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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성경으로 / 레이첼 헬드 에반스 / 칸앤메리 옮김 / 바람이불어오는곳

샤마임 2020. 4. 29.

다시 성경으로

레이첼 헬드 에반스 / 칸앤메리 옮김 / 바람이불어오는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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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읽기가 두려웠다. 성경의 실체가 폭로될까 봐 노심초사했다. 성경을 수메르 신화에서 베낀 것이라며 주장하는 이들에게 저주스러운 댓글로 폭격했다. 성경을 비평적으로 바라보는 이들에게 날을 세워 공격했다. 그건 두려움이었다. 그 두려움의 기저(基底)에는 내 스스로 성경에 대한 확신이 완전히 파괴될지 모른다는 불안이 깔려 있었다. 만약 지금 성경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린다면 살아갈 이유와 목적을 상실할 것 같았다. 그래서 더 발악했고,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그러나 이미 난 성경에 대한 회의를 시작했다. 이미 선미는 침수가 시작되었는데 애써 인정하고 싶지 않아 구명정에 오르지 않는 어리석음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두려움은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던 것일까? 기억의 필름을 거꾸로 돌려 보았다.


스물일곱이란 늦은 나이로 대학교에 들어갔다. 꿈만 같았던 신학교 강의들은 천사들의 합창 소리 같았다. 그러나 호기심에 읽기 시작한 주석과 성경 연구 논문들은 기존의 성경관과 신앙관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성경은 수정되었다. 누군가에 의해 편집되고 교정되었다. 수메르 신화의 것을 베끼고 수정해 사용했다. 는 등의 수많은 내용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침에 밥을 먹고 도서관에 올라가 하루 종일 책만 읽었다. 그런데 점점 책을 읽기가 힘들어졌다. 두려웠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었던 성경이 누군가에 의해 편집되고 수정되었다니. 모세오경을 모세가 쓰지 않았다는 말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그러고 보니 신명기에 모세가 죽었다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그래 죽은 모세가 어떻게 죽음 이후의 일을 기록할 수 있겠는가. 고개는 끄덕였지만 두려움은 더욱 확장되고 증폭되었다. 공황장애가 일어나듯 성경 장애가 일어났다. 그리고 그것 미친 듯이 부정하고 아니라고 우격다짐으로 밀어붙였다. 당시 부산의 ㅅ교회 전도사로 있었다. 유초등부 부장 집사님이 궁금하다며 마태복음 1장의 족보에서 몇 사람이 빠져 있고, 누군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누락되었다고 말했다. 처음 듣는 소리였다. 설마? 성경인데? 정확무오, 문자적 영감에 의해 기록된 오류 없는 성경이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그 다음날 곧바로 도서관에 달려가 마태복음 주석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사실이었다. 성경은 오류투성이고, 수많은 사본들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은 많은 사본들을 짜깁기해 만든 것이며, 한글로 번역하는 과정 속에서도 많은 번역상의 오류와 왜곡이 일어났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말이다. 그 후 2년 정도는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물론 성경 읽기와 신학서적 읽기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무덤 같았던 2년의 시간이 흘러 ‘다시 성경으로’ 돌아왔다. 아니 더 많은 시간 동안 고민하고 조심스럽게 성경을 읽어 나갔다.


저자인 레이첼은 필자와 다른 듯 비슷한 시간을 지나쳐 왔다. 아직 회심(?)의 여정을 담은 『교회를 찾아서』(비아)는 읽어 보지 않아 정확한 내력을 알지 못하나 여기저기 흩어진 저자의 고백을 담은 고백들을 추려보면 다시 교회로 그리고 성경으로 돌아오기는 쉽지 않았다. 다시 성경으로 돌아왔을 때, 그 감격을 잊을 수가 없다. 과학적이고 역사적인 관점에서 성경을 읽으려 했던 고지식한 편견을 내려놓자 성경은 그 어떤 드라마나 영화보다 흥미로웠다. 저자인 레이첼 역시 ‘다시 성경으로’ 되돌아왔을 때 ‘매혹적인 성경의 참모습을 발견’(29쪽) 했다고 말한다. 그렇다! 성경은 ‘매혹(魅惑)’적인 책이다. 저자는 말한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문자적이고 편협적인 시각에서 벗어난다면 성경은 매혹적이며, 유익한 책이 된다고.


“우선, 나처럼 보수적인 복음주의 배경에서 자랐지만 자신이 배운 성경과 실제 성경 간의 큰 차이를 발견하고 그 사이에서 길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이들. 그다음은 현재의 나처럼 진보적인 전통을 가진 교회에 속했지만 예배 시간에 사용되는 말씀의 배경과 의미, 내용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한 걸음 더 들어가서 살펴보기 원하는 이들. 아무쪼록 독자가 엄격한 문자주의와 지나친 자유주의 양쪽을 모두 지양하고 말씀 그대로를 이해하려고 할 때 성경이 얼마나 매혹적이고 사실적인지 경험하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31쪽)


그렇다. 성경을 매혹적이다. 그렇게 되기까지 넘어야 할 회의의 강은 너무나 깊다. 일반 기독교인들이 알고 있는 성경은 처음부터 삶과 격리된 것이다. 우격다짐으로 점철된 가르침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사유할 틈을 주지 않음으로 성경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갖지 못하게 했다. 그러다 갑자기 맞닥뜨린 성경의 민낯은 공포와 두려움을 가져다준다. 아이를 낳는 산고의 고통이 지나면 새 생명을 맞이하는 기쁨에 휩싸이듯 회의와 번뇌의 산을 넘으면 모호함 속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그리 길지 않다. 8개의 장으로 8개의 주제를 풀어낸다. 어쩌면 그것은 주제라기보다는 난제이다. 첫 장 ‘기원 이야기’는 나라를 잃고 바벨론에 유배된 유대인들의 관점에서 진행된다. 우주의 중심이며, 신 중의 신으로 알려진 여호와의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는 나라에 패하여 포로로 끌려오다니. 그는 곧장 그들이 섬긴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누구신가 묻는다. 고난은 삶에 질문을 던진다. 유대인들은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야 만했다. 수많은 질문은 그동안 등한시했던 성경을 탄생시킨다. 그러니까 성경은 무정한 어떤 창조주의 객관적 서술이 아니라 삶의 맥락에 임하신 하나님의 계시인 것이다. 마치 ‘시계 추처럼 믿음과 의심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54쪽) 삶의 정황 속에서 성경은 빚어진 것이다.


“성경을 읽는 것은 학회에 초청받는 것이 아니라 링 위에 오르는 것이다. 하나님은 긴 세월 내려온 생생한 대화의 장으로 우리를 초대하셨다.”(75쪽)


그렇다!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회의와 믿음의 끊임없는 고지 싸움이다. 그러니 골치 아플 수밖에. 성경을 읽지 않았다면 간파할 수 없는 깊은 고뇌의 열매들이 각 장마다 스며있다. 3장 전쟁 이야기에서 신앙적으로 회의에 빠질 때 가장 힘든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그가 속했던 ‘공동체와 격리되는 느낌’(133쪽)이다. 괜찮다고 말하면 모든 것이 잘 흘러 가는 듯하다. 그러나 거짓된 자아에 함몰되어 자기를 잃을 것이다. 저자는 결국 교회를 떠났다. 아니 의심을 병든 사람 취급하는 공동체를 떠났다. 그리고 과감하게 광야로 들어갔다. 이 책은 광야의 씨름을 통해 얻은 통찰들이다.


답을 주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과도한 상상력에 익숙지 않아 몰입감이 떨어지는 부분이 몇 곳도 있다. 용두사미처럼 흥미진진한 도입에 비해 결미는 밋밋한 곳도 발견된다. 필자가 보기에 이 책은 명징한 결말을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라 고뇌의 과정, 회의의 여정 속으로 끌고 가려는 의도가 강하다. 5장 저항의 이야기는 예언자들을 괴롭히는 용과 짐승이 누구인지 그려낸다. 용과 짐승은 조직이고, 편협한 시각이며, 편리함에 안주하려는 상상력이 결핍된 신앙이다. 예언자들은 이러한 악들에 저항한다. 예언자는 ‘광야’에 산다. 광야는 답이 없다. 끊임없는 질문만 있다. 그렇기에 광야는 모든 기만과 술수를 제거한다.


말로 정확하게 짚어내기 힘든 여성성이 불편하게 느껴질 때도 있고, 맥락을 뛰어넘는 듯한 과도한 상상력 때문에 몰입을 방해한다. 아마도 이러한 불편함은 필자가 보수적 한국 장로교단의 목사이기 때문일 수도 있고, 저자가 보수적이지만 독립성과 자율이 현격한 미국인일 수도 있다. 그러나 가끔씩 만나는 명문장은 깊은 샘에서 길러낸 생수처럼 시원하게 한다. ‘바람이불어오는곳’이란 이름을 가진 출판사의 처녀 출항이다. 멋진 표지 디자인과 군더더기 없는 명징한 번역은 독자들을 충분히 즐겁게 한다. 부디 멋진 항해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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