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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에스겔의 환상 겔 1:1-14

샤마임 2021. 4.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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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제목: 에스겔의 환상

본문: 에스겔 1:1-14

 

어둠이 찾아올 때 진짜 빛과 가짜 빛이 확연히 드러납니다. 햇빛이 작열하는 맑은 날에는 모든 것이 밝아 보이고, 빛이 반사되어 밝게 보입니다. 하지만 어둠이 찾아오면 자신의 빛이 아닌 다른 빛을 받아 반사하는 물건들은 어둠에 잠기게 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작은은 빛이라도 참 빛을 내는 물체는 빛을 발하기 마련입니다. 밝은 대낮에는 거울이 가로등보다 더 많은 빛을 발사하는 것 같지만 어둠이 찾아오면 어둠 속에 잠겨버립니다. 우리의 신앙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에스겔서 1장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의해 포로로 끌려가 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3번에 걸쳐 포로로 잡혀 갑니다. 1차는 기원전 605년 갈그미스 전투 때이고 열왕기하 24:1-7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2차 포로는 597년으로 열왕기하 24:10-16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때 에스겔이 포로로 잡혀 갑니다. 마지막이자 세 번째 포로는 기원전 586-8년 사이에 이루어집니다. 바벨론은 2년 반 정도 예루살렘을 포위하여 기다리다 기원전 586년은 바벨론이 더 이상 유다를 용서하지 않게 완전히 멸망시켜 버립니다. 이때 예루살렘의 수많은 사람들이 살육을 당하고 포로로 끌려가며 솔로몬 성전이 완전히 파괴돼 버립니다.


에스겔을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가 그발 강가 유대인 주거지에서 지내게 됩니다. 제사장이었던 에스겔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이 살육을 당하고, 하나님의 성전이 파괴되는 것을 보면서 표현할 수 없는 엄청난 충격을 받게 됩니다. 아무리 이스라엘이 잘못해도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인데 어떻게 이렇게까지 망할 수가 있는가?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단지 포로가 되었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셨다는 두려움이 에스겔을 찾아왔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바벨론까지는 거리가 1,300km정도입니다. 목포에서 서울까지의 거리는 354km입니다. 바벨론까지 거리는 서울과 목포를 왕복 두 번 하면 되는 거리입니다. 지금처럼 버스나 KTX를 타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쇠사슬에 묶여 걸어서 가야 하는 엄청난 거리입니다.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고 드넓은 평야를 걷고 또 걸어야 합니다. 멀어도 너무나 먼 거리입니다.


예루살렘을 벗어나 이스라엘 땅에서 벗어나 멀고먼 타향에 임시 거주해야 하는 상황은 어땠을까요? 지금의 우리로서는 상상하기 힘들 겁니다. 고향을 멀리 떠나 하나님도 따라올 수 없는 머나먼 곳에 떨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이렇게 머나먼 곳에 하나님께서 계실까요? 두려움과 공포, 미래에 대한 암울한 생각, 하나님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듯한 암담한 속에서 하루하루 더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하나님의 말씀에 에스겔에게 임합니다. 1절을 보면 ‘서른째 해 넷째 달 초닷새’이고, 2절에서는 ‘여호야긴 왕이 사로잡힌 지 오 년 그달 초닷새’라고 표현합니다. 여호야긴 왕이 사로잡힐 때가 기원전 597년이었으니 만약 그때를 기준으로 한다면 에스겔이 하나님께 계시를 받은 때는 593년 경이될 겁니다. 

 

여호야김의 아들 여호야긴 왕(BC 598-597)

시드기야(Zedekiah)(BC 597-586)

 

남유다가 기원전 586년에 망하기 때문에 에스겔이 하나님께 첫 계시를 받은 후 얼마 가지 않는 7년 정도 후에 남유다는 완전히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남유다의 마지막 기간과 완전히 멸망당한 후, 바벨론에 끌려온 포로 초기에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바벨론으로 끌려온 이스라엘 백성들을 두 가진 양 극단에 빠져 있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버리셨다는 깊은 절망과 배신감이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포로 생활은 잠깐 끝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다시 구원하실 것이고 곧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잘못된 기대였습니다. 에스겔은 절망과 그릇된 기대를 깨고 진정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야 할 것 태도, 또는 마음가짐이 무엇인지 분명히 하기 위해 본서를 기록한 것입니다. 에스겔서의 초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적나라하게 지적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왜 멸망당해야 했는지를 깨닫게 합니다.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그릇된 선민사상을 바로 잡는 역할을 하며, 다른 하나는 하나님은 바벨론 마르둑 신에게 져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로 잡힌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죄를 징계하기 위함임을 알리려는 것입니다. 두 번째 후반부의 위로는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회복하실 것은 마른 뼈의 환상과 성전의 환상을 통해 위로하십니다.


지금의 위기는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신학적 위기, 다른 하나는 상황적 위기입니다. 신학적 위기는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정말 살아 계시는가?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리신 걸까? 하나님은 마르둑 신에게 패배한 신인가? 에 대한 답을 찾아야 합니다.


두 번째는 포로적 상황을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 미래가 없는 암울한 상황에서 어떻게 이겨야 하는가에 대해 답을 찾아야 했습니다. 실제로 두 번째 위기야 말로 진정한 위기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답은 세 가지의 측면에서 답하십니다.


첫 번째는 계시적 환상이며, 두 번째는 역사적 조망, 세 번째는 하나님의 활동성으로 답하십니다.


저는 이 세 가지 주제를 간략하게 살펴봄으로 포로적 상황에 놓인 암울한 이스라엘 민족이 찾아야 할 답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물론 이 답은 코로나라는 모호하고 답답한 포로 기적 상황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비슷한 답이 될 것입니다.

환상을 받는 에스겔


1. 계시적 환상


 하나님께서 에스겔의 고민 또는 걱정과 기도에 대한 답으로 첫 번째 제시하는 것은 ‘계시적 환상’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환상의 계시를 통해 지금 상황의 본질을 일깨우십니다.


3절을 보시면, 에스겔이 그발 강가에 있을 때 여호와의 말씀이 에스겔에게 임합니다. 예루살렘에서 1300이나 떨어진 머나먼 곳에 유배되어 살아가는 에스겔에게 하나님의 계시가 임합니다. 하나님은 유배당한 이스라엘을 홀로 두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함께 했습니다. 계시는 하나님의 임재의 표시이자,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예루살렘이 안전한 곳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곳이 안전한 곳입니다.


계시적 환상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진정으로 안전한 곳은 물리적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던 아담과 하와의 아들이었던 아벨인 믿음으로 드린 예배에 함께 했습니다. 요나가 하나님께 벌을 받고 심해의 깊은 물고 가 뱃속에 있을 때 하나님께 기도할 때 자신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었음을 확신했습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죽어가는 자신이 안전하다 생각하는 땅에서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보다 안전하다고 고백하기에 이릅니다.

 

  • [요나 2:7-9] 7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 8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모든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9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하니라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말씀이 들리는가 들리지 않는가입니다. 단지 물리적 공간이 우리의 안전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2. 역사적 조망


우리는 1.2절에서 하나님의 계시가 역사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패망한 나라, 더 이상 소망이 없는 나라에서 하나님의 계시가 임했고, 하나님의 환상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이스라엘의 패망과 회복을 계시하십니다. 이스라엘 뿐 아니라 바벨론과 다른 모든 열방들까지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명백해 드러내십니다. 이 부분은 예레미야 소명 부분에서 좀 더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 [예레미야 1:9-10] 9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10 보라 내가 오늘 너를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 위에 세워 네가 그것들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


비록 이스라엘은 멸망했지만 하나님의 나나는 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명백해지고, 더 확장되며, 더 강력해집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으로 포로 감으로 인해 페르시아 지역에도 유대인들이 남겨지게 되며, 후에 복음이 증거 될 때 그들이 큰 사역을 감당하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을 통해서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여기에도 도도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만들어 나가십니다.

 

3. 하나님의 활동성

세 번째 의미는 하나님의 활동성입니다. 본문을 유심히 읽어보면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모습이 소개됩니다. 북쪽에서 폭풍과 구름이 일어나며 네 생물이 등장합니다. 사람의 형상이 있고, 네 개의 날개와 곧은 자라 송아지 발바닥과 같은 광낸 구리 같은 발바닥이 있습니다. 이것은 강력한 힘과 능력을 상징합니다. 9절을 보면 그들이 돌이키지 않고 일제 앞으로 곧게 나아간다고 말합니다. 12절에서는 영이 어떤 쪽으로 가든지 그 생물들도 그대로 간다고 말합니다.

 

이 네 생물은 하나님을 따르며, 하나님을 보위하는 존재들입니다. 네 개의 얼굴은 하나님의 편재성을 말하며, 하나님은 모든 곳에 계시며, 모든 것을 아신다는 뜻입니다. 또한 폭풍과 번개 등은 하나님의 현현과 하나님의 능력을 뜻합니다. 날개는 어디에도 종속되지 않는 하나님의 신적 속성이자 자유를 뜻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북쪽은 종종 적들이 쳐들어 오는 불길한 방향이었습니다. 그런데 적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천둥과 번개를 동반하시고 이스라엘을 향해 돌진하고 계십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드러내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랬든 하나님은 비록 처음에는 이스라엘을 징계하시지만 다시 회복시키십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완전히 멸망시킬 작정이었다면 에스겔에게 환상으로 다가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20210414 환상.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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