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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 엔도 슈사쿠

샤마임 2020. 7.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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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엔도 슈사쿠

 

인자의 길이란 필시 나를 버리는 것. ()란 말이오, 쓸데없이 종파에만 사로잡힌 것을 말하오. 인간을 위해 뜻을 다하려면 부처님의 진리에나 가톨릭의 교리에만 구애되지 않아야 할 것이요.<엔도 슈사쿠 침묵중에서>

 

미리 말하지만 필자는 일본 전문가는 아니다. 엔도 슈사쿠의 전문가는 더더욱 아니다. 그러니 애써 논증하거나 비평하려는 생각은 없다. 그러나 사와노와 페레이 신부를 설득하러 왔던 통역사가 버리라고 했던 의 입장에서 엔도의 바보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는 지금으로부터 32년 전부터 일본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고등학교 2차 외국어를 일본어로 택한 것을 계기로 일본어에 몸을 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기초회화 수준을 좀처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일본을 더 알고 싶어 일본 역사 서적을 읽었다. 하지만 시대구분도 하지 못하는 초짜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엔도 슈사쿠에 대한 지식 역시 그 외의 일본에 대한 지식처럼 상식의 선을 넘지 못하는 초짜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아내의 엄청난 압박과 핍박?이 아니었다면 이 글은 시작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바보>를 다 읽었을 때 아내에게 한 마디 했다.

 

내가 읽을 책은 아니네

 

아내는 한사코 내가 생각하는 <바보>에 대해 호기심을 놓지 않았다. 이틀 전, 그러니까 책을 다 읽고 서평을 쓰지 않을거라 선포하던 그 날. 아내는 다시 책을 읽고 난 느낌을 물었다. 단지 이 책을 어떻게 생각해라는 질문으로 나의 심기를 건드렸다. 무심하고 무뚝뚝한 말로 전형적인 일본 사람의 사고다라고 일러 주었다. ‘그게 뭔데아내의 질문을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이야기는 문학이 아닌 신학적 논쟁으로 확장되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난 목사니까. 나는 <바보>에서 이란 단어에 주목했고, 이 단어야 말로 일본의 전형적인 속성이라고 말했다. 어설프지만 4년 동안 선교학을 전공한 나에게 일본이란 단어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모든 것은 다 받아들이면서도, 그 어떤 것도 자신들의 것으로 변형시키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하는 이들이 바로 일본인들이기 때문이다. 난 아직도 일본인들의 신앙을 의심한다. 가면인지 진실인지 말이다. 엔도 슈사쿠의 <바보>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 어떤 선입관도 편견도 없이 곧장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제목에서부터 왠지 불편했다. 정확하게 번역하면 바보님이나 위대한 바보정도로 했어야 바른 번역인데 곧장 바보로 번역한 것이 영 마뜩찮았다. 오해는 번역의 후기에 가서야 풀렸다.

 

그때 바보라는 명칭에는 애정과 안쓰러움,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늘 이재(理財) 만을 따지려는 자기 자신과 세상의 작태를 은연중에 비판하는 의미 등이 혼재되어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의미를 지닌 오바카상을 적절한 우리말로 옮기는 일부터 역자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바보 선생님’ ‘위대한 바보등의 역어는 어떨까 생각하다가 결국은 바보로 번역하기로 했다.”

 

이재에 밝지 않고, 자신보다 타인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는 바보가 바로 <바보>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가스통의 이미지다. 아내는 바보의 이미지에서 임재를 연상했고, ‘하나님은 바보처럼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위해 살아가고 언제나 함께 한다고 말했다. 임재를 부인하지 않으나 엔도 슈사쿠의 임재는 범신론적이다. 범신론적 성향은 엔도 슈사쿠 뿐 아니라 전형적인 일본인들의 성향이라고 나는믿는다. 그렇기에 아내의 질문에 전형적인 일본 사람의 사고(思考)’라고 말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정의는 상당히 왜곡된 것이며, 편협적이다. 기타모리 가조의 <하나님의 아픔의 신학>에서 보이듯 임재를 범신론적으로만 해석하는 것은 너무 많은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럼에도 나의 쏠림현상을 어찌 막을 돌리가 없어 보인다.

 

아내가 읽은 임재범신론적으로 해석하는 이유는 바로 때문이다. 엔도 슈사쿠의 범신론은 스피노자의 범신론과는 사뭇 다르다. 엔도의 범신론은 기존의 범신론과 다르게 휴머니즘으로 회귀한다. 바로 이 부분이 일본적 범신론의 정점이다. <침묵>에서 통역자가 했던 그 말, ‘나를 버리라는 곧 참 인간이란 종교의 교리를 버림으로 완전한 인간이 될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 가능하다. 무엇인가에 구애되지 않지 않는 것, 모든 경계와 구분을 허물고 오직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것, 내가 보기에 그것은 정확히 이다.

 

역자인 김승철 교수는 <바보>를 이렇게 정의한다.

 

“<바보>는 자기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주는 신의 사랑과 인간에 대한 연민이라는 엔도 자신의 문학적 테마를 대중소설적인 필치로 그려낸 장편소설이다. 동시에 <바보>중간문학이라고 불리는 엔도의 작품들이 탄생하는 신호탄이 된 작품이기도 하다.”

 

여기서 주목할 단어는 중간소설이다. 중간소설이란 평범한 일본인들의 일상에서 일본인의 얼굴을 하고 있는 익명의 그리스도를 그려내는 작업’(345)이다. 아내가 주목했던 임재이다. 엔도의 책은 단 세 권의 책 밖에 읽지 않는 필자에게 김승철 교수의 정의는 <바보>의 마지막 장면이었던 늪 지대에서 사투를 벌인 안개 낀 그 날과 닮아 있다. 엔도의 글을 충분히 읽지 못한 체 뭔가를 써내야 하는 고뇌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바보>는 나폴레옹의 후손인 가스통 보나파르트이 일본에 오면서 시작된다. 잔뜩 환상에 젖어 기다리던 도모에는 시작부터 실망한다. 가스통은 보통 사람은 알지도 못하는 사등칸에 있었고, 철저히 무능하고 바보 같은 존재였다. 도모에와 그녀의 오빠 다카모리는 예의상 환대해 주지만 가스통은 제발로 집을 나선다. 잠깐 외출하다 만난 유기견에게 나폴레옹이란 조상의 이름을 지어준다. 나폴레옹과 가스통은 어둡고 칙칙한 도시의 뒷골목을 전전한다. 도움을 받은 여인이 소개해준 점쟁이 집에 머물다 엔도라는 폐병에 걸린 살인청부자의 손에 붙들린다. 엔도는 가스통을 이용해 자신의 형을 모함해 죽게 만든 두 명의 상관을 죽이려고 계획한다. 그러나 가스통의 방해로 두 명 모두 놓친치면서 소설은 끝이 난다. 늪에서 공간에서 말이다. 안개가 자욱한 늪은 지정학적 공간으로서의 의미를 넘어 엔도 슈사쿠, 아니 일본적 범신론의 상징이다.

 

가스통은 도모에와 다카모리의 환대를 벗어나 스스로 칙칙한 인간의 내면으로 걸어 들어간다. 죄인 또는 위험인물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잔다. 그들을 도와주기도 하고, 그들에게 이용당하기도 한다. 그들은 쓸모없는 인간들이다. 열등한 사람들을 직면한 가스통은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어떤 사람도 의심하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일은 사람을 믿는 일’(124)이기 때문이다. 잘 곳 없는 가스통을 받아준 조테이 노인의 입술은 가스통의 다짐에 힘을 실어 준다.

 

그대로 밑바닥에 사는 사람들은 아직도 사람을 믿지. 자네를 어제 이곳으로 데리고 온 여자들도 비록 몸을 팔거나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치기도 하지만 그 뿌리는 바보여도 심성은 좋은 사람들이야.”

 

엔도의 시각은 가스통을 바라보는 시각, 또는 가스통을 통해 듣게 되는 음성을 통해 드러난다. 구원 받아야할 존재들인 죄인들은 착한 사람들이다. 가스통은 그들을 구원하러 가지 않았고, 구원하지도 않는다. 다만 그들을 믿고, 그들이 스스로를 믿도록 돕는다. 살인청부업자 엔도에게서 벗어났지만 다시 엔도에게 돌아가면서 가스통은 도모에에게 자신을 바보 겁쟁이라고 말한다. 무섭지만 끝까지 엔도 안에 있는 착함을 믿은 바보이고, 동시에 그를 무서워하는 겁쟁이인 것이다. 도모에는 바보 같은 가스통을 보면서 드디어 다른 바보가 있다는 것에 희미한 각성이 일어난다.

 

처음으로 도모에는 우리 인생에서 바보와 위대한 바보라는 두 가지 말이 어떻게 다른지 알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꾸밈없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꾸밈없이 모든 사람을 믿으며, 비록 자기가 속고 배반을 당해도 그 신뢰와 애정의 등불을 계속해서 지켜나가는 사람, 그 사람은 요즘 세상에서 바보로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단순한 바보가 아니다. 위대한 바보인 것이다.”(254)

 

도모에의 각성은 가스통의 존재를 부각시키기보다 자신의 각성이다. 즉 도모에는 자신을 구원한다. 가스통은 다만 도모에의 내면에 은닉된 구원을 확인시켜 줄 뿐이다. 다카모리는 동생인 도모에게 가스통을 이렇게 이야기 한다.

 

그렇게 약하고 겁쟁이인 남자가 자신의 약함을 짊어지고서 열심히 아름답게 살려고 하는 건 훌륭하지 않을까?”(263)

 

다카모리의 증언은 정확하게 사람을 끝까지 믿으려는 가스통의 다짐을 관통한다.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 엔도 슈사쿠의 늪은 범신론적 인본주의다. 성서의 예수는 땅에 있는 죄인들을 구원하고, 그들을 하늘로 이끌기 위해 땅에 내려갔다. 하지만 가스통은 구원하지도 아니며, 그들을 교정하지도 않는다. 그냥 함께 한다. 그들과 동일한 공간에 존재하며 교류함으로 그들 안에 있는 참인간을 깨우친다. 구원은 그들 안에 이미 있다. 후미에를 밟았지만 여전히 그리스도인이라고 정의하는 <침묵>과 결코 다르지 않은 것이다.

 

가스통은 졌다. 분명히 졌다. 졌기 때문에 이긴 것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당신은 연약한 인간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죄를 지었다. 그렇기에 당신은 죄가 없다. 그가 고바야시 같은 전범이라고 할지라도. 그는 엔도에게 일격을 가함으로 복수의 복수를 단행하려 했지만 가스통의 만류로 포기하고 짙은 안개 사이로 자신의 몸을 숨긴다.

 

가스통은 왜 일본에 왔을까? 도모에와 다카모리는 물도 또 물었다. 그들 자신에게도, 가스통에게도 물었다. 답은 없다. 가스통은 사라졌다. 어쩌면 가스통은 유령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다카모리는 가스통이 그리워 가스통을 잠깐 재워준 가짜 점쟁이 조테이 노인을 찾아간다. 노인은 여전이 어두운 촛불 밑에서 등이 굽고 아이를 등에 업고 있는 여인의 손금을 보고 있다. 가스통은 도대체 어디로 간 걸까? 엔도 슈사쿠는 다카모리의 입을 빌려 이렇게 중얼거리며 소설을 닫는다.

 

가스통은 살아있다. 그는 저 멀고 먼 푸른 나라에서, 사람들의 슬픔을 자신의 등으로 지기 위해 어슬렁어슬렁거리며 다시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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