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독교 고전 읽기] 장 칼뱅의 생애(Jean Calvin, 1509~1564)

샤마임 2020. 4. 19.

장 칼뱅의 생애(Jean Calvin, 1509~1564)

 

1. 들어가면서

 

의심할 여지없이 16세기 프로테스탄트 신학을 집대성한 인물이야말로 장 칼뱅이다.”

교회사가인 유스토 L. 곤잘레스의 칼뱅에 대한 정의입니다. 아무도 곤잘레스의 정의를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칼뱅은 초기 종교개혁가에 속하지만 1세대보다는 성숙한 신학의 완성도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러한 완성도는 칼뱅이 종교개혁의 영향 아래서 여러 개혁가들의 영향을 받았다기보다는 칼뱅만의 독특한 성향 때문으로 보입니다. 치밀하고 침착한 성향과 인문학과 법률을 공부한 덕분에 조직신학적 소향을 충분히 갖추게 됩니다. 루터와 츠빙글리처럼 초기 개혁가들이 아닌 덕분에 그들의 논문들과 서적들을 통해 종교개혁의 정신을 충분히 숙성시킬 수 있는 시간과 여유를 가졌습니다. 전반적인 신학 사상은 츠빙글리와 많이 닮아 있지만 칼뱅 자신이 밝혔듯 루터의 지대한 영향 아래 있었습니다. 그러나 감성적인 루터와 다르게 냉철한 성향은 루터의 모호한 신학을 명료하게 정리했고, 무모한 루터의 해석을 벗어나 성경을 보다 객관적이고 인문학적 관점에서 해석합니다.

 

루터가 비록 존 위클리프와 얀 후스의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홀로 성경을 연구하고 터득하는 과정은 번민과 고통의 시간이었습니다. 결국 루터는 위클리프와 후스의 손을 잡았고, 그들의 뒤를 걸어갔습니다. 이러한 상황들은 루터로 하여금은 그의 모든 신학 사상이 칭의에 함몰될수 밖에 없게 했습니다. 엄밀하게 루터는 신학적으로 가톨릭을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특히 그의 풍부한 감성은 중세적 신비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루터와 츠빙글리의 영향을 받을 칼뱅은 보다 론리적이고 객관적으로 성경을 해석했고, 칭의가 아닌 성화론에 눈을 돌려 삶으로서의 신학을 주장하기에 이릅니다. 기독교강요로 대변되는 칼뱅의 신학은 삶을 빠뜨리고는 절대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이제 칼뱅의 생애를 간략하게 살펴본 다음 차근차근 칼뱅의 중요한 논문과 서적들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 칼뱅의 간략한 생애

 

1509710, 프랑스의 피가르디의 조그만 감독 교구인 노용에서 장 칼뱅은 태어납니다. 본명은 장 코뱅(Jean Cauvin)이었습니다. 셋 또는 네명의 형을 두고 막내로 태어난 칼뱅은 어린 시절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칼뱅 자신이 자신의 과거를 회고하거나 추억하는 이야기를 한 적이 없는데 주변 사람들도 칼뱅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때는 루터가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첫 번째 강의를 마친 직후였습니다. 아버지 제라드 코뱅은 1481년 누아용으로 이사 왔습니다. 그곳에서 시민권을 획득했고, 시청직원과 주교 법률 고문과 비서를 거쳐 교황청의 공증인과 대성당 참사회에서 일합니다. 어머니는 귀족의 딸이었는데 칼뱅을 낳고 5살 즈음에 죽게 됩니다. 칼뱅의 아버지는 곧바로 재혼을 합니다. 재혼한 아버지는 두 명의 딸을 더 낳습니다. 형 샤를은 사제가 되었지만 이단 혐의로 파면을 당해 죽임을 당합니다. 다른 형제인 앙투앙은 후에 종교개혁에 동참하여 여동생 마리와 함께 칼뱅을 따라 제네바에 정착합니다. 앙투앙은 제네바에서 서점을 운영하며 시민권을 획득합니다. 후에 200인 의회의 의원과 60인회의 의원, 그리고 종합구빈원의 감독관에 선출되기도 합니다. 칼뱅의 아버지는 귀족가문인 몽모르 집안으로 칼뱅을 보내 교육을 받게 합니다. 아버지는 칼뱅을 사제로 키우기 위해 필요한 교육을 시키려 했습니다. 고등교육을 받을 나이인 열두 살에 파리 대학으로 유학을 보냈고, 그곳에서 인문과정을 마치고 석사학위를 취득합니다.

 

당시 파리대학도 에라스무스의 인문학 영향을 받아 기존의 가톨릭 신학을 벗어나 인문주의적 성향의 학문과 신학을 접목하여 공부하게 됩니다. 당시 이곳은 종교개혁의 바람이 불어 존 위클리프와 얀 후스, 마르틴 루터의 등의 신학적 주장들에 대한 논쟁들이 왕성하게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칼뱅인 아직까지 가톨릭 미신에 흠뻑 빠져있었지만 충분히 종교개혁 사상을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1528년 칼뱅은 문학 석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바로 이때 아버지는 아들에게 신학의 길을 포기하고 법률계로 나아가도록 종요하게 됩니다. 칼뱅은 1528년부터 1533년 즈음에 부르쥬와 오를레앙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하고 법률사무소를 개업하기 위한 자격 취득을 합니다. 당시 가장 유명했던 피에르 데 레스톨과 안드레아 알치아티 등에게 교수를 받습니다. 그러나 칼뱅은 법률에는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법률사무소를 개업하기 위한 준비를 하는 과정 속에서 인문학을 놓치지 않았고, 1532년 사뭇 진지하고 깊이 있는 세네카의 관용론을 출판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가 관용론을 출판하기 한 해 전인 1531년 칼뱅의 아버지는 숨을 거둡니다.

 

파리로 온 칼뱅은 프랑스 이름대신 라틴어 이름을 사용합니다. 코뱅이 아닌 칼뱅으로 바꾸어 부르기 시작합니다. 마르슈대학에서 모르디에를 만나 라틴어 실력을 세밀하게 다듬게 됩니다. 얼만 칼뱅은 마르슈대학을 떠나 몽테귀대학으로 학교를 옮깁니다. 바로 이때 개혁신앙을 받아들인 탓에 스트라스부르로 피신한 사촌 로베르 올리베탕과 연락을 하게 되고, 그 즈음에 아버지의 강요에 의해 신학에서 법학으로 옮겨갑니다. 1533년 리콜라 코프의 팔복에 대한 설교에 연루되어 칼뱅은 프랑스 남부 생통주 지방의 앙굴렘에 있는 친구의 집으로 피신을 합니다. 큰 서재가 있었던 덕분에 칼뱅은 이곳에서 기독교 강요 초판을 출판하기 위한 작업을 하게 됩니다. 결국 파리의 상황은 더욱 나빠졌고, 칼뱅과 친구 뒤 티에는 1535년 바젤로 피신합니다. 1년 뒤인 1536년 바젤에서 기독교 강요초판을 출간하게 됩니다. 칼뱅은 스스로 저술활동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하려는 소명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1년 동안 그동안 체득하고 깨달은 성경 지식들을 명료하게 정리하여 한 권의 책으로 담아낸 것이 기독교 강요초판입니다.

 

칼뱅이 기독교 강요를 통해 기독교 신앙 전체에 대한 요약과 당시 긴박했던 신앙의 논쟁들을 어느 정도 담아내려고 했었습니다. 결국 칼뱅의 수고를 통해 1536년 바젤에서 종교개혁의 신학적 완성이라 할 수 있는 첫 발걸음을 내딛게 됩니다. 516페이지에 그리 크지 않은 책으로 모두 6장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처음 4장은 율법, 신경, 주기도문, 성례 등이 포함되어있고, 마지막 2장은 로마가톨릭의 잘못된 교리를 비판하고 신앙의 자유의 문제를 다룹니다. 기독교 강요는 출판되자마자 적지 않은 반향을 일으켰고, 9개월 만에 모두 판매될 만큼 당시로서는 화제가 되었습니다. 칼뱅인 초판을 다듬고 또 다듬어 3년 후인 1539년 초판처럼 라틴어로 제2판을 스트라스부르그(STRASBOURG)에서 출간합니다. 2년 후인 1541년에는 제네바에서 프랑스어로 된 초판을 출판합니다. 그 이후 기독교 강요는 라틴어와 프랑스어가 함께 출판됩니다. 1559년 최종판이 출간되어 현재 우리가 읽는 기독교 강요가 완성됩니다. 처음 6장으로 된 기독교 강요는 최종판에서는 4권에 80장까지 확장 증보됩니다. 종교개혁 시기의 완성도 높은 조직신학이 칼뱅에 의해 출간된 것입니다.

 

바젤에서 더 이상 머물 수 없다는 판단에 이르자 칼뱅은 스트라스부르그로 갈 계획을 세우고 길을 떠납니다. 하지만 스트라스부르그로 가는 길은 스페인과 프랑스가 전쟁을 하는 바람에 길이 막혀 제네바로 우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칼뱅은 제네바에 하루 머물고 다시 길을 떠날 작정이었습니다. 당시 제네바는 가톨릭에서 막 벗어나 종교개혁을 시도하고 있었지만 지도자가 없어 총체적 난국에 빠져 있었습니다. 도시는 상업이 발달한 덕분에 근대적 정신이 어느 정도 수용되는 분위기였지만 도덕적 타락은 막을 수 없었습니다. 윌리엄 파렐은 수년 동안 제네바에 머물며 열정적인 설교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을 종교개혁의 영향 아래 들어오게 했습니다. 제네바가 종교개혁에 동참한 이유는 종교개혁 정신이나 신학 때문이 아니라 가톨릭의 부당함과 반감 때문입니다. 종교개혁을 시작했지만 아무도 이끌고 갈 지도자가 없었고, 시민들도 종교개혁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누군가가 기독교 강요를 쓴 칼뱅에 제네바에 하루 머문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고, 파렐은 소식을 듣자마자 곧바로 칼뱅에게 달려갑니다. 젊고 박식한 칼뱅은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주도할 적임자로 판단한 것입니다. 칼뱅은 극성스러운 종교개혁가가 아니라 고상한 저술활동을 기대한 상태였기 때문에 파렐의 청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습니다. 열정은 있었지만 동역자를 찾지 못한 파렐에게 칼뱅은 놓칠 수 없는 소중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최선을 다해 종교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칼뱅에 제네바에 머물러야 하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칼뱅은 자신보다 15살이나 많은 파렐을 함부로 거절할 수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수락하지도 않았습니다. 칼뱅이 수락할 기미가 보이지 않자 파렐은 화가 나서 협박하는 수준까지 나아갑니다.

 

만약 당신이 당신을 이토록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위급한 상황을 못 본 척 하고 단지 학문만을 위한 평온을 찾는다면 하나님께서 그대의 평화에 저주하시길 원한다.”

 

칼뱅은 두려움을 느꼈고, 충격을 받습니다. 결국 스트라스부르그로 가려는 발걸음을 멈추고 제네바에 머물게 됩니다. 추방과 귀한이 그의 생애에 일어날 터이지만 아직 칼뱅은 파렐과 함께 제네바에 머무는 것으로 자신의 소임을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칼뱅은 처음부터 종교개혁을 주도할 마음은 조금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명석한 두뇌와 뛰어난 신학적 소양, 법률가로서의 명석함은 탁월한 지도자로 세워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제네바 시민들은 종교개혁을 할 만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칼뱅에 의해 주도된 종교개혁은 가톨릭에 대한 반감으로 종교개혁에 몸을 담았던 부유한 사람들에게 피곤함을 선사했습니다. 결국 많은 사람들이 중상모략을 통해 두 사람을 추방하게 만듭니다. 칼뱅은 서글퍼하지 않고 처음 가졌던 저술가로서의 삶을 다시 허락하셨다는 하나님의 뜻으로 받고 곧바로 짐을 챙겨 제네바를 떠나 스트라스부르그로 출발합니다.

 

스트라스부르그에 도착한 칼뱅은 생활의 안정을 도모했지만 그곳에 있던 마르틴 부서는 칼뱅에 목회의 사역을 맡깁니다. 비록 바쁘고 피곤한 일상이 이어졌지만 가장 안정적인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일부 시편들과 찬송을 프랑스어로 번역했고, 종교개혁에 합당한 예배의식을 만들었습니다. 이곳에서 다시 기독교 강요2판을 출판하고, 로마서 주석도 출간한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곳에서 과부였던 이델렛 드 뷰어와 결혼합니다. 아쉽게도 칼뱅의 아내는 1549년 제네바로 귀한한 후 먼저 사망합니다. 결혼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결혼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결혼한 후 칼뱅은 깊은 애정관계를 유지했고, 사별한 후에도 관계를 그리워합니다. 스트라스부르그에서 머물렀던 1538년부터 1541년까지는 칼뱅에게 있어 가장 행복하고 안정적인 시기였습니다.

 

1541년 제네바는 상황이 반전되어 긴급히 영적 지도자가 필요했습니다. 제네바의 요청을 받은 칼뱅은 복잡한 심정이었습니다. 제네바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많았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이끌림에 의해 돌아갑니다. 기쁜 마음으로 제네바로 돌아갔다는 일부 학자들의 견해는 당시 상황을 기록한 칼뱅의 저작물을 충분히 살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네바로 돌아가기를 결정했을 때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나는 하루에 천 번 부서져야 했기에, 이 십자가를 지는 것보다 차라리 백 번 이상이라도 다른 죽음의 고통을 당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선택권이 내게 있다면, 나는 당신의 뜻을 따르는 것 외에 모든 일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나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나의 마음이 죽은 것 같이 여기며, 주님께 나를 제물로 드립니다.”

 

마치 사지(死地)에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는 주님의 외침을 닮아 있습니다. 칼뱅은 깊은 두려움을 안고 제네바로 돌아갑니다. 제네바로 돌아간 칼뱅은 가장 먼저 교회조례를 작성합니다. 이 조례를 통해 제네바 교회는 당회가 지도하고 감독하게 됩니다. 당회는 목사들과 12명의 장로들이 모여 구성됩니다. 비록 제네바 시의회는 칼뱅은 다시 초대했지만 교회대표로 구성된 당회(치리회)가 시민들을 규제하려 하자 충돌하게 됩니다. 치리회의 목적은 제네바 시민들이 복음에 합당하게 살고 도덕적 질서를 지키도록 감독하고, 교육하고, 다스리는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국가가 곧 교회라는 개념이 아직 강하게 남아있던 시기에 시의회는 교회 당회의 지도를 간섭으로 이해함으로 불가피하게 충돌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1553년에는 칼뱅을 반대하는 이들이 득세하여 상당히 위태로운 시간을 보냅니다. 당시 가장 난처한 문제를 일으킨 것은 세르베투스 사건이었습니다. 재세례파를 따랐던 그는 국가와 교회의 유착을 비판했고, 니케아 종교회의를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주장하기에 이릅니다. 결국 프랑스 가톨릭 종교재판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어 감옥에 갇히지만 탈출합니다. 제네바를 지나면서 그의 정체가 밝혀져 체포됩니다. 그는 가톨릭과 종교개혁가들 모두에게 이단과 같은 급진적 주장을 했던 것입니다. 칼뱅은 그에게 38개의 죄목을 작성하여 그가 이단인 것을 명백히 합니다. 결국 세르베투스는 화형에 처하게 됩니다. 칼뱅이 주도한 것도 아니며, 칼뱅의 화형을 시킨 것도 아니었지만 이 사건은 칼뱅을 엄격한 교조주의자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1559년 칼뱅은 평생의 소원이었던 제네바 아카데미를 개설합니다. 교장은 데오도르 베자가 맡게 됩니다. 이곳은 종교개혁의 요람이 되어 다른 지역과 영국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제네바 아카데미에서는 스콜라 프리바타라는 하급 단계의 교육과 스콜라 푸블리카라는 고급 단계가 있었습니다. 주로 목사 후보생들의 교육이 이루어졌지만 일반 대중을 위한 강연도 열렸습니다. 성경과 신학적 토론은 오직 라틴어로만 진행되었기 때문에 목회자들만이 참석했습니다. 제네바 아카데미의 목적은 바르게 성경을 해석하는 데 있었습니다. 아카데미에 대한 소문은 전 유럽에 급속하게 퍼져 많은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합니다. 1564527, 칼뱅은 마지막 숨을 거두고 달려갈 길을 마칩니다.

 

3. 나가면서

 

칼뱅을 단순히 종교개혁가와 기독교 강요의 저자로만 이야기하기에는 부족합니다. 칼뱅은 자신의 사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극도로 절제했기 때문에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문헌들이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적인 편지나 주석의 일부에서 드러난 표현들은 그도 연약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많은 이들이 칼뱅은 냉철하고 차가운 신학자로만 알지만 성격은 소심하고 유약했다고 합니다. 다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열정이 그를 강하게 만들었고, 죽음도 불사할 만큼의 담대함을 만들어냈던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도 칼뱅의 명석함으로 탄생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고,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기 위한 상황적 필요가 계속하여 수정하고 증보하도록 만들었습니다.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