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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없는 기독교 다른 복음

샤마임 2010. 9.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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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탄이 한 도시를 완전히 장악하면 어떤 모습일까? 저주 악담도 사라질 것이다. .. 공손하게 말할 것이며, 교회는 매주일 문전성시를 이룰 것이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그리스도가 선포되지 않을 것이다.

죄인들의 유일한 희망이신 그리스도에게서 다른 데로 눈을 돌리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아니라 우리의 행복에 의해 만사가 헤아려지는 곳, 우리가 죄인이라는 자각이 불쾌감을 주지 않도록 슬며시 뒤로 밀리는 그런 곳에서는 그리 어렵지 않다. 우리가 길을 잃기는 했어도 적절한 지침과 동기부여로 더 괜찬은 사람이 될 수 있는 착한 사람이라면 우리에게는 구속자가 아니라 인생의 스승만이 필요하다. 우리는 여전히 그리스도를 높이 우러르고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의 중심성을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는"(히12:2)에서 저만치 멀어지고 있다.

범상치 않은 이야기로 시작하는 마이클 호튼의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는 왜 인간이 참된 평강에 이르지 못하는가를 날카롭게 지적해준다.

"C. S. 루이스는 우리에게, 우리의 욕망이 너무 강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너무 보잘 것 없는 것이 문제임을 상기시킨다"(영광의 무게 중에서)

문제는 고귀한 영광에 주목하지 못하고 어린아이들이 값싼 초콜릿이나 사탕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처럼 눈앞의 욕구에만 추구한다는 데 있다. 포스터모더니즘 시대가 추구하는 감성주의적 경향은 결국 눈 앞에 보이는 쾌락을 즐거워함이 진리로서의 역할을 대신하게 된다. 포스트모더니짐은 '신의 부정'이 아니다. 아무 신을 믿어도 된다는 극단적 욕망을 따라가는 것이다. 

마이클 호튼은 교회 안에 이러한 포스트머더니즘적인 잘못된 영성운동이 결국에는 그리스도 없는 그리스도교로 안주하게 한다고 본다. 이러한 잘못된 비상착륙은 그 옛날 펠라기우스와 영지주의의 도덕성과 신비성을 통한 하나님 닮음으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창조를 죄악과 동일시하는 영지주의적 신비주의 추구는 극단적 율법주의과 금욕의 삶으로 이끌었고, 도덕적 율법주의 신앙을 진리인 것처럼 포장하게 만드는 것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역사와 교리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신비주의의 계단을 오르려는 욕망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그들은 한결같이 제도교회, 안수 받은 목회자, 신조, 설교, 성례 그리고 권징을 낯설어했다. 그것은 마치 개별적인 영혼의 감옥인 몸과 같은 것이었다".(215쪽) 이러한 영지주의적 개인지향 신앙은 공동체로서의 신앙을 버리고 오로지 하나님과 독대를 추구하게 했으며, 결국 중보자로서의 그리스도를 배제하게 되는 데 까지 나아가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 없는 그리스도교]를 양산하는 신학적 기초를 만들었던 것이다.

치유 방법은 없는가?

루터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의 선행은 하나님 아니라 당신의 이웃에게나 필요한 것이다" 그렇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섬기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은혜의 수단을 통해 우리를 섬기시며, 믿음과 회개를 주셔서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고, 그다음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우리의 다양한 소명을 통해 우리의 이웃을 섬기신다. 반면 행위로 말미암은 의(롬10:5)는...... 우리의 봉사를 하나님께 드려 우리가 복을 받으려고 한다.'(256쪽) 

결국 교회는 상승기독론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비하를 본 받아야 하는 것이다. 예배는 구원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기쁨의 반응이어야 한다. 봉사는 그 연장선에 있는 것이다. 악을 보고 적극적으로 제거하며 불의에 대한 말씀에 근거하여 정의를 외쳐야 하는 것이다. 소극적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그리고 강력하고 이 땅 가운데 말씀의 대리자로서 소명자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설교는 이 모든 헌신과 섬김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으며 축의 역할을 한다.

교회 안에서의 봉사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체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사역이다. 즉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 각자를 통해서 우리를 섬기신다. 특히 교회 안으로 부르신 직분자들을 통해서 섬겨 주신다. 지도자든 교인이든 목사와 교사라는 공적 사역은 전체 몸의 원활한 일을 방해하는 전제적 기구가 아니라, 승천하신 그리스도가 성도들을 준비시켜서 사랑 안에 서로 살고 이 세상에서 그들의 부르심을 이루게 하시려고 주신 선물(엡4:8-15)'인 것이다.(2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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