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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교회일까? 김기승 / 샘솟는기쁨

샤마임 2020. 12. 18.

왜 교회일까?

김기승 / 샘솟는기쁨

 

 

[갓피플몰] 왜 교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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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시대의 교회 고민


요즘 교회에 대한 고민이 많다. 특히 코로나 이후 한국교회는 정체성을 잃은 것처럼 갈팡질팡하고 있다. 버티는 것도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 겨울을 맞이하기 위해 나무들은 몸의 일부를 땅으로 떨군다. 부교역자들은 교회에서 추방되어 어디로 가야할지도 모르는 상황에 놓여 있다. 뜨거웠던 온라인 교회 논쟁도, 온라인 성찬도 생존 앞에서는 무의미해졌다. 그러한 논쟁은 어쩌면 처음부터 배부른 사역자들의 와각지쟁(蝸角之爭)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무리 생각해도 교회가 뭔지 잘 모르겠다.

또 한 분의 교회 이야기를 듣는다. 책 제목이 꽤나 마음에 와 닿는다. ‘왜 교회일까?’ 이전부터 물어왔지만 코로나로 인해 더욱 깊어진 나의 물이다. 교회가 무엇인가를 너머, 왜 교회 이어야만 하는가를 묻고 있습니다. 이 책은 교회에 대한 신학적 변증이나 논쟁이 아닙니다. 개척교회를 시작하면서 경험하고 느끼고 고민한 내용들을 소박하게 적어 내려간 솔직고백이다. 사실, 프롤로그에서부터 가슴 졸였다. 냄새 풀풀 나는 노숙자가 교회를 찾아와 함께 예배드린다는 것은 고통이다. 그 냄새.... 말로 형언하기 힘든 그 냄새를 맡으면 한 시간 동안 자리에 동석한다는 것은 모험이자 극도의 인내가 필요하다. 수년 전에 외진 교회에서 사역하면서 일주일에 한 번씩 지역 주민들에게 식사를 마련해 대접했다. 말이 주민인지 절반이 노숙자에 가까운 사람들이었다. 특히 그 중의 몇 분은 냄새가 지독해 함께 참석한 사람들도 조차 코를 막을 정도였다. 앞에서 어르신들에게 재미나 이야기도 해주고 식사도 대접했지만 뛰쳐나가고 싶었다. 진심으로. 그런데 하필 그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뛰쳐나가고 싶었다’고. 

 


코로나 시대, 교회는 혐오(嫌惡)의 대상의 되었다. 교회에서 코로나가 종종 집단감염되어 뉴스에 나오기 때문이다. 어떤 기사 댓글을 보니 ‘교회 차만 지나가도 꼴 보기 싫다’고 적었다. 과연 우리는 누가복음 19장에 나오는 귀인의 종들과 같다. 종들에게 은 열 므나를 주며 장사를 하라고 했다. 그런데 그 지역의 사람들은 그 귀인을 싫어했다. 맞습니다. 교회의 지금이 딱 그렇다. 사람들이 교회를 싫어한다. 그래도 장사를 해야한다. 이러한 시기에 사람들은 묻는다.
“굳이 교회에 소속되어야 하는가?”
“하나님을 믿으며 돼지 왜 굳이 꼴보기 싫은 사람들과 함께 교회에 다녀야 하는가?”
세상 사람들을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하나님만 믿으면 됐지 왜 교회까지 다녀요?’라고 묻습니다. 저자는 이러한 질문에 명확한 답을 주지는 않습니다. 굳이 답을 할 필요도 없죠. 저자는 그저 왜 교회 이어야 하는 가를 삶으로 답한다.

 



몸으로 써내려간 저자의 일상은 때로는 우울하고, 때로는 감격스럽고, 때로는 두렵다. 개척교회의 형편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필자가 잘 아는 목사님도 결국 수년 동안 지속한 개척교회를 닫았다. 더 이상 공간에서 모일 수 없는 시대가 되었고, 교회 해체될 위기에 놓여 있다. 우리는 여기 다시 ‘교회가 무엇인가?’를 물을 수밖에 없다. 저자가 교회를 개척하고 일구어간 여정은 눈물겹다. 아내와 함께 8,000장의 전도지는 나눈 이야기는 더 이상 묻지 않아도 상상이 된다. 딱 한 마디 ‘전도지를 붙이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62쪽)로 충분하다.

멈추지 않았다. 방법을 찾고 또 찾았다. 맘카페 활동을 통해 모임을 만들었던 경험, 도서관을 통해 지역주민의 어려움을 공유했던 시간들이 쌓여갔다. 저자는 전도가 좀더 명민(明敏)해져야 한다고 말한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복음을 전할 지역이 어떤 곳인지 질문해야 한다. 이 고민 없이 복음을 전하러 나가면 커피콩만 가지고 거리로 나가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91쪽)

경험을 통한 저자의 답은 ‘상황화’(35쪽)이다. 이 상황화는 복음의 변질이 아니라 지역에 맞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바울이 로마교회와 고린도교회에 다르게 복음을 전하듯. 어쩌면 교회는 지금까지 획일적인 방법으로 전도하고, 예배하고, 신앙생활을 지도해 왔다. 어느 지역을 가도 예배 시간도 같고, 설교 방식, 심지어 찬양도 거의 비슷하다. 교회가 프렌차이즈도 아닌데 말이다. 

몸으로 쓰고 삶으로 적었다. 사연 없는 인생 없듯, 아프지 않는 개척교회 없다. 말미에서 ‘혈관종’ 제거 수술을 했다는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부디 건강하시길. 다시 ‘왜 교회인가’를 물었다. 저자는 명료한 답을 주거나 교조적(敎條的) 해석도 붙이지 않는다. 그냥 살아간다. 책을 모두 읽고 마지막 장을 덮을 때 알 수 없는 울림이 있다. ‘지금은 글을 써야 하는 시간’(211쪽)이란 표현이 아름다운 동시에 아픈 이유를 아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허물어진 예루살렘의 성전을 보며 예레미야는 글을 썼다. 우리는 눈물의 선지자라는 별명을 붙였고,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읽고 있다. 아픈 고백이다. 문장과 행간 사이에 적신 눈물 자국을 읽을 수 있다면 이 책은 충분히 가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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