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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신경 강해13 부활

샤마임 2020. 8. 1.

사도행전강해

사도신경 강해13

부활

고린도전서 15:20-28

사람이 죽으면 다시 살 수 있을까요? 교회를 오래 다니거나 믿음이 굳건한 사람은 그러한 사실에 대해 전혀 의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사람의 상식을 초월한 신비로운 영의 세계를 믿음으로 받는 것이기 때문에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고 복잡합니다. 오늘은 사도신견 13번째 강해로 ‘부활’에 대해 말합니다. 부활(復活)은 말 그대로 ‘다시 살아남’을 말합니다. 그러나 다시 살아남은 죽은 몸 그대로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몸을 입기 때문에 이전의 몸과 부활의 몸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사도신경 마지막 부분은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며 마칩니다.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부활은 도대체 무엇이며 어떤 것인지 살펴보도록 합시다.

1. 부활의 필요성

먼저 생각해야할 부분은 ‘부활의 필요성’입니다. 사람은 죽으면 끝이지 부활이 필요할까?라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사람조차 죽음 이후에 삶에 대해 궁금해 합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서의 삶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완벽하지도 완전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모순이 가득하고, 억울하고 분통할 일이 적지 않습니다. 아무 이유도 없이 사고로 죽는 사람도 있고, 누군가의 모함에 의해 억울하게 죽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러다보니 죽음이 끝이라고 말하면 삶의 의미를 상실하고 맙니다. 이렇게 억울하고 가난하게 살다 죽는다면 도대체 왜 살아야 하는지 없기 때문입니다. 죽음 이후의 삶은 죽음이후 그 자체가 아니라 이땅에서 발을 딛고 살아가는 ‘지금 여기의 삶’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고린도전서 15장 말씀은 부활장으로 잘 알려진 곳입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 안에 ‘부활이 없다’는 잘못된 가르침을 전파하는 이들이 있음을 듣게 됩니다. 바울은 잘못된 가르침을 일소(一掃)하기 위하여 고린도 전서를 기록합니다. 또 하나의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죽음에 이르게 된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함입니다. 그들은 가족이나 친구, 교회 동료 가운데 믿음을 지키다 순교 당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것뿐 아니라 가까운 사람이 죽자 그들의 영혼은 어떻게 되는가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거짓 교사들이 잘못된 가르침을 통해 그들의 믿음을 송두리째 흔드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바울은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을 바로잡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삶의 이유를 묻는 이들을 위해 부활을 확실하게 가르칠 필요가 있었습니다. 15:58에서 바울은 부활 논증을 마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2. 부활이란 무엇인가? 

이제 부활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성경은 우리에게 부활을 무엇이라 말할까요?

ㄱ. 의인과 악인의 공통적인 부활

부활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선인의 부활과 다른 하나는 악인의 부활입니다. 

요한복음 5: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사도행전 24:15 그들이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니이다

이렇게 본다면 부활은 모든 사람에게 일어나는 공통적 사항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부활은 역사적 종말에 일어날 부활이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의 부활은 약간 다른 개념입니다. 

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죄와 사망 권세를 이긴 사건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사망이 찾아옵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을 죽임으로 사람들이 죄 가운데 영원히 살 수 없도록 하셨습니다. 사망으로 인해 사람들은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게 됩니다. 죄성을 지닌 인간은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던 죄를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맑은 영혼을 가진 자들은 자신이 얼마나 타락한 인간인가를 바르게 볼수 있습니다. 그래서 구원의 시작은 죽을 수밖에 없는 자신의 운명에 대해 자각입니다. 마태복음 5장 팔복의 첫 번째는 바로 ‘가난함’입니다. 두 번째는 자신의 악에 대한 깊은 탄식, 즉 애통입니다. 그 다음 단계는 영원한 하나님의 생명을 갈망하게 됩니다. 그 전에는 전혀 깨닫지 못했던 영적인 갈망이 일어나게 됩니다. 

롬 8:23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고린도후서 5:1-4]

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2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3 이렇게 입음은 우리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4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육십은 입은 우리의 탄식은 잠시 잠깐 이 땅에 머물다 사라지는 것에 대한 자각과 삶의 허무로 인해 일어나는 의미의 부재 때문입니다. 

“내가 왜 살아야 하지?” 

“일 년을 더 산다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러한 무의미는 타락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주신 존재의 의미를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나이가 들면 우리는 우리의 살날이 많지 않음을 알고 삶에 더 애착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병듦과 쇠약해져가는 육신을 통해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은 인식하게 됩니다. 그러나 영적인 각성이 일어나자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갈망하게 되고,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죄에 대한 죽음이며, 무의미에 대한 죽음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더 이상 무의미한 존재로 살아가지 않고 의미 있는 존재,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존재로 살아가게 됩니다. 

3. 부활의 삶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을 말미암아 부활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죄와 사망에 대한 승리로서 부활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선포되셨습니다. 이제 죽지 않으시며 영원히 살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고전 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고전 15:23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그렇다면 아직 부활에 이르지 않는 성도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을 얻었습니다. 성령의 내주하심을 통해 육신의 삶이 아닌 영적인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갈 5:16-18] 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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