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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과 기고글]/국민일보

[기독교 고전 읽기] 루터의 <세속권세>

by 하늘땅소망 2020. 4.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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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고전 읽기] 루터의 세속 권세

어느 정도까지 복종해야 하는가?

1. 들어가면서

이 논문은 1523년에 발표했습니다. 세속 권세에 대한 가장 초기 문헌에 속합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루터가 세속권세에 대한 이해가 없거나 무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신학 전반에 세속 권세에 대한 증언들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초기 저작에 속하는 <독일 크리스천 귀족에게 보내는 글>에서는 종교적 성향이 매우 강하긴 하지만 세속적인 문제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루터의 정치사상은 <두 왕국론>이라는 명칭 속에 잘 담겨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왕국이 아닌 정부로 번역하기를 추천합니다. 왕국은 왕이 다스리는 고전적 의미이기 때문에 시민 한 사람이 나라의 주인의 개념이 들어가 있는 정부와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매력적인 주장이긴 하지만 루터가 살았던 시대는 아직 선제후나 황제가 다스리는 곳이기 때문에 시대를 고려한다면 적합한 명칭은 정부보다는 왕국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루터의 <두 왕국론>은 어거스틴의 <하나님의 도성>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어거스턴의 <하나님의 도성>은 기독교 국가인 로마가 왜 멸망했는가에 대한 신학적 변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최초의 역사신학서로 알려진 어거스틴의 <하나님의 도성>은 세속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를 엄격하게 구분합니다. 세속 나라는 변하고 무너지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또한 세속 나라는 사단의 권세 아래 있는 반면,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에의 의해 통치되는 곳으로 상정합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하기 위해 복잡한 신학적 난제들을 끌고 옵니다. 예정론과 섭리, 가견적 교회와 보편적 교회 등이 등장합니다. 결국 보편적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임을 애써 증언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루터가 이 글을 썼던 시대적 배경은 상당히 다릅니다. 먼저는 중세교회가 가진 잘못된 세속 나라를 비판하기 위해서입니다. 중세교회는 기묘한 관점을 견지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에 세속 나라가 간섭해서는 안 된다. 세속 권세는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직솔 통치기관인 교회가 간섭할 수 있다. 이런 식의 주장으로 인해 극단적 이원론과 더불어 세속 권세 위에 교회가 올라서 있는 기형적인 주장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은 결국 교황의 세속 권세에 대한 통치를 신학적으로 제공해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는 이러한 교회의 주장을 반대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세속 권세에 대한 루터의 견해는 무엇일까요? 세속 권세에 대한 루터의 견해는 큰 틀에서는 어거스틴의 <두 왕국론>을 따라갑니다. 즉 세속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는 모두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와 세속 나라는 구분되어 있으며, 다른 영역이라는 것입니다. 칼뱅이 두 나라는 좀더 일치시키려고 했던 것에 비하면 루터는 중세 신학에 더 가깝다고 해야 합니다. 루터의 <두 왕국론>은 칼뱅에 의해 종교적 세속성의 발전하고, 결국 청교도주의에 의해 하나로 완전히 일치하기에 이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루터의 세속 권세를 읽어 나가면 좋겠습니다.


2. 간략한 요약

헌정사

고명하신 명문가 출신의 제후이자 주군이신 삭소니의 공장, 투링기아의 백작, 메이센의 후작이자 나의 자비로운 주군이신 요한.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바랍니다. 주군께서 내게 명령을 내리셨고, 많은 사람들의 요청이 있어 이글을 씁니다. 볼시비안 공은 어거스틴의 마태복음 5:25-40에 나오는 말씀과 로마서 12:19에 나오는 말씀이 양립할 수 없다며 비판했습니다. 그는 어거스틴이 악한 자들의 악을 허용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로 인해 기독교와 칼의 권세(세속 국가의 권력을 뜻함)가 양립할 수 없다고 비난했습니다. 이러한 잘못된 이해는 교황론자들이 세속 권력을 불온전한 것으로 보게 했고, 잘못된 오용으로 나아가게 했습니다. 이 이 문제들이 성경적 답변을 하고자 합니다.


성령의 명확성에 대하여


당신은 기독교의 교리를 두 부류로 나누고 한 부류는 알아야하고 다른 하나는 알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어떤 것들은 난해하고, 어떤 것들은 분명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아버지는 아시며,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고 했다. 즉 아버지 안에서 모든 것은 계시된다. 당신들은 극소수의 모호한 단어 때문에 성경이 모호하다고 말한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이해력을 허락하시어 우리는 성경을 이해할 수 있고, 복음은 만민에게 전파되고 있다.


나는 많은 부분에서 성경이 모호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성경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진리를 보지 않으려는 완악한 마음 때문이다. 수건이 오히려 그들의 마음을 덮은 것이다.(고후 3:15) 드러나 빛에 거하지 않으면서 자신이 마음의 어둠을 탓하지 않고 성경을 탓하는 것은 신성 모독적이다.


논고


나는 이전에 독일 귀족들에게 소책자를 발간하여 그들의 그리스도인의 직임과 직무를 제시한 바 있다. 이번에는 무엇을 생략해야하고, 무엇을 생략하면 안 되는지를 말하고자 한다. 지난번처럼 효과가 없을까 걱정이다. 신민들은 위정자들이 하는 모든 말에 순종해야 한다고 믿는다. 위정자들은 주제넘게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가 사람들의 양심과 신앙을 주관하려 한다. 게다가 자신들을 주군으로 부르라고 한다. 나는 더 이상 무자비한 주군들과 성난 귀족들을 보거나 방관하지 않을 것이다.


1. 우리는 세속의 법과 칼을 굳게 세워서 그것에 의해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성경은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13:1-2)고 했다. 베드로도 그렇게 말했다.(벧전 2:13-14) 세속 권세는 죄를 범한 자들에게 형벌을 준다. 이러한 일은 시초부터 있었다.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이 피를 흘려야 한다.(9:5) 모세의 법에서도 확정된다.(21:14)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데운 것은 데운 데움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21:23) 갚아야 한다. 그런 까닭에 칼과 세속의 법은 악한 자의 처벌과 올바른 자의 보호를 위하여 사용되어야 한다.

 

2. 분명 다른 측면도 있다. 주님은 눈은 눈으로 갚으라는 말이 있지만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고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고 하셨다.(5:38) 바울은 원수를 친히 갚지 말고 주님께 맡기라 했다.(12:19) 이런 구절들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칼이 없어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을 근거로 궤변론자들은 모세의 율법을 폐해야 한다고 말한다.

 

3. 아담의 자손을 두 부류로 분류한다. 첫 번째 부류는 하나님 나라에 속한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믿고 복종한다. 이들은 세속의 칼이나 법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만약 온 세상이 실제적인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제후나 왕, 칼은 필요하지 않다. 그들은 악을 행하지 않고 사랑하며, 불의를 견디며, 성령을 지니고 있다. 악을 행하지 않으니 세속 권세가 필요치 않다. 바울은 법을 불법한 자를 위해 있다고 말한다.(딤전 1:9)

 

4.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은 세상의 나라에 속한다.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 하나님 나라 바깥에 있는 다른 정부를 마련했다. 그들이 칼에 복종하도록 함으로 악을 행하지 못하게 하신다. 마치 야생의 사나운 짐승도 사슬에 끈에 묶이면 자기 속에 원하는 것이 있어도 할 수 없다. 반면 길들여지고 온순한 짐승은 사슬이 필요 없다. 세상에는 그리스도인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두 왕국을 두셨다.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을 가지면서 악을 행하는 자들도 있다. 두 왕국은 불가피하게 존재해야 하며 구별되어야 한다. 즉 두 왕국이 동시에 존재해야 한다.

 

5. 칼은 분명히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모든 제도에 순복하라(벧전 2:13)고 말한다. 비록 그리스도인들은 칼이 필요 없지만 이웃(비그리스도인)을 위해 필요하다. 칼은 세상에 평화를 유지하고, 죄를 벌하며, 악을 방지하기에 유익하다. 그들은 하고 싶어서 하는 것도 아니고, 필요하기 때문도 아니다. 하지만 국가의 보호가 필요하고, 악한 자들이 더 악해지지 않기 위해 국가가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세속 권세에 굴복하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다.

 

6.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이 세속의 칼을 지녔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리스도인은 이웃을 위해 일하고 있다. 자신의 복수나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다. 타인의 안녕과 질서를 위한 것이다. 성경도 이에 대해 명백한 증거들을 보여준다. 아브라함도 롯을 구하기 위해 칼을 들었다.(15) 사무엘 사사는 아각을 죽이기 위해 아각 왕을 베었다.(삼상 15:33) 구약이 폐하여졌다고 말하지만 바울도 구약의 홍해 사건을 통해 세례를 증언한다.(고전 10:3) 세례요한도 군인들에게 그만 두라고 말하지 않고 급료에 만족하라 하셨다.(3:14) 이것은 신약적으로도 그리스도인들이 칼을 지녀도 된다는 것을 증언한다.

 

2

 

그렇다면 세속 권세는 어느 정도까지 미치는가를 생각해보자. 앞서 말했듯 세상에는 두 나라가 존재한다. 세상 정부는 생명과 재산, 이 땅 위에서의 외적인 것에만 미친다. 영혼에 대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의 통치 아래 있기 때문에 세속 정부는 통치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명하지 않는 것은 기뻐하시지 않는다. 만약 세속 권세가 영혼을 통치한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다. 그들은 영혼에 대해 아무런 권리도 없다.

 

모든 영혼은 하나님의 권세 아래 있다. 오직 하나님만이 모든 것을 아시고, 보시고, 판단하신다. 마음과 생각을 읽을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외양만을 보는 세속 권세가 어떻게 사람의 영혼을 통제한단 말인가? 세속 권세는 믿음을 강요할 수 없고, 만들어 낼 수도 없다. 맹목적이고 비참한 대중은 자신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절망적인지도 모른다. 세속 제후들 역시 죄를 범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외적으로 성과 도시와 땅을 말도 안 되는 방법으로 통치한다.

 

바울은 모든 권세에 복종하라 한다. 하지만 합당한 권세가 있는 곳이 아니라면 순종할 의무는 없다. 하나님은 불의에 순종하라 하지 않으신다. 그들은 세상적인 제후들일뿐이다. 그들은 그들의 이름과 명성에 맞게 살아가기 마련이다. 태어날 때부터 현명한 제후들은 없다. 제후가 현명하거나 경건하거나 그리스도인이 된다면, 그것은 큰 이적들 가운데 하나이다. 세상은 너무나 악해서 현명하고 경건한 제후들을 가질 자격이 없다. 개구리는 황새를 필요로 한다.(속담을 빗대어 한 말로 보임)

 

그럼에도 감독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칼로서 영혼들을 다스리라 말한다. 감독들은 어떤 존재들인가? 그들은 섬김의 직분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두가 평등하여 누구도 더 높거나 더 낮지 않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스려야 한다. 오직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만 다스려져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강제 없이 온갖 선한 일을 자발적으로 행하며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3

 

이제 제후들은 자신들이 가진 권세를 어떻게 사용해야하는가를 살펴보자. 세속의 일들과 정부의 법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방대하고 다른 책도 많기 때문이다.

 

1. 제후는 자신의 신민들을 생각하고 바른 자세를 가져야 한다. 신민은 소유가 아니라 나는 땅과 신민에 속하자라고 생각해야 한다. ‘어떻게 하면 높아질까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그들이 편하고 보호받을 수 있을까를 생각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셨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제후가 된다면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한다.

 

2. 제후는 고관대작들과 참모들을 경계하고 그들에게 전권을 맡기면 안 된다. 신하가 아무리 지혜롭고 거룩하고 위대해도 절대 신임하는 것은 좋지 않다. 마침내 그가 아첨하여 제후로 하여금 못보고 못 듣게 할 것이다.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절대 신뢰해야한다. 어떤 제후도 다윗보다 더 잘 살아나갈 것이라 생각하는 교만을 갖지 말아야 한다. 아히도벨의 모략은 하나님처럼 위대했지만 결국 어리석게 되었다. 하나님만을 신뢰해야 한다.

 

3. 제후는 악을 행하는 자들을 공정하게 다루어야 한다. 누군가에게 약하게, 누군가에게 강하게 처벌해서는 안 된다. 다윗은 자신에게 죽일 힘이 없자 솔로몬에게 요압을 죽이라 명한다. 단 하나의 성을 얻고자 전쟁을 일으키는 자는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다. 만약 전쟁이 일어나면 원수를 정복할 때까지 공격해야 한다. 그것이 그리스도인다운 행동이며 사랑이다. 그러나 죄를 경계하고, 부인들과 처녀들을 범하지 말아야 하며, 승리가 얻을 때 투항하는 자들을 자비로 대해야 한다.

 

4. 제후가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인다운 방식으로 행해야 한다. 솔로몬과 다윗처럼 하나님께 복종해야 한다. 지혜를 구한 솔로몬처럼 지혜를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제후가 감당할 네 가지 의무이다. 첫째는 하나님에 대해 참된 신뢰와 기도, 둘째는 자신들의 신민들을 사랑하고 섬김, 셋째는 자신의 참모들과 통치자들에 대한 열린 마음과 판다, 넷째는 악행 하는 자들에 대한 합당한 열심과 확고부동함. 이렇게 한다면 그의 나라는 외적으로나 내적으로 올바르며 하나님과 백성들을 기쁘게 하신다. 그러나 그에게 십자가의 슬픔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끝으로, 만약 자신이 부당한 방법으로 재산을 획득했다면 사랑으로 반환해야 한다. 어느 누구도 반환하라하지 않지만 그리스도인이라면 사랑의 법칙에 따라야 한다. 또한 누군가 당신에게 채무를 가졌는데 그가 반환할 능력이 없고 가난하다면 탕감해 주어야 한다. 만약 채무지라면 자신의 생활에 크게 지장이 없는 한도 내에서 자신의 재산을 기꺼이 내여 놓아야 한다. 대접받고자 한다면 먼저 대답하라한 말씀처럼(7:12) 먼저 자신의 권리를 포기한 자만이 더 많은 권리를 얻을 수 있다.

 

3. 나가면서

 

<세속 권세>1523년에 발표한 논문입니다. 1522-3년은 기사들의 반란으로 독일은 혼란의 도가니였습니다. 다음 해인 1524-5년은 재침례파를 중심으로 한 농민반란이 일어납니다. 기사들이 반란은 쉽게 평정되었지만 농민반란은 토마스 뮌처를 중심으로 폭동과 혁명이 동시에 일어나 농민들이 무장했기 때문에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보다 못한 루터는 <살인자와 도둑떼인 농민들에 대한 반박>이란 글로 응수합니다. 마땅히 공격한 명분을 찾지 못했던 귀족들은 루터의 논문을 통해 신학적 정당성을 부여받게 됩니다. 결국 귀족들은 군인들을 이끌고 농민들을 공격했고, 무자비하게 제거해 버립니다. 이 부분은 루터에게 두고두고 흠이 되어 치명적 결함으로 바라보는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더라고 루터의 명령조에 가까운 농민반란 평정에 대한 그의 주장은 루터가 가진 정치관을 명징하게 드러내줍니다. 루터가 보기에 농민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아니었고, 평화를 깨뜨리고 질서를 어지럽히는 강도와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이들에 대한 루터의 태도는 이방인들을 로 생각했던 유대인들의 차별과 그리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루터가 인식했든 하지 못했던 루터의 정치관에는 심각한 오류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아닌 자들에 대한 깊은 적의는 폭력도 불사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이러한 견해는 후에 츠빙글리와의 성만찬 논쟁에서도 확연히 드러납니다. 루터는 츠빙글리에게 영이 다르다며 완전히 갈라서고 맙니다. 루터는 이분법적 정치관을 가진 중세교회를 탈피하고자 했으나, 결코 벗어나지 못했음을 명백하게 드러냅니다. 즉 세상의 악에 대해서는 세속 권세를 기꺼이 사용하여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 루터의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농민을 적으로 간주한 루터에게 폭력은 정당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매우 위험한 생각이었고, 후에 나치의 전쟁관에 적지 않게 스며들게 됩니다. 루터의 <두 왕국>은 칼뱅에 의해 보완되고, 재해석되는 부분도 적지 않지만 많은 왜곡은 그대로 가져갑니다.

 

루터를 정리하면, 그는 종교개혁을 일으켰고 진행시킨 점에 있어서 선구자입니다. 또한 존 위클리프와 존 후스, 그리고 에라스뮈스의 신학과 방법론을 총망라하여 집대성한 학자입니다. 성경을 어떻게 주해하고, 해석할 것인가에 대한 탁월한 안목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특히 그의 교리문답과 성경 번역은 앞으로 전개될 종교개혁의 틀을 잡아준 사건이었습니다. 이러한 긍정적인 부분도 적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신학과 성경관은 중세적 성향이 매우 강하고 큰 틀에서는 벗어나지 못한 부분도 적지 않습니다. 가장 처음 종교개혁을 이끌었기에 불가피한 일이었습니다. 루터를 읽고 연구하는 독자들은 이러한 정황들을 충분히 고려하고 읽어 나가야 합니다. 이제 루터와 동시대에 종교개혁을 일으킨 츠빙글리를 만나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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