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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신경 강해] 7.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샤마임 2020. 7. 11.

[사도신경 강해] 7.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마태복음 28:1-10

 

사람들은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항상 삶에 종속되어 살아갑니다. 우리는 죽음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경험하고 싶어도 경험할 수 없는 것이 죽음입니다. 죽음은 단회적이기 때문에 경험될 수 없습니다. 논리적으로, 경험적으로 죽음은 끝이기 때문에 그 이후의 세계에 대해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활은 다른 기적보다 더 큰 기적이며, 인간의 지성으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부활은 오직 믿음으로 가능하며, 믿음은 성령께서 우리의 심령에 오셔서 주님께서 하신 일들을 믿어지게 합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부할을 되짚어 보면서 우리의 신앙고백이 무엇인지 점검해 봅시다.

 

1. 초대교회의 시작은 부활이다.

 

우리가 알고 있고, 믿고 있고, 고백하는 믿음의 전제는 부활에서 시작됩니다. 논리적 순서에 따라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 그리고 성육신과 고난, 십자가의 죽으심 이후에 부활이 옵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은 부활로부터 시작하며, 부활을 통해 모든 신앙고백을 받게 됩니다. 교회의 시작은 부활과 오순절 성령 강림을 통해 일어납니다. 주님은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게 되면, 부활의 증인이 될 것으로 약속하셨습니다.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사도행전 232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사도행전 315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

사도행전 1041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 그를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

 

우리가 지키는 주일은 유대인들이 지키는 토요일, 안식일이 싫어 일요일로 대체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이 안식 후 첫날, 즉 일요일이기 때문에 그날을 기념하여 초대교회가 지킨 것입니다.

 

2. 부활은 하나님의 창조적 능력이다.

 

우리를 부활을 묵상하면서 한 가지 중요한 사건으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그것은 부활은 하나님의 창조적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우리가 부활을 이해할 때는 바로 하나님의 창조적 능력에대해 믿음을 가질 때 가능합니다. 바울은 이 부분을 정확하게 간파하고 이렇게 선언합니다. 좀 길지만 함께 읽어봅시다.

 

[4:17-25]

17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9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22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23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24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25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3. 부활의 의미

 

마지막으로 부활의 의미를 살펴봅시다. 저는 처음 믿음 생활을 시작할 때 왜 십자가 만으로 부족할까?’ ‘부활이 있어야 하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때는 부활이 정말 이상했습니다. 그런데 부활이 있어야 진정한 복음이 됩니다. 왜냐하면 부활은 십자가의 죽음의 목적을 성취하는 사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구약 성막에서 드렸던 제사의 의미를 살펴봅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셔서 백성으로 삼습니다. 그 다음 계명을 주십니다. 계명은 순종하면 생명이 되지만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게 되는 이중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완전하게 계명을 지킬 수 없습니다. 문제는 여기서 부터 시작됩니다. 만약 율법이 100가지가 있다면 99가지는 잘 지켰고, 지금까지 어긴 적이 단 한도 없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런데 딱 한 가지, 아주 작아 보는 계명을 어겼습니다. 그럼 어떻게 될까요? 용서가 되나요? 아뇨. 안 됩니다. 그는 반드시 계명을 어겼기 때문에 그로 인해 저주를 받아야 합니다. 바울은 이 부분에 대해 갈라디아서 3:10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3: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모든 일즉 모든 계명을 항상행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게 됩니다. 그러니 율법이 얼마나 무섭고 두렵습니까? 이렇게 생각하면 새언약, 복음의 시대를 살아가는 저희들은 얼마나 큰 행운아인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죄를 지으면 끝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비록 불완전하지만 구약의 율법 속에 다시 회개할 수 있도록 장치를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구약의 성막 제사입니다. 성막의 제사는 몇 가지의 의미를 갖지만 핵심은 죄사함입니다. 누군가 죽을 만큼의 죄를 짓지 않았다면 제물을 가지고 성막에 옵니다. 그 다음 제물에 안수를 하고 제물의 각을 뜹니다. 제사장은 피를 받아 제단에 뿌리고, 제물의 전부 또는 일부를 제단 위에 불사릅니다. 이렇게 하면 죄사함을 받습니다. 죄사함을 받으면, 그는 죄가 없는 것처럼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생활합니다. 즉 살게 됩니다. 이것이 부활의 의미입니다.

십자가가 우리의 죄를 대신해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이라면, 부활은 부활을 통해 새로운 삶,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부활은 십자가의 완성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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