간음한 대가로 가슴에 ‘간음’을 뜻하는 A를 평생안고 살아가는 헤스터 프린이라는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여인의 가슴 위에 이마에 찍힌 가인의 낙인보다 더 참기 어려운 표시를 달아준 세상도 이 여자를 완전히 고립시킬 수는 없었다. 세상은 이 여자가 나타내고 있는 주홍글씨에 대단히 강한 파괴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이 여자와 마찬가지로 죄많은 인간 외에는 아무도 동정을 베풀 수가 없었다. 헤스터는 착실히 삯바느질로 딸 펄과 자기를 위한 생활비를 버는 일 이외에는 세상의 권리를 누리겠다는 주장을 손톱만큼도 한 일이 없었을 뿐더러 남을 위해 할 일이 생기면 자기도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사람들이 악담을 퍼붓는 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곤란한 사람들이 부탁하면 얼마 안 되는 돈이라도 기꺼이 내주는 사람은 헤스트 밖에 없었다. 이 거리에 질병이 만연했을 때에도 헤스터만큼 헌신적인 사람은 없었다. 어떤 경우든 참변이 있을 때 이 버림받은 여인은 자기가 할 일을 즉시 찾아내는 것이었다. 걱정스러운 일로 침울해 있는 집을 찾아갈 때는 손님이라기보다는 당연한 권리를 가진 가족의 한 사람으로서 행세했으며 그 집의 침울한 빛 속에 같은 인간으로서 교제할 자격이 생기는 세계가 있는 것 같았다. 거기서는 수놓은 글씨가 빛났으며 이 세상의 빛 같지 않은 그 빛에는 위안이 담겨있었다. 다른 곳에서는 죄의 표시였던 그 글씨가 여기서는 병자의 방을 환히 비춰주는 촛불이었다. 그것은 병자가 숨을 거두려고 할 때 현세의 경계를 넘어 저승까지 그 빛을 보내주기도 했다. 또 이 세상의 빛이 흐려져가고 내세의 빛은 아직 비치지 않았을 때에 발을 내디딜 곳을 일러주는 촛불이기도 했다. 이렇게 위급할 때는 헤스터의 포근함이 발휘하여 모든 진실된 요구를 들어줬을 뿐만 아니라 아무리 큰 요구에도 무궁무진하게 받아들여지는 인간적인 긍휼의 샘처럼 처신했다. 치욕의 표시가 붙은 가슴이 안식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더할 수 없이 푹신한 베개가 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A자를 본래의 뜻으로 해석하려 들지 않고 그것이 유능한 Able이라고 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사역을 통해서 가인의 저주가 복이 되는 확실한 증거를 얻을 수 있습니다. 세상으로부터 완전하게 버림받아 온 세상을 구하셨습니다. 찢기고 상하고 배고파하고 배신을 당하고, 버림을 당했습니다. 세례가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서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이 아닙니까? 영원히 그분과 함께 사는 것이며, 그 분처럼 사는 것이 바로 세례입니다.

[로마서 6:3-4] 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이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이 땅에서 하나님의 저주를 온전히 감당하심으로 온 인류를 구원하신 예수의 흔적을 가지고 살아가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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