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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신경 강해]11.성도의 교통

샤마임 2020. 7.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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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신경 강해]11.성도의 교통

요한일서 1:1-4

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2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4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사도신경 강해 11번째, ‘성도의 교통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사도신경은 구판이고, 현재 적지 않은 교회에서 고백하는 사도신경은 새로 번역된 것입니다. 새번역 사도신경은 성도의 교통이 아니라 성도의 교제로 번역했습니다. 교통(交通)은 사귈 교()와 통할 통()이 합해진 단어입니다. 교제(交際)는 사귈 교에 사이 제()가 합해진 단어입니다. 그런데 제()가 언덕에서 제사(祭祀)를 지낼 때 사람들이 모여 사귄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사귐이란 단어는 헬라어 코이노니아(κοινωνίαν)이며 영어로는 fellowship로 번역합니다. 단어 자체가 큰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 성경 안에서 교통 또는 교제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살펴봅시다.

1. 사귐의 본질

그렇다면 사귐이란 도대체 뭘 말하는 걸까요? 사귐은 크게 세 가지 의미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세 가지는 첫째는 삼위 일체적 사귐입니다. 둘째는 하나님과 성도간의 사귐입니다. 셋째는 성도간의 교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귐의 핵심, 또는 사귐의 전제는 성부성자성령의 삼위일체론적 사귐에 근거하고 있으며, 그것에 근거한 교제입니다.

. 삼위일체론적 사귐

먼저 삼위일체론적 사귐을 이해하려면 페리코레시스(περιχώρησις)’라는 단어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 단어를 기억하라는 뜻이 아니라 이 단어의 의미는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 단어는 다마스쿠스 요한(670-750)가 사용한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공재로 번역했습니다. 요한 복음 10:38, 14:9.11, 17:21을 근거로 주장합니다. 이 교리는 아레니우스, 아타나시우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 교부들에게서도 발견됩니다. 도대체 다마스쿠스 요한이 주장한 교재의 개념이 뭘까요? 이 단어는 삼위일체 위격들이 대면적 공재와 상호 침투입니다.

"삼위 하나님은 상호 안에서 서도 뒤섞이지 않는 침투를 공유한다. .. 성자는 성부와 성령 안에 계시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 안에 계시며 성부는 성자 안에 계시나 뒤섞임이나 용해나 혼합은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페리코레시스는 삼위 하나님은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지만, 상호 관계하며, 상호 개방적이며, 상호 자기 수여적으로 관계합니다. 단어가 굉장히 어렵고 복잡해 보입니다. 간략하게 설명하며, 삼위일체 하나님은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동시에 서로 의존하고, 서로 연합하고, 서로 조화를 이룬다는 말입니다. 성부 하나님은 성자 예수님을 무시하거나 독단적으로 행동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철저히 서로 의지하고 의존합니다. 성령 하나님도 성부와 성자의 뜻 안에서 서로 연합하고 조화를 이룹니다. 즉 아버지의 뜻은 아들의 뜻이며, 아들의 뜻이 곧 성령의 뜻입니다. 그래서 종종 성령은 하나님 아버지의 영, 예수의 영으로 치환되어 불려지기도 합니다.

 

2. 하나님과 성도의 교제

두 번째는 첫 번째 사귐인 하나님과 성도의 교제를 알아봅시다.

1) 종교성

사람은 자존(自存)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독립적인 존재이지만 자존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닙니다. 사람은 영적인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종교성이라고 말합니다. 그 어떤 사람도 종교적이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비록 자신이 무신론자라고 주장하는 사람이라도 모두 영적인 존재이고, 종교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종교성은 피조된 어떤 물질이나 명예, 권력 등으로 채워질 수 없습니다. 그곳은 하나님의 자리이며, 하나님과 교제함으로 온전히 메꾸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그의 <고백록>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오 하나님, 내 영혼이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얻을 때까지 나의 인생에는 진정한 휴식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만의 신을 경배합니다. 어떤 사람은 끊임없이 소유하려 합니다. 어떤 사람은 쾌락을 추구합니다. 어떤 사람은 힘과 권력을 자랑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부를 자랑하기 위해 온 몸을 값비싼 보석으로 치장하거나 분에 넘치는 차량을 소유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행위들은 하나님을 인정하는 또 다른 방식입니다.

[1:18-23] 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19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2) 그리스도의 대속과 죽음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기 직전 성만찬을 행하셨습니다. 포도주와 빵을 주님의 살과 피라고 말씀하시고, 그것을 기념하라 하셨습니다. 우리는 참 만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마심으로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생명의 떡으로 소개하셨습니다.

[6:32-35]

3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33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34 그들이 이르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3) 그리스도와의 연합

세 번째 의미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입니다. 예수님은 친히 자신의 피값으로 교회를 사셨습니다. 죄인들을 구원하시고 교회로 삼으셨습니다. 교회는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성도는 몸의 지체로서 서로 연결, 또는 연합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포도나무와의 연합을 통해 우리의 영적 생명의 예수님과 연합을 통해 가능하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15:4-5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해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 12:27)라고 역설(力說)했습니다. 에베소서에서는 머리되신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가야 하며,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그 몸을 자라게 한다고 표현합니다.(4:14-16)

3. 성도와 성도간의 교제

마지막으로 성도와 성도간의 교제가 있습니다. 성도간의 교제는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을 전제로 합니다. 성도를 서도를 사랑하고 도움으로 교제합니다. 각자 받은 은혜를 나눔으로 성령 안에서 교통합니다. 종교개혁 시대에 쓰여진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제55문에 성도의 교제를 설명합니다.

55당신은 성도의 교제란 말에서 무엇을 이해합니까?

첫째믿는 모든 각 사람은 그리스도의 지체이기 때문에 그와 그의 모든 부요와 은사에 공동의 참여자라는 것입니다둘째각 신자는 자신의 은사를 다른 지체들의 유익과 구원을 위하여 기꺼이 사용하는 것이 의무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교의 교제의 핵심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아낌없이 사람들을 위하여 내어줌 같이 성도들도 슬픔과 기쁨을 함께 나누며, 서로를 위해 희생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교제는 생명의 나눔이며, 사랑의 교환이며, 소망의 연대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교회에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12:15) 요한사도는 요일 3:16에서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할 근거를 예수님의 대속 사역에서 찾습니다.

요일 3: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교회는 서로 연합되어 있고, 한 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전 12:26에서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라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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